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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덕후가 만든 덕후노트, 복면사과 까르네

몰스킨, 미도리, 무지노트...

시그노, 제트스트림, 유니스타일핏...

사파리, 카쿠노, 프레피...


글쓰기엔 젬병이면서도 늘 필기구엔 욕심을 부리고 있는 나를 본다. 그마저도 비싼 브랜드는 엄두를 내기 힘들어 주로 중저가의 필기구를 기웃거리곤 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좋은 펜이 좋은 글을 쓰게 하리란 기대를 할만큼 어리석은 나는 아니다. 그저 뭔가를 쓰고 기록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펜이 좋다. 그리고 그 펜의 무대가 되는 노트를 고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별로 필요하지 않은데도 핫트랙스의 펜과 문구 코너를 수시로 들락거리고, 관련 유튜버들의 리뷰를 숙독하곤 한다. 그러다 우연히 '복면사과 까르네'란 노트 브랜드를 만났다.


아무리 봐도 별 특징이 보이지 않는 이 노트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바로 크기와 무게 때문이다. 무엇보다 평소에 매일 쓰고 있던 세줄일기에 최적화된 크기와 무게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3권짜리 묶음으로 파는 몰스킨 노트는 평소 쓰는 만년필이 그대로 뒷장에 묻어난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미도리의 트래블러스 노트는 노트 가격 치고는 너무 비쌌다. 조금 더 넓은 크기의 무지 노트는 가격에 매력이 있었지만 내구성에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절묘한 무게 중심의 한 가운데에 '복면사과 까르네'가 있었다. 그후로 아직까지는 큰 고민없이 이 노트를 반복해 주문하고 있다. 주문 과정이 꽤나 번거로운 편이지만 간간히 덤을 넣어주는 창업자 '복면사과'님의 마음 씀씀이에 취해 곧잘 다른 이들에게도 추천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 노트의 매력은 그저 그 쓰임새에 국한되지 않는다.


'복면사과'란 아이디를 쓰는 그는 한때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매달 나오는 지원금으로 고급 문구류를 사용하던 그가 퇴직하자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왔다. 퇴직 후에도 같은 문구류를 구입하려니 비용과 품질에 대한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노트의 여러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중에 판매되는 노트들의 문제점을 정리해서 국내외 제조회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했다. 심지어 '그렇게 잘 알면 직접 만들어보라'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노트를 만들기로 했다. 화학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친환경적인 필기용 고급용지를 생산하기 위해 여러 제조 공장들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렵게 수소문이 이어진 결과 그는 머나먼 베트남에서 노트 공장을 찾았다. 오랜 기간 노트를 제작해온 베트남 장인들과 소수 민족 여성들, 그리고 장애인들에게 노트 제작을 맡긴 것이다. 뜻하지 않게 사회 취약계층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업자와 환경 모두를 위한 친환경적 생산 공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퇴직금으로 만드는 그의 공장은 노동집약적, 핸드메이드, 전통적인 방법으로 노트를 만든다. 이렇게 효율을 중시하는 일반 노트와는 전혀 다른 노트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스테플러나 본드를 이용해 제본하지 않았다. 유럽 전통방식의 Back Stitched Spine 제본으로 제작한 탓에 아날로그적인 멋스러움 물론 내구성까지 충족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 노트 마니아드링 원하는 노트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노트는 어디가 앞뒤인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 흔한 로고나 브랜드명도 씌여있지 않다. 하지만 이름없음이 브랜드가 된 '무인양품'이 가진 철학을 오히려 더 잘 담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이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그 '이름없음'의 이유를 알기 때문에 더욱 이 노트를 애정하게 된다. 익명의 자유로움이 더 솔직한 의견을 개진하게 만들듯이, 아무런 장식과 자기 과시가 없는 이 노트에 나만의 '자기다움'을 채울 수 있다. 게다가 노트와 펜을 좋아하는 사람이 만는 노트인만큼 보이지 않는 디테일로 끊임없이 사용자의 '입소문'의 유혹을 자극한다. 아무런 포장이 없기에 더욱 이 노트를 '설명'하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핀란드파인, 마누카허니, 진저브레드, 하노이레드 차콜...


자신의 브랜드명조차 숨길만큼 소심해보이는 이 노트의 진짜 이름은 그래서 어쩌면 더 당차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얇은 탓에 한 권씩 채워가는 소소한 즐거움이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2천원에서 비싸도 5천원을 넘지 않는 가격은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용자들을 자뭇 겸손하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유저들이 몇 만원 짜리 파우치에 이 노트를 끼우고 다닌다. 어떤 물건의 가치란 이토록 조용히 스며들듯 그 효용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은 아닐까. 한 번이라도 더 자기의 이름을 알리려 애쓰는 요란스런 노트를 볼 때마다 안쓰러움과 함께 '복면사과 까르네'라는 어려운 이름을 다시 한 번 곱씹게 된다. 이름은 '가치'를 담는다. 사람들은 그 이름과 함께 그 숨은 가치에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것이 바로 브랜드와 스토리의 힘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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