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양재동 골목의 깊숙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확히 메시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건물을 둘러싼 담벼락에는 거대한, 그러나 경쾌한 광고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뭔가 비범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그 날 오후의 일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마치 보랏빛 소를 만난 기분이었다. 만난 사람들도,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자체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 집은 다름아닌 '간판' 만드는 회사였다.
회사 이름은 '동부기업'이라고 했다. 누가 이 이름을 듣고 선뜻 간판 회사를 떠올릴 수 있을까? 게다가 40년 넘게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명함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을 것이며, 이익을 위해 거짓말 하지 않겠다는 사훈?이 적혀져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이것이 빈말인줄로만 알았다. 지인분의 소개로 만난 대표님의 이야기가 잔잔히 시작되었다.
"1976년에 아버님이 이 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로 병원 간판을 만드셨는데 사업 방법이 좀 독특했어요. 간판 제작비를 받지 않고 유지보수비를 대신 받으셨으니까요. 초기 비용을 아끼고 싶은 병원 입장에서는 좋은 조건이었지요. 그렇게 몇십 년 이상 관계를 맺어오는 병원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때 시작한 간판 회사 중 지금까지 유지되는 회사는 저희 회사가 유일합니다. 돈이 아닌 신뢰로 만들어진 사업이었으니까요."
신선한 이야기였다. 웅진코웨이가 일어선 이른바 렌탈 서비스를 이 조그만 간판 회사가 40여 년 전에 이미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숱하게 들어왔던 '지속가능한 경영'이 바로 이 간판 회사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회사의 정문에는 동네 주민이라면 언제든 들어와 차 한 잔 하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어쩌면 그러한 사소한 배려심이 아니었다면 이 조용한 주택가 한 가운데서 간판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실을 알아챈 것인지, 회사 대표님은 사무실 구석진 곳에 있는 자신의 공간으로 나를 인도했다. 자신의 다양한 표정을 담은 사진이 한쪽 벽면에 즐비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다양한 표정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얌전한 첫 인상과 다른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회사를 대변하고 웅변하는 듯 했다. 다른 쪽 벽면에는 온갖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이 아닌) 편지와 메모들이 빼곡히 붙여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대표님의 어머니가 적어주신 메시지라고 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그대로 뭍어나는 따뜻한 글귀였다. 그 다음 주엔 아버님과 같이 이 업을 시작하신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관계, 신뢰, 지속가능한 경영... 이런 키워드들이 퍼즐 맞추듯 하나씩 연결되어 가고 있었다. 글로만 읽던 관광지나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 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사무실 바로 옆에는 작업실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그 직원을 인터뷰 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응에 내가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 직원분은 또 다른 형태의 인터뷰로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이면 저희끼리 워크샵을 합니다. 매주 한 사람씩 회사의 가치 키워드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다른 직원에게 발표해야만 해요. 예를 들어 '창의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자신의 업무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회사를 나간 직원도 적지 않아요. 저는 어떠냐고요? 그게 유익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곳에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겠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와 듣고 난 후는 매우 달랐다. 평범해 보였던 간판 하나하나가 비범해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자 회사 대표님은 그동안 자신들이 했던 작업물이 빼곡히 담긴 커다란 '아이패드' 하나를 꺼내 놓았다. 거기에는 내가 생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간판들이 줄을 이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십 미터의 건물 외벽을 가득히 채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광고, 페브릭 질감으로 보는 순간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는 양복점 '카호시' 간판, 좁은 이동 공간에서 측면의 시각을 배려한 '힐링톡스'의 돌출 광고... 다양한 재질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간판들이 줄을 이어 내 눈 앞을 채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작비는 정해져 있지만 컨펌이 날 때까지 작업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고객이 오케이할 때까지 새로운 제안을 계속 합니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클라이언트에 꼭 맞는 간판을 만드는 것이 진짜 목적이니까요."
하지만 이 회사는 그런 조건에도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번창하고 있었다. 그저 간판 회사일 뿐인데,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일해왔기 때문이리라. 목표가 다르니 결과가 다르고, 그렇게 차별화된 결과물들이 단순한 간판 회사 이상의 명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게 '브랜딩'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지만 이런 회사를 평소에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진짜는 크고 화려한 곳에만 있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런 잊혀진? 사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또 한 번 겸손해졌다.
물론 나는 이 회사를 딱 한 번 방문했을 뿐이다. 한 번의 인터뷰로 모든 것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이 회사를 자주 찾을 것이다. 도대체 브랜딩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작지만 강한 회사의 브랜딩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 나는 주저없이 이 회사의 대표님을 다시 찾을 것이다. 실망할 수도 있고, 더 크게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변치 않는 메시지 하나는 내게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해내는 것, 그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바로 브랜딩이라고, 그게 진짜 지속가능한 경영의 필요충분 조건이라고. 동부기업이 바로 그런 간판 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