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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것들

늦은 여름의 새벽은 빠르다. 채 6시가 되기 전에 이미 동이 튼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짜릿한 성취감을 느낀다. 묘한 일이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을 나섰을 뿐인데도 나는 일상의 승리자가 된다. 한적한 동네를 벗어나 큰 길을 10여 분 가량 걷다 보면 주유소 앞 건널목을 건너 탄천의 입구를 만난다. 무성한 풀 사이로 뻗은 비탈길을 내려가면 맞딱뜨리는 그곳은, 마치 같은 시간이 흐르지만 결코 만나지 못하는 평행 우주를 연상케 한다. 전혀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탄다. 계수대 근처 평지에선 늘 같은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같은 운동을 한다. 온 몸을 훑고 치기를 수십 분간 반복한다. 나무 의자에 누워 반쯤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때로는 심각하다 싶은 소리가 날 만큼 자신의 얼굴을 때리기도 한다. 주변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아크로바틱한 아저씨의 유난스런 운동은 매일같이 계속된다.



탄천을 따라 걷는다. 서너 마리의 새끼 오리가 능청맞게 내 앞을 걷는다. 이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아마 몇 달 전 만났던 그 새끼들일 것이다. 어미를 따라 길을 잘 못 들어선 이 친구들을 사람들이 탄천으로 몰아주기도 했었다. 그렇게 사람 손을 탄 것일까? 노란 부리를 흔들며 기우뚱 걷는 오리들을 사람들은 그저 힐끗 힐끗 쳐다보기만 한다. 녹색으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전거 도로를 만난다. 그 지점에서 '너구리를 조심하라'는 작은 플래카드 하나를 만난다. 그러고보니 저녁 무렵 동네 어귀에서 빛나는 너구리의 눈빛 서너 개를 만난 적이 있었다. 풀섶 사이에서 잔뜩 경계한 그들의 실루엣은 사진으로 찍어 남겨 두었다. 분면 너구리들이었다. 신기하다. 도시의 한 가운데서 이런 생명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니. 그러나 여기선 한 번도 그들의 모습을 본 일이 없다. 그저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자전거 도로와 조우한 길은 평행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진다. 느린 사람들과 빠른 자전거들이 각각의 속도로 좁은 길을 어지럽게 지난다. 그 길의 한 가운데서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노랗고 까만 털이 섞인, 솔직히 못생긴 길냥이였다. 문제는 이 친구가 사람들을 겁내지 않는다는 것. 인근에 놓인 밥그릇이 캣맘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한동안 조그만 안내문이 걸려 있기도 했다. 데려가기를 원한다면 잡아다줄 수 있노라고. 코팅된 A4 용지의 말미에는 전화 번호까지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꾸만 내 눈에 밟혀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하루는 와이프와 함께 고양이 케이지를 들고 이 친구를 찾았다. 목덜미를 쥐고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던 그 10여 분, 그 순간 만큼은 이 선택이 옳은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내 손과 팔을 뿌리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로 녀석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선한 의도가 괜한 두려움만 안겨준 것은 아닌지. 하지만 녀석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들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배를 까뒤집고 오토바이 소리를 내던 녀석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반환점에 도달한다. 탁 트인 전경 속으로 다리 하나가 시선을 가른다. 나는 거기서 언제나처럼 양 방향으로 사진을 찍는다. 앞 쪽으로는 고요한 탄천의 전경이, 뒤 쪽으로는 거대하게 솟구친 타워팰리스들의 위용이. 이 묘한 대조의 사진을 늘 다이어트 단톡방에 올려 인증을 마친다.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차례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팟캐스트를 듣는다. 즐겨 듣던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최근에 종영?을 했다. 아쉬웠다. '지대넓얕'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난 방송들을 통해 그들의 수다를 듣는다. 수다 속에 지식이 있다. 인사이트가 넘친다. 몇 개의 시사 관련 팟캐스트도 함께 듣는다. 균형감 있는 시선을 얻기 위해 다른 성격의 팟캐스트를 함께 듣는다. 유익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안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시선에서 균형감을 배운다. 그조차 질릴 때면 음악을 듣는다. 요즘 자주 듣는 곡은 영화 알라딘의 주제곡 'Speechless'. 한국어 버전과 교차해서 들을 수 있는 묘미가 있다. 힘있다. 아침을 깨울만한 곡이다. 이렇게 또 한 곡의 나만의 앨범, 명예의 전당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축적의 힘은 무섭다. 산책을 시작하는 그 순간 부터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모든 것이 글감이 된다. 시간은 흐른다. 오리도 고양이도 풀섭도 성장을 거듭한다. 늘 같을 것 같지만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반복되는 것들이 있고, 길게 뻗은 직선과 같이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이 공존한다. 매일 같은 스팟에서 사진을 찍지만 똑같은 장면은 하나도 없다. 일상 속에서 변화와 성장을 고민한다. 내가 매일 셀카를 찍는 이유도 그와 마찬가지다. 세상과 나의 변화를 자각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무엇보다 그 순간의 소중함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복잡하게 꼬인 생각들이 단순하게 정리된다.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조금 더 쉽게 분리해낼 수 있다. 경험한 것이 없다면, 느끼는 것이 없다면 쓸 수도 없다. 글쓰기는 경험과 사고의 영역이다. 그 경험과 사고는 또한 남달라야만 한다. 오롯이 내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글쓰기라는 군불을 때우기 위한 장작같은 시간들이다. 경험을 쌓고 느낌을 쌓고 생각의 장작을 매일같이 쪼개어 놓는다. 그리고 알게 된다. 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쓰는 것임을. 늘 같은 일상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사람은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살아 숨쉬는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책을 나선다. 늘 같지만 다른, 내 생각의 장작개비들을 쌓아올리기 위하여.





* '쓰닮쓰담', 평범한 사람들이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글쓰기 오프 모임입니다 :)

(참여코드: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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