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느 수요일의 글쓰기 교실

그녀는 한 마디로 '취미과다보유자'다. 항상 '뭐 배울게 없나'를 입에 달고 다닌다. 한 번은 기타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배우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사랑은 쉽게 식었다. 대신 우쿨렐레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기타보다는 훨씬 쉬웠다. 관련 모임엘 나가기 시작했다. 우쿨렐레를 직접 만들었다. 울림통의 한 가운데 구멍을 할로윈 호박 모양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이 취미도 정점에 이르자 이내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써핑에 빠졌다. 100만 원짜리 보드를 사서 강원도 양양을 제 집 드나들듯 왔다갔다 했다. 그 다음은 프랑스 자수, 그 다음은 그림 그리기... 그녀는 이렇듯 꾸준함이 없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뭐 하나 지긋이 붙들고 늘어지지 못하는 자신을 낮추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저마다 떠오른 단어를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열정, 호기심, 새로움, 몰입, 덕질, 실행력...



꾸준하지 못함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녀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을 찾기 위해 저마다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긍정의 단어들이 그녀를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하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단어가 '열정'과 '호기심'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작지만 놀라운 변화였다. 이 날은 자기 발견과 브랜딩을 위한 글쓰기 워크샵, '쓰닮쓰담'의 평일반 두 번째 모임이 열리는 날이었다. 7시에 시작된 모임이 9시 반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그 중 두 분은 아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놓지도 못하고 끝났다. 그렇게 7명의 각기 다른 삶의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메모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나름대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답다는 것은 '나를 움직이는 힘'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 힘을 '욕구' 또는 '가치'라고 부른다. 이 때의 가치는 어떤 '쓸모'라는 뜻도 있지만, 대상과의 '관계'에서 오는 '중요성'을 의미한다. 이 모든 사전적인 의미들을 조합하면 나답게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볼 수 있다. 나를 움직이는 욕구와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그 가치를 전파하는 삶, 그러나 그 욕구는 모름지기 '선한' 것이어야 한다. 히틀러도 자신을 움직이는 힘을 따라 살아간 사람이니까. 그것은 어쩌면 미움과 증오는 아니었을까? 그런 이들을 '나답게' 살았다고 말하는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를 움직이는 결핍과 두려움 조차 긍정의 단어로 바꿔놓는 것, 이 날 함께 들은 세진님의 이야기는 그런 나다움을 정의하는 좋은 모델이 되어 주었다. 다른 여섯 분의 이야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를 감싸는 생각, 아 나는 이런 소통을 통해 더 나다워지고 있구나...



어린 시절의, 젊은 시절의 나를 움직인 힘의 원천은 '두려움'이었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놀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평범한 삶의 범주에 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용기'라는 단어로 바꾸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군대를 다녀온 머리로 수능 시험을 다시 쳤다.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 50킬로그램의 몸무게로 군대를 자원했다(살을 더 빼면 군대를 안 갈수도 있었다). 서른 다섯의 나이에 웹 기획자에서 글 쓰는 에디터로 직업을 바꾸었다. 두려움도 많았지만 나름대로는 용기를 낸 적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새롭게 나를 정의하자 소심하고 예민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섬세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다르게 정의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500여 명이 모인 스몰 스텝이라는 모임의 출발점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들의 지지와 격려가 내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 '용기'라는 가치는 나를 살린 단어였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나다워질 수 있었다.


나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 주위에는 특유의 '에너지'들이 흐른다. 설리를 이해한다는 윤정님의 이야기는 '깊은 유대감'이 얼마나 위대한 가치인지를 웅변하고 있었다. 희주님은 악동 뮤지션의 신곡으로 자신만의 탁월한 예술적 심미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은경님은 '다정이 병'일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병을 '불치병'으로 정의하고 다정한 삶을 꿋꿋이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민기님은 군대에서 면제를 받은 것을 계기로 특수체육을 업으로 삼았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그의 확신에 찬 미소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연화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달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초록, 모자, 나무, 자연, 커리어우먼, 보살,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설레임, 올곧은 바른... 그녀를 묘사하는 답문자들이 쇄도했다고 했다. 그날 그녀는 온 몸에 에너지가 '빵빵'해졌다고 말했다. 태연님은 몇 년전 세상을 떠난 반려견 '뽀미'의 마지막을 어제 일처럼 얘기해주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임이 이로써 분명해졌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 달랐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들만의 '나다운' 삶을 정의하기 위한 훌륭한 소스가 될 것임에 분명해 보였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목적이 분명해야 오히려 좋은 글이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우리가 함께 하는 글쓰기 워크샵을 통해 '나다움'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랬다. 한 마디로 나를 '브랜딩'하는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나만이 가지고 태어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체화하고 전파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을 내가 다녀감으로써 세상이 조금은 더 살만해지는 곳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까. 가르치기 위해 선 자리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주말반, 평일반을 합친 17명의 수강생에게 매주 새로운 것을 배운다. 이미 그들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는 또 한 번 겸손해진다. 그리고 또 한 번 나다워진다. 또 한 번의 멋진 수요일이 그렇게 조용히 충만해지고 있었다.





p.s. 글쓰기를 통해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쓰닮쓰담'은 현재 2기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 '황홀한 글감옥'에서 다음 쓰닮쓰담 3기 모임을 기다려주세요. :)

(참여코드: prison)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뜨거웠던 토요일에 만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