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명 남짓한 분들과 글쓰기 교실을 한다. '쓰닮쓰담'이라는 이름이다. 주말반 평일반으로 나누어 함께 글을 쓴다. 사실 이 수업의 진짜 목적은 '자기 발견'에 방점이 있다. 내가 알았던 혹은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그에 따른 나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어제는 평일반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욕구와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다. 나는 메모하는 시간도 아까워 녹음기를 틀어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알 듯 모를 듯한 각자의 욕구와 가치가 묘하게 섞여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때 평소 상담일을 하던 J님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종류의 '나'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들려주었다. 안갯속처럼 뿌옇던 각자의 모습이 조금은 더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 세 가지 모습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었다.
1) 성품, 성격, 기질 혹은 과거의 나
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집도 책상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무언가 불편해진다. 조용한 버스 안에서 유독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금요일 밤의 미드와 맥주 한 캔을 즐긴다. 회식도 즐겁지만 2차, 3차는 피하고 싶어진다. 집으로 돌아와 들뜬 나의 마음을 가라앉힐 때가 비로소 행복감이 든다. 이건 타고난 성품이다.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기질 탓이다. 그래서 요즘처럼 집을 보기 위해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그 당연한 당혹감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보다는 한 두 사람과의 깊이 있는 대화가 좋다. 이것이 깨어질 때 나는 금새 당황하고 만다. 회사 생활보다 혼자 일하는 지금이 몇 배나 편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지 모른다.
2) 욕구, Driving Force 혹은 현재의 나
그런 내가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니고 글쓰기 수업을 한다. 바로 '소통'에 대한 갈급함 때문이다. 나의 성품과는 또 다른 내 모습이다. 관계의 불편함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들과 교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도 지켜야 한다. 그렇게 찾은 방법이 바로 글쓰기이고 강연이었다. 내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 그것이 바로 '스몰 스텝'과 같은 자발적인 커뮤니티였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 안에서 비로소 나는 소통에 관한 나의 숨은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타고난 내 모습을 일정 부분 희생해야 얻을 수 있는 유익이었다. 나이가 먹고 성숙함에 따라 그러한 소통에 따르는 불편을 감수할 만한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3) 숨어 있던 가치 혹은 미래의 나
하지만 나는 가끔씩 나를 넘어선 용기있는 선택을 하곤 했다. 두 번째 수능 시험을 칠 때가 그랬고, 나이 서른 다섯에 직업을 바꿀 때가 그랬다. 글쓰기와 강연이 그랬다. 첫 번째 전공이었던 '무역학'은 첫 수업을 마치고 이 길이 아님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군대를 다녀와 다시 수능에 도전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찾은 첫 번째 직업은 웹 기획자였다. 몇 년을 일한 결과 내 별명은 '빈틈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답지 않은 일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책을 쓰고 강연을 했다. 이제는 강연을 코 앞에 두고도 긴장하는 법이 없어졌다. 내 속에 숨어 있던 용기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런 용기를 내는 일이 한결 쉬워졌다. 그 용기로 크고 작은 일들을 벌이며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하나 둘씩 발견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런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한 사람을 안다는 일은 얼마나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인가. 어설픈 잣대로 사람을 규정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발견이고 응원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함께 수업을 듣는 N님은 대기업에서 유통을 거쳐 전략기획에 관한 업무를 해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1년을 휴직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다시 휴직을 연장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직의 생리를 잘 알고 그에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아무 옷이나 걸친채 새벽 일찍 카페를 찾아 하루 종일 혼자 놀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부자유한 공존을 가능케 한 건 인내이자 학습의 결과였다. 자유로운 성품을 가진 원래의 그와, '호기심'이라는 욕구로 충만한 현재의 그가, 휴직이라는 여유를 만나 더 큰 열심을 만들어냈다. 그는 지금 어떤 휴직자보다도 더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미래의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조직에 매이지 않는 자유함과 다양한 기회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그런 그를 '가치'있게 만드는 미래의 삶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 작은 가능성을 '사람책'이란 행사에서 보았다. 사람책은 평범한 사람들을 무대로 끌어내어 15분의 강연을 듣는 그만의 아주 개인적인 프로젝트였다. 그 강연을 듣는 데는 커피 한 잔 값이면 충분하다. 행사의 취지에 대한 괜한 오해로 마음 고생을 치룬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그 무대에 올릴 사람을 찾는데 눈을 반짝인다. 나는 연사를 섭외하는 그의 눈빛에서 자유와 호기심이라는 키워드를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조직에 매이지 않은 채 어떤 구속도 없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 자체가 그에겐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하나의 가치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면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미래의 그를 빛나게 할 기회는 바로 이 다양성의 가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하는 어떤 일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나답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광고의 카피로 쓰일 만한 가벼운 말이 아니다. 나를 이해하기 위한 심리 검사가 남을 평가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아왔는가. 한 사람을 하나의 단어로 가두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함한 일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좀 더 자기다워졌으면 좋겠다. 품성이라는 과거의 자신을 바탕으로, 욕구라는 현재의 자신을 달래가며, 가치라는 미래의 우리 모습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쓰닮쓰닮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글쓰기 교실이다. 자기 발견의 열린 공간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만들어갈 것이다. 가장 그(녀)다운 모습을 같이 발견해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가장 나다운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