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 한 켠에 놓인 '매거진 B'를 읽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브랜드 컨설턴트의 짧은 한 마디, 자신의 기대엔 미치지 못했다는 냉정한 멘트가 담겨 있었다. 기대한 '정도만' 만족했다는 내용이 사족처럼 들렸다. 사실 나는 아직도 커피맛을 모른다. 1년 이상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셔도 커피는 여전히 '맛있는' 대상이 아니다. 카페에서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서기도 하고, 어쩌면 그 쓰고 신 그 강렬한 맛 자체가 원래의 커피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굳이 달달한 라떼를 찾지 않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블루 보틀의 커피 맛에 대해선 아내에게 평가를 대신 맡겨보기로 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어쩌면 공간으로서, 브랜드로서의 블루 보틀이 가진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쪽이었다. 그래서 카메라, 아니 스마트폰을 들었다. 저 멀리서 어여쁜 직원 한 분이 내 쪽을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카페의 구조를 생각해보자. 스타벅스를 위시한 대부분의 커피 프랜차이즈점들은 고객의 공간과 서비스 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 경계선에서 주문과 계산을 마친 후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이동한다. 하지만 블루보틀은 다르다. 공간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 경계가 어설프다. 직원들은 수시로 그 경계선을 넘나들며 손님을 맞이한다. 베이지와 푸른색의 유니폼이 해변가의 파도와 모래처럼 고객들 사이를 물결친다. 이 자연스러움이 다소 냉랭할 수 있는 인테리어의 단점을 순식간에 커버한다. 공간이 살아 움직인다. 성수점은 지하에 있지만 마치 1층처럼 볕이 잘 드는 열린 공간이다. 아늑하고 편안한,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의 스타벅스와는 그 점에서 구분이 된다. 좀 더 생동감 있다. 유독 젊어(어려) 보이는 직원들의 분주한 몸짓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나기를 반복한다. 이게 의도된 연출이라면 블루 보틀의 매력이 배가될 것만 같다. 블루 보틀의 매력은 어쩌면 이런 살아 숨쉬는 분위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블루보틀 성수점의 특징은 비어 있는? 공간이 많다는 점이다. 압구정점에 비하면 그 특징은 유독 도드라진다. 1층과 지하 공간의 절반은 아주 소수의 직원들만이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커피를 연구하는 공간일까?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일까? 그로 인해 고객의 공간은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청 너머로 좁게 모여 앉은 공간 배치 역시 스타벅스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마치 이곳에서의 주인공은 직원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테이블 앞에서 모니터를 쳐다보며 일하는 모습은 아예 불가능한 구조다. 그런 면에서 또 하나의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커피가 된다. 스타벅스가 집안의 거실을 밖으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컨셉이라면 블루 보틀은 커피 공장의 한 켠에서 시식하는 손님들이 모인 것 같은 모습이다. 날 것 같은, 짓다가 만 것 같은, 커피 연구소의 한 켠에서 우리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유명해진 블루보틀의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에겐 유난스러워보일, 누군가에겐 색다르고 재미있어 보일, 카페에 대한 새로운 해석 정도로 이해한다면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블루 보틀의 컨셉은 'Slow Coffee'다.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창업자는 커피 수레를 끌고 다니며 성격 급한 미국인들에게 핸드 드립 커피를 팔았다. 수 분 이상 걸리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지금의 블루보틀을 만들었다. 일본 문화에 대한 그들의 외경심은 보이지 않는 이 브랜드의 곳곳에 녹아 있다. 베이지와 블루의 묘한 조합에서 일본 브랜드가 가진 특유의 심플함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많은 매장이 위치한 곳도 다름 아닌 일본이다. 이런 동서양의 정서적 만남이 되려 미국 사람들에겐 신선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정제된 커피 문화를 다시 소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인 국내의 수많은 카페들이 올드해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블루보틀을 커피 업계의 애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얼마나 일본의 선(禪) 사상에 심취해 있었는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팔고 있는 것은 커피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가 블루 보틀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블루보틀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그들이 전하고자는 이 기다림과 느림의 철학은 아닐까?
* 작지만 강한, 자기다움으로 충만한 스몰 브랜드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