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안 읽힐 때는 스티븐 킹을 읽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유독 그의 책이 재밌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나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의 소설은 특별한 사건 보다 내밀한 인간 심리를 다룬다. 그저 분위기만으로도 심장 쫄깃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소설이나 영화를 '스릴러'라고 부르던가? 모두가 다 아는 팩트 한 가지를 향해 시종일관 뒤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이 영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 남짓한 시간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간다. 배우들의 연기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병헌, 이성민, 곽도원까지... 연기만으로도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과연 얼마만인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날, 아니 그날이 있기까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정말로 무지했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부분을 다룬다. 누군가에겐 식상할 수도, 나같은 사람에게는 새로울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가 중요시 하는 부분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 사건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불안과 초조와 의심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회사 생활이 불행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조그만 회사 안에서도 정치가 있었다. 회사 이사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 날이면 사람들이 신경들이 전에 없이 곤두서 있었다. 10센티미터의 자리를 양보하지 못해 얼굴 붉히는 장면도 보았다. 하물며 절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심리 상태야 더 말해 무엇하랴. 내가 박정희라면? 내가 김재규라면?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맞았을 것인가.
총선을 앞두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정치판으로 몰려 든다. 권력욕이라고는 털끝 만큼도 없다고 스스로를 생각한 건 이런 정치판의 이합집산 때문이었다. 그 고생을 다해가며 굳이 정치를 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 다들 재산도 명예도 가질만큼 가진 사람들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사람은 셋만 보여도 정치를 하게 된다. 리더와 후임자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리더십을 고민하고, 상사를 욕하고, 승진을 갈망한다. 영화 속 김재규처럼 소외를 경험하기도 하고, 영화 속 박정희처럼 병든 리더십을 흉내내게 된다. 김재규와 차지철, 김형욱을 다루는 박정희의 모습은 내 기억에도 아주 익숙하다. 그들 각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준 듯 하지만 실은 철저한 경쟁으로 그 관계를 조율하고자 하는 모습. 영화 속 박정희의 다음 한 마디가 오래도록 귀에 남는다.
"임자,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
박정희 대통령의 비리를 고발한 김형욱은 어느 유럽의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암살 당한다. 그때 그가 마지막 바라본 장면은 신발 한짝을 잃어버린, 양말만 덩그라니 남은 자신의 왼쪽 발이었다. 박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가 남산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바라본 장면 역시 그와 같았다.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자신의 양말을 바라보던 김재규의 쓸쓸한 모습, 과연 그 장면에서 실제의 김재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장면에서 영화를 남산이 아닌 육본으로 차를 돌린다. 간간히 등장하던 기회주의자 전두환이 김재규를 체포한다. 그렇게 또 다시 군인들이 쿠테타로 정권을 잡는 새로운 비극의 서막이 열리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영화는 팩트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각자 다른 이름으로 묘사되는 이 영화를 보고 픽션과 논픽션을 논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18년 권력을 차지한 한 인간의 고뇌, 그의 주위를 둘러싼 심복들의 내밀한 불안이다. 이런 감정을 제 일처럼 느끼지 못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좇는 것은 부동산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이다. 그 기회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기에 낯선 것일 뿐이다. 굳이 역사책을 뒤져보지 않아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리더들의 이야기는 주위에 넘쳐난다. 권력의 덧없음을 아무리 웅변해도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종국엔 파멸이 있다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 꼭대기를 향해 남을 밟고 올라가는 일을 서슴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삶을 선택하고자 한다. 일상의 작고 사소한 것들을 향한 열심으로 내 삶을 채우고자 한다. 그들이 그토록 바랬던 것도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 마시고, 노래 한 소절을 마음 편하게 부르는 그런 삶 아니었던가. 그건 18년 독재가 아니었다면 더 쉬웠을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