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몇몇 선생님을 거쳤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오랫동안 가르치신 분은 해진 선생님이다. 해진 선생님은 70을 바라보던 백발의 할머니셨다. 선생님은 피아노 연습이 끝나면 매번 모든 건반을 전부 닦고 피아노 뚜껑 위에 신문지를 덮어놓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의 30년 된 피아노는 늘 광이 났고, 나 또한 그렇게 소중한 선생님의 피아노를 함부로 칠 수 없었다. 해진 선생님과 체르니 30번 한 권을 다 뗐으니 나는 피아노의 기본을 해진 선생님께 다 배웠다고 할 수 있겠다.
해진 선생님은 나에게 단순한 피아노 선생님이 아니었다. 거의 할머니나 다름없었다. 바빴던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는 저녁이 될 때까지 선생님과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과 나무토막으로 미니 윷놀이를 하며 놀기도 하고, 수능을 안 보고 대학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지 질문하며 모든 궁금증을, 선생님을 통해 해결했다. 가끔 내가 소화가 안 된다고 축 처져 있기라도 하면 선생님은 유리 항아리에 담긴 매실을 꺼내주셨는데, 신기하게도 그 매실 열매 한두 개만 먹어도 꽉 막혔던 속이 금세 나아졌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 피아노를 좀 친다고 하는 친구들은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화려한 음악을 쳤다. 분명 나도 배우면 잘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진 선생님은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며 소나티네를 한 번도 안 틀리고 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라고 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두 손을 바꿔가면서 화려하고 빠르게 연주하는 아이들에게 열광하는데, 선생님은 피아노 페달 하나 밟지 못하게 하고, 건반 하나하나의 소리를 또록또록하게 내는 데 집중하라니! 역시 할머니 선생님이라 트렌드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해진 선생님이 아닌, 세라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세라 선생님은 무섭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세라 선생님이 가르친 수강생들은 동네 음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해진 선생님은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하셨지만, 그래도 나의 뜻을 묵묵히 존중해주셨다. 세라 선생님을 만나 처음으로 레슨을 받던 날, 세라 선생님은 나에게도 베토벤과 쇼팽의 악보를 건넸다. 나는 음표가 빽빽한 악보를 들고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세라 선생님은 나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아노 줄이 끊어질 만큼 건반을 세게 눌러 치며 성질을 냈고, 때로는 “나가!”하며 고함을 질렀다. 세라 선생님의 필통에는 항상 장구채와 긴 회초리가 있었는데, 레슨 받다가 그걸로 맞고 울던 아무개 얘기를 하며 겁을 주곤 했다.
세라 선생님은 애들이 한창 배고파할 시간인 오후 4시가 되면, 예뻐라 하는 한두 명만 레슨실에 부른 후 몰래 컵라면과 간식을 먹였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세라 선생님에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갖다 준 직후였거나 세라 선생님이 원하는 게 있을 때였다. 세라 선생님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선생이었기 때문에 애제자는 수시로 바뀌었다. 가끔 내가 대회에서 큰 상을 타오면 내가 세라 선생님의 애제자가 되었지만, 얼마 후 부잣집 부모들이 다녀가고 나면 금세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곤 했다. 결국 세라 선생님과의 관계는 나의 감정과 실력을 지배했다.
그제야 나는 해진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쇼팽을 치고,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는 게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 해진 선생님이 하듯이 피아노를 소중히 다룰 줄 알고, 한음 한음 정확히 내면서 기본기를 다지는 게 음악을 오래 하는 방법이자 더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해진 선생님께 찾아갔다. 선생님은 늘 나를 어제 만난 손녀처럼 반겨주셨고, 선생님과 피아노를 치고 나면 그때 주셨던 매실을 먹은 듯 마음과 몸이 편해졌다.
‘선생’과 ‘스승’은 다르다. ‘선생’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 국한된 사람이다. 하지만 ‘스승’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삶의 방향성을 가르치는 인도자를 뜻한다. 나에게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준 건 세라 선생이었지만, 내 삶에 남아있는 따뜻한 기억과 음악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 사람은 해진 스승님이다. 지금도 나의 삶과 취향에는 해진 스승님의 흔적이 묻어있다. 어린 시절, 내가 받은 많은 트로피는 시간이 흐르며 빛이 바랬다. 하지만 해진 스승님이 내게 남겨준 마음의 온기는 여전히 내 손끝에서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