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
이른 아침, 아이는 여느 때처럼 달리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상쾌한 아침 공기로 몸을 깨우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 아침 운동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그런 내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내일부터는 함께 나가자고 한다. 거절하지 못했다.
오늘 운동 중에 아이가 여우를 봤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우라니! 며칠 전 눈이 오던 날 저녁,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지나가는 토끼를 본 적이 있었다. 세종에서 종종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여우와 토끼를 눈앞에서 보게 되니 색다른 경험이었다.
오늘은 바람도 불지 않고, 눈도 오지 않는 포근한 날이었다. 산책도 할 겸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끼를 먹지만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아 식재료가 금방 줄어든다. 내가 주로 사는 재료는 감자, 두부, 양파, 피망 같은 채소와 사과, 오렌지 같은 과일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는 소고기, 연어, 소시지 같은 것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로 혼자 먹어야 하다 보니 대용량 포장을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엄마는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있으면 먹으니 신경 쓰지 말고 사고 싶은 걸 사라"라고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원래 대형마트에 잘 가지 않는 편이다. 오늘도 장을 보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셀프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다가 문제가 생겼다. 아이는 원플러스원인지 모르고 있던 스콘을 하나 더 가지러 간 사이였다.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Excuse me" 하며 몇 발짝 떨어진 직원을 불렀다. 직원이 와서 길게 설명하며 문제를 해결해 주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새 아이가 돌아왔고, 무사히 계산을 마쳤다. 그 순간,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볼 수 있는 통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번역기가 발달해도 실제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과는 다를 테니까.
아이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이의 식성이 많이 변해 있었다. 집에 며칠씩 올 때마다 나는 아이들이 늘 먹고 좋아했던 집밥을 준비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묵무침, 불고기 같은 익숙한 메뉴였다. 그러다 어느 날은 아이가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었는데, 카레와 난, 파스타 같은 일품요리를 척척 해내는 모습이 신기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아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주로 해 먹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이제는 뚝딱 요리도 잘하고, 잘 먹는 청년이 되었다.
장을 보러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유난히 많은 사람을 보았다. 날씨가 포근해서인지 산책하는 이들도 많았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엔 마침 집 앞 학교의 하교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님들의 차량과 함께 걸어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에 비상등을 깜박이고 길게 늘어선 차량들이 왜 서 있는지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하교하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차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저녁밥을 지었다. 반찬은 많지 않았다. 가지, 마늘종, 당근, 브로콜리를 넣어 볶은 야채볶음, 황태콩나물국, 김, 배추겉절이가 전부였다. 그런데 아이가 이층에서 내려오더니 "오늘 장 본 재료로 반찬을 하나 더 만들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당연하지!"
아이가 만든 반찬은 스테이크였다. 빠른 손놀림으로 고기를 굽고, 프라이팬에 남은 육즙으로 야채를 볶아냈다. 다 구워진 야채 위에 미디엄 레어로 구운 고기를 얇게 잘라 올렸다. "와! 맛있는 냄새!" 냄새만으로도 이미 성공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이곳에 와서 아이와 함께 밥을 준비하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집근처에서 자유로운 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