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이야기, 우리만의 속도

D-14

by 리베르테

"우산을 쓸까 말까 망설이게 하는 애매한 비가 왔다." 작은 결정 하나를 두고도 이렇게 망설이는 내가, 지금 이곳, 캐나다 해밀턴에 와있다. 그것도 수능을 앞둔 아이를 두고서. 수능생 엄마가 선택한 세 달간의 여행. 주변의 우려 어린 시선과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반응을 뒤로하고 온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소소한 망설임 속에서도 내 선택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아침에 일어나 공원으로 향했다. 운동이라기보다는 산책이라 해야 할 것 같은 발걸음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우산 없이 가기로 했다. 이보다 더 많이 내리는 비에도 우산을 쓰지 않는 이곳 사람들을 보며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치 내 여행을 결정할 때처럼, 오늘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미끄러질 뻔했다. 보이지 않게 길이 얼어있었던 모양이다. 조심조심 걷다 보니 발걸음이 더뎌졌다. 혹시 모를 이웃과의 마주침에 대비해 '누군가 웃어주면 나도 활짝 웃으며 hello!'라고 인사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연습까지 했다. 내 소심한 성격은 이국땅에서도 여전했다.


집 근처 공원을 걸으며 이곳의 아침 풍경을 마주했다. 등교시간이라 노란 스쿨버스가 지나가고, 옆집 남매가 등교하는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데,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전화기를 보니 둘째 친구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행 가셨다고 들었는데 무탈하게 잘 다녀오세요." 어느새 이렇게 컸나 싶어 기특했다. 아이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둘째 생각이 났다. 산책하며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문득 내 조심스러움이 아이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생을 둔 엄마가 이렇게 멀리, 그것도 세 달이나 여행을 와도 될까? 이 질문은 여행을 결정하기까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수능생 부모는 마치 아이와 함께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내가 아이를 두고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부분 "어떻게 그럴 수 있지?"였다. 그것도 굳이 꼭 지금 가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지금, 바로 떠나고 싶었고 내 생각대로 여행을 왔다.


둘째에게 캐나다 석 달 살이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아이는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며 기꺼이 즐겁게 다녀오라며 나를 응원했다. 그럼에도 주저하는 나에게 자신의 시험과 내 여행은 아무 연관이 없으며 "엄마는 그 누구를 위해 엄마 인생을 미루지 말고, 행복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라며 적극 지지해 주었다. "제가 시험 보는 것과 엄마 여행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멀리 계시든 가까이 계시든 저를 응원하는 마음은 같으실 테고, 이 상황은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인데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 상황과 맞물린 내 여행 계획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사람들은 아이와 나만이 알 수 있는, 타인이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임을 몰랐다. 결국 나는 이곳에 와 있다.


아침을 먹으며 여행 오기 전 있었던 주변과의 대화, 그리고 고민했던 나의 감정을 큰아이에게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이번 여행이 무리였는지도 물었다.

"엄마가 그렇게 의식하시는 걸 보니, 신경이 쓰이시나 봐요. 그렇다면 엄마 소신이 부족하신 거 아닐까요? 그런 말에 좌지우지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엄마는 ‘우리 엄마’잖아요! “


명쾌했다. 다른 집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는 것.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우리만의 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큰아이의 단호하고 명쾌한, 가끔은 매몰차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 말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오후가 되자 비는 눈으로 변했다. 손가락마디만 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눈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현관문을 열자 동화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국적인 나무들 사이로 펼쳐진 하얀 설경,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자동차. 눈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낯설지만 편안했다.


"아, 눈이 이렇게 많이 오다니. 군대 이후 이곳에서 처음으로 눈 치우기를 하는 것 같아요"라는 아이의 말에서 문득 지나간 시간이 스쳐갔다.


저녁에는 각자의 스타일대로 덮밥을 만들어 먹으며, 지금 아이가 만들고 있는 콘텐츠와 글쓰기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귀찮음이 몰려올 때 피해 갈 수 있는 예외를 두면 안 된다"며 "무엇이든 생각하면 그 즉시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 알았다. 네 눈에는 엄마가 요리조리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하지만 엄마는 엄마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단다. 모든 사람이 너처럼 생각과 동시에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


"글을 쓰는 일도, 여행도, 삶을 살아가는 일도 결국 나만의 속도를 찾는 과정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우산도 쓰지 않고, 눈길도 걸어보고, 때론 망설이면서도 한 걸음씩. 나는 오늘도 나답게 이곳의 시간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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