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5
드르륵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캐나다의 겨울은 바람 소리와 눈 치우는 소리로 가득하다. 평소 한 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편인데, 이곳에서는 낯선 소리들에 자꾸 잠이 깬다. 특히 오늘은 한국과의 줌 미팅을 위해 6시에 알람을 맞춰둔 탓인지 더욱 예민했다. 13시간의 시차에는 적응했지만, 여전히 이곳의 겨울밤공기는 낯설다.
아침 줌 미팅 중, 아이가 이층에서 내려오며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고 했다. 영하의 날씨에 제설 작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때 밖에서 차고 앞 눈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치워도 될 텐데, 혼자 달리기 전에 먼저 치우고 있다. 아이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고 먼저 움직이고 할 일은 즉시 한다. 그 모습이 기특하다.
오랜만에 한국의 반가운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고 새해 인사를 나눴다. 줌으로 만나는 시간이지만, 책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이 즐겁고 의미 있다. 올해 첫 책으로 '데미안'을 골랐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느낌이 사뭇 다르다. 열여덟의 나는 이 책에서 청춘의 반항을 읽어냈고, 지금의 나는 삶의 성찰을 발견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 책의 매력은, 아마도 각자의 나이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점일 것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이 문장은 자아 발견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대로 살아가기가 왜 이토록 어려웠을까? 지난 시간 '엄마' ‘아내’ ‘며느리’ ‘직업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내 안의 다른 이름들은 조용히 접어두었다. 내 꿈이 무언지 잊혔고,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었던 욕망까지.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나 역시 남들이 기대하는 역할 속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나만의 길을 찾아보려 한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 여전히 나를 붙잡지만, 조금씩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아이가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와 씻은 뒤, 아침 준비를 하면서 "엄마도 운동하고 오세요"라며 채근한다. 나가기 싫었지만, 아이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기 싫어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섰다. 아이가 어른이 되니 가끔 대하기 어려울 때도 있고, 은근히 눈치가 보일 때도 있다. 어제는 자신감 없어하는 내 태도를 지적하더니, 오늘은 운동을 권하는 모습이 마치 내가 어릴 때 엄마께 잔소리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를 보며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바람이 차갑고, 하얀 눈이 눈부셨다. 이곳의 겨울은 매섭다. 차도를 피해 마을길을 따라 공원으로 향했다. 눈이 깊어 발이 푹푹 빠졌다. 주말이라 제설 작업이 덜 되어 있었지만,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낯선 도시에서 타인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는 게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한참을 혼자 걷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아저씨와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 아저씨가 먼저 웃으며 "굿모닝!" 인사했고, 나도 웃으며 "굿모닝!"으로 답했다. 순간 '그냥 안녕하세요?' 할 걸, 그랬다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궁금해하셨을 텐데, 하는 생각에 혼자 웃음이 났다. 소심한 이방인의 작은 고민이다.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은 늘 낯설다.
아침은 사과와 야채샐러드, 달걀 프라이와 빵으로 간단하게 먹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식사 시간은 길다. 둘이서 먹는데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이를 통해 젊은 세대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즐겁다. 요즘 MZ세대의 운동과 음악 취향, 연애와 결혼관까지, 미처 몰랐던 아이의 세계를 조금씩 들여다보는 중이다. ‘타인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는 것’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오후에는 아이의 작업에 필요한 잡지를 사러 인디고 서점에 갔다. 이곳의 주말 서점은 가족과 친구들로 북적였다. 아이가 책을 고르는 동안 좋아하는 요리책 코너를 둘러보았다. 영어로 된 요리법을 읽기는 어려웠지만, 선명한 재료의 색감과 완성된 요리의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늘은 한강 작가의 책이 어디에 있는지 컴퓨터로 위치를 검색해 찾아보았다. 재고가 없었다. 이곳에서 한강 작가의 책을 본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는 마음이 들며 아쉬웠다. 아이에게 필요한 잡지책도 구하지 못했고, 한강 작가의 책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에 다시 오자고 했다.
오랜만에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빛을 보며 걷는 길이 포근할 줄 알았지만,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집에 들어오자 얼었던 몸이 따뜻하게 녹으며 나른해졌다. 저녁으로 매콤한 떡볶이를 먹고 하루를 정리하려 했지만, 쏟아지는 졸음에 마무리가 쉽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소하면서도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