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5
태어날 때부터 물고기는 물속이 있었다. 한 번도 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물고기는 자신이 자유가 뭔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고기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물고기는 수면 위의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고기는 그 뭔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그저 물의 바깥이라거나 물이 아닌 것이라고 부를 뿐이다. 아는 것이라고는 물뿐이라 그런 이름밖에는 붙일 수 없다. 그래서 거기 분명 뭔가가 있는데도 물고기는 수면까지 가서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물의 바깥, 물이 아닌 것은 물고기에게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물의 바깥에서 물고기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는 그 이름이 하늘이라는 것을 안다. 물고기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렇게 우리는 물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또 다른 뭔가는 그런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생 자기의 생각 안에서만 헤엄 치다가 그 생각 안에서 죽을 우리를, 그리고 그 생각 안에서 다시 태어날 우리를.
『음악소설집』, 김연수 <수면 위로>
최근에 읽은 책에서 본 문장이었다. "문장 속 물고기처럼, 나도 아는 것이라고는 물뿐이다." 수면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결국 물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물고기처럼, 나도 관계라는 깊은 물속에서 늘 안전한 곳만을 찾아 헤엄쳐 온 건 아닐까.
몇 달 전, 오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를 보면 새장에 갇힌 새 같아. 문이 열려 있어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 말이야." 그 친구는 내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말 나는 관계 속에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걸까. 안전한 새장 속에만 머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침을 맞았다.
창밖은 환했지만, 오늘은 아이도 아침 운동을 나가지 않았다. 부엌에 나가보니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아침을 건너뛰고 빈속의 공허함을 안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며칠째 남편과의 불화가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더는 방 안에만 머물고 싶지 않았다.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걸음을 떼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걷다 보니 깨달았다. 나를 옥죄는 것은 관계의 어려움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마주하지 못하는 내 두려움이었다. 한 시간 동안 걸으며 마음속에서 일렁이던 불안과 두려움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관계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다만 지금, 내게 찾아왔을 뿐.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의 이 한 걸음 한 걸음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작이 되기를 바라며 발을 옮겼다. 손끝이 시릴 만큼 추운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데 전화가 걸려왔다."장 보러 갈 일 있으면 오늘 함께 가요."텅 빈 냉장고가 떠올랐다. 잠시 망설였지만, 기꺼이 그 친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쳤다. 하늘은 깊고 맑은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날이 비교적 포근해서인지 굳어 있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장을 보며 생각했다.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들은 늘 익숙한 것들이었다. 변화는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사람도, 관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익숙한 것을 고르고, 낯선 것을 피하며 변화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라도 작은 변화라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새로운 재료를 하나 집어 들었다.
장을 보고 난 후, 핫도그와 음료를 마시며 많은 사람들 틈에서 시간을 보냈다. 문득 마음속에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깊은 감사가 밀려왔다. 힘든 시기에도 관계 속에서 따뜻한 손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빈속으로 시작한 하루였지만, 따뜻한 걸음과 친절로 채워졌다. 오늘도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