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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당신이 못 본 것에 대하여, 당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 내가 못 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 세계 밖에 있는 상대의 언어를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타인의 경험과 관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세계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그 경계를 넘어선 곳,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관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즉각적인 이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조금씩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것이 가능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마음이 필요할까?
시간이 많아져서인지, 아니면 생각이 많아진 환경이 주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캐나다에서의 세 달 살기는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이국적인 경험을 하는 바쁜 나날을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와서 지내다 보니 환경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느긋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는 우리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고, 나 또한 같은 일상의 반복이 지루하거나 심심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는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해 그동안 하고 싶었던 작업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지금의 환경이 좋다고 했다.
이번 주는 흐린 날씨에 눈 소식이 있어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계획했던 ‘던다스 밸리’ 방문도 취소했다. 토요일에 있을 모임도 눈이 많이 내리면 취소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바람과 눈이 많은 것들을 결정짓는다. 그럼에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우리는 소소한 일상을 살아간다.
아침부터 아이가 스쿼트와 플랭크를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어제보다 열 개를 더 추가하고, 플랭크 시간도 늘리라고 말이다. 미적거리는 나를 보며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해야 해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맨몸운동을 마친 후 늘 그렇듯 걷기를 하러 나갔다, 미리 적당히 운동을 해서인지 몸에 열이나 덜 추웠지만,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이왕 나온 김에 제대로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눈을 치우는 덤프트럭만 도로에서 분주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이가 아침을 차려놓았다. 사과, 바나나, 로메인, 식빵과 딸기잼. 갈수록 단출해지는 식탁을 보며 ‘먹는 것이 곧 자신’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지금 내 몸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음식들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균형 잡힌 식단을 신경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 좋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흐른다. 오늘은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와 해결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떤 문제이든 간에 이미 문제는 벌어졌잖아요. 그러면 해결만 남았으니까, 그럴 땐 생각을 짧게 하고 바로 행동해야 해요.” 아이의 말에 힘이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저 나이에 저렇게 단순하고 명확하게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니. 나는 여전히 복잡하게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말이다.
여행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우리의 일상을 보며, 문득 영화 퍼펙트 데이즈와 패터슨이 떠올랐다. 두 영화는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 패터슨의 주인공은 버스 운전사로서 하루하루 같은 패턴을 따르지만, 시를 쓰며 일상의 순간을 기록한다. 반면,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라는 단순한 일을 하면서도 음악과 자연 속에서 만족을 찾는다. 두 사람 모두 거창한 꿈을 좇기보다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예술적 감각과 평온함을 찾는다.
패터슨이 언어를 통해 삶을 표현한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행동과 분위기로 삶을 보여준다. 두 영화는 소소한 행복과 반복 속에서도 평범한 삶이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내면의 평온과 조화를 통해 어떻게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주인공은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쌓아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벽한 날’을 만들어갔다.
아마 이곳에서의 단순한 생활로 이 두 영화를 떠올렸던 것 같다. 평범한 반복 속에서도 스스로 만족하고 충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일상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우리의 일상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조용히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오후에 산책을 나가려는데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눈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그래도 이런 날씨를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한번 나가볼까 싶어 꽁꽁 싸매고 나섰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도로에서는 제설 차량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이들 하교 시간인데 은근히 걱정되었다.
나는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매일 어딘가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루를 스스로 정해놓은 일정대로 살아가며, 때로는 분주하고 때로는 느긋한 일상을 보낸다.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순간들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하루는 채워진다. 그리고 이렇게 쓴 글이 그 흔적을 남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