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
아침에 창밖을 보니 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가끔 제설차량의 웅웅 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평소 이 시간에 지나던 노란 스쿨버스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 달리기를 나갔던 아이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길이 없어서 달릴 수가 없어요."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층에서 내려와 보니 차고 앞의 눈이 대강 치워져 있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엉성한 흔적이 보였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무거워서 치우기 어려웠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함께 남은 눈을 치우기로 했다.
운동과 식사를 마친 뒤 창밖을 바라보는데,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길 제설작업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궁금해져 현관문을 열고 나가 보니, 옆집 아저씨께서 가정용 제설기계로 우리 차고 앞 눈을 치우고 계셨다. 빵모자를 눌러쓰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눈을 치우는 그의 뒷모습이 마치 겨울의 산타클로스 같았다.
서둘러 나가 인사를 드리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셨다. 그러고는 우리 집 앞뿐만 아니라 옆집 차고 앞까지 계속해서 눈을 치우기 시작하셨다. 그 모습을 본 앞집 아저씨도 눈을 치우던 삽을 들고 아직 손길이 닿지 않은 다른 집 차고 앞으로 향했다. 마치 친절이 겨울바람을 타고 전염되는 것만 같았다.
해밀턴에 처음 왔을 때가 떠올랐다. 낯선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이웃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친절이 하나둘 쌓이며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낯선 곳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환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눈을 치웠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 옆에 있던 눈이 다시 날아와 쌓였다.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이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릴 때, 하얀 눈과 매서운 바람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나눈 따뜻한 정이 함께 기억될 테니까.
날은 추웠지만, 집안에만 있기에는 갑갑했다. 제설작업이 되지 않아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공원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떠올리며 옷을 든든하게 입고 산책을 나섰다."이 추위에 어딜 나가세요?"아이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걸어야만 했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 깊숙이 새로운 산소를 공급해 주는 시원함을 느끼고 싶었다. 가끔은 이런 추운 날씨가 내 마음을 더 선명하게 해 주기도 한다.
몸이 날아갈 듯한 강한 바람을 마주 안고 걷기가 어려웠다. 나무들도 휘청였고, 마른 가지들이 부딪히며 겨울 특유의 소리를 냈다. 바람은 이리저리 흩어지며 나를 스쳐 갔다. 피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좋을까? 예전에는 거센 바람을 피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 바람을 마주하며 그 흐름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시련도 그렇지 않을까?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게 부는 바람을 담대히 마주하고 있는 걸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하고 생각하곤 했다. 바람은 머물지 않고 지나가니까. 그렇게 바람에게 말을 거는 시간이 좋다. 바람이 때로는 매섭게, 때로는 부드럽게 불어오듯이, 삶도 그렇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순간들이 있다.
인생은 바람 부는 날의 연속이었다. 늘 바람이 불어왔다. 때로는 소곤소곤 속삭이는 봄바람이었다가, 때로는 나를 집어삼킬 듯 흔들어대는 겨울 태풍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아파하기도, 위로받기도 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바람은 지나가니까!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간의 무게감 앞에서 속절없지만, 오늘 경험한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이 내일을 살아갈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피어나는 온기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 언젠가 이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때, 나는 하얀 눈과 매서운 바람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눈 따뜻한 마음들을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옆집 아저씨께서 제설기계로 눈을 치워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