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3개여도 좋은 날, 그리고 심보선
1. 오전 회의
마감을 앞두고 계속 이슈가 터져 나오고 있다. 4월 30일에 마감하고 프리징해야 겨우 오픈 일정을 맞출 텐데, 이러다가는 한참 늦추게 생겼다.
원래 오늘은 점심 이후 회의가 딱 하나였는데, 결국 3개나 하고도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하나는 디자인팀 리더인 S의 메신저로 시작.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마감 앞두고 ‘긴히’ 할 얘기는 더 없어야 하는데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니, 인터랙션 구현을 퍼블리셔가 하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아무래도 프런트개발자가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이 정도는 오픈에 지장 줄 정도는 아니다. 바로 개발팀에 프런트 개발자 요청하고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그 개발자가 내일부터 5월 1일까지 휴가이고, 오후엔 회의가 있어서 ‘지금’ 회의를 해야 한단다.
졌다 졌어. 바로 하자! 디자이너 기획자, 나까지 모두 모여 이 작업의 배경과 중요성을 설명해 주고, 마감일도 조금 당겨서 잡아냈다! 잘 부탁드려요~
2. 즐거운 점심시간
입사한 지 20년 된 여자 셋이 모여서 점심 먹기로 한 날.
사실 오전에 바쁘고, 속이 안 좋아서, 친구 부장 승진 턱이라고 맛집 의견 내라는데 적극 의견을 내지 못했다. (사실은 나, 쉬고 싶었어 ㅠ 그래도 너희니까 외식도 나가고 꽉 차게 수다도 떨었단다.)
아이 둘 키우며 큰 회사에서 부장 정도까지 승진했으면 회사 안에서는 다 이룬 거 아니겠니 ^^
한번도 한번에 진급한 적이 없다고 겸손히 말하는 승진자 친구에게 고생했다고, 진심어린 축하의 마음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고 진급하지 못한 친구나 나나 뒤쳐졌다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이 둘씩 키우면서 20년씩이나 회사를 다니고 있는 우리들은, 어느 좌표에 있건 애쓰며 살고 있다.
요즘은, 이렇게 회사에서도 옛 친구들 가끔 만나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귀하고 감사하다.
3. 오후 회의
1시. 신입 디자이너들에게 QA 봐달라고 따로 요청을 하고 작업물을 확인해 보는 시간. 신입의 재기 발랄함과 패기. 에너지를 듬뿍 받을 수 있어 감사했던 시간. 뒤이어 3시 반에 있는 회의에도 아이디어 내줄 수 있냐고 슬쩍 얘기했는데, 약 40분~50분 동안 레퍼런스도 찾고, 피그마로 디자인 정리까지 해온다.
뒤이은 회의는 LNB 이슈에 대한 집단 지성이 필요한 회의. 애초 고민하고 내놓은 LNB가 실제 화면으로 보니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브레드크럼을 표출하기 보다는 다른 대안을 선택하기로 결론.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개선된 결론이다. 여기까지만 해야 오픈을 할 수 있다. 아쉬워도 여기서 멈추자!
4. 빵 배달부로서의 엄마 역할 수행
늦은 오후에는 아들들이 번갈아 저녁 시켜달라는 전화를 한다. 고3 녀석은 가끔 퇴근할 때 빵을 사달라고 하는데, 오늘도 빵이 먹고 싶은지 몇 개 사달란다. 10시까지 하는 곳 두 군데를 추려 맛있어 보이는 빵을 심혈을 기울여 고른다. 큰 애가 나에게 가장 만족하는 순간이 바로 빵 사갈 때인 것 같다. ㅋㅋ 엄마는 늘 온 정성을 다해 고르거든. 단 것, 짠 것, 지난번에 반응 좋았던 것, 신제품 등을 골고루 안배하면서. 고객 만족도를 최상으로 높이기 위한 노력이 있다는 것을 십대 후반의 내 유일한 고객분은 아실는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즐거운 노동을 기쁘게 하고 싶다. (이러려고 회사 다니는 거잖아요?) 오늘의 엄마 역할 끄-읕!
5. 어제 주문한 도서, 심보선의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가 도착해 있다. 내 퇴근을 기다린 것 마냥.
서문을 대신하여
“멋지게 살려 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나에게는 새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
알려해도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마음을 그칠 수 없는 화두들이다. 이 화두들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 나는 여전히 기적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멋있는 글을 읽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근사한 퇴근 후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