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미술관- 그의 삶을 따라가는 한 시간의 여정
고흐의 꿈은 조용하게 작업에 몰두할 수 있고 찾아오는 친구들을 편안하게 맞을 수 있는 집을 갖는 것이었다. 바람대로, 그는 1888년 5월 아를의 라마르틴 2가에 위치한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노란 집이다. 고흐는 의자, 정물, 그림 등의 작은 소품들을 채워 이 집을 스튜디오로 꾸몄다. 그리고, 평화로운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 기쁜 마음에 이 스튜디오에서 ‘노란 집’을 그리기 시작했다.
양지바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석회를 바른 이 집의 벽은 노랗게 물들었고, 이 노랑과 대비를 이루는 봄날의 짙푸른 하늘, 왼쪽으로 초록색과 핑크 빛의 셔터문,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고흐가 매일 식사를 하러 들렀던 곳이다. 고흐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나자, 파리에서 만난 화가 친구들과 이곳에서 함께 사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누구와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던 그였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남들보다 더 외로움을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까. 조셉 롤랭이 없었으면 고흐는 아를에서 지냈던 날들이 파리에서처럼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고흐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 아를의 집배원이었던 이 친구는 그림 속에 보이는 기찻길 근처의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노란 집>,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2 x 91.5 cm, 반 고흐 미술관
누군가 노란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크지는 않았지만 온 집안을 울리기엔 충분한 소리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 중이던 고흐는 방문객을 확인하러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고흐는 빗장을 풀어 대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생기 넘치는 눈빛, 두 갈래로 기른 무성한 턱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오는 길에 살짝 술 한잔을 걸친 듯, 수염 위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고흐는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늦은 저녁 노란 집을 방문한 이 남자의 이름은 조셉 롤랭, 아를 역의 우체국 직원이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자주 우체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조셉은 그때마다 고흐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진지하게 대해주었다. 조셉이 고흐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셉이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작은 소년을 고흐에게 소개하였다. 소년은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 앞에서 수줍게 낯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고흐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다정하게 소년과 인사를 나눴다. 낯을 가리는 카미유를 바라보며 고흐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나중에 아들을 갖게 되면 이런 마음이 들게 될까 잠시 궁금해졌다.
카미유는 고흐의 작업실 의자에 앉아 아저씨의 말대로 조용히 자세를 취해 주었다. 자신을 보면서 누군가가 열심히 스케치를 하는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다. 소년은 저 캔버스에 자기 얼굴이 어떻게 그려질까 궁금할 때마다 아빠를 부르곤 했다. 부드럽고 활달한 이 소년의 얼굴은 작업실을 밝히는 가스등에 의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그렇게 조셉의 가족들도 하나둘씩 고흐와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까미유 롤랭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오일, 40.5 x 32.5 cm, 반 고흐 미술관
<조셉 롤랭의 초상> <롤랭 부인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62 x 53.5 cm, 92 x 72.5 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파리 시절 화가 고갱은 고흐에겐 절대적 동경의 대상이었다. 고갱은 증권회사에 다닌 이력도 있던 인텔리 출신이며 항상 자신만만하고 리더십도 좋아 젊은 후배 화가들이 따르던 정열적인 인물이었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고갱의 모습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결국 이런 너무도 다른 둘의 모습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노란 집에서 공동 거주를 하며 서로의 미술에 영향을 끼쳐가며 공동 작업을 진행했고, 때로는 서로에게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신경과민으로 신경질적인 발작이나 과격한 행동을 보이던 고흐의 모습에 고갱의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급기야 어느 날 자신에게 나이프를 휘두르던 고흐에게 공포마저 느껴 급히 아를을 떠나게 된다.
고흐는 고갱과 끝까지 좋은 친구가 되길 원했지만, 그러기엔 고흐는 너무 순수, 아니 순진했고, 고갱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고흐는 상실감에 고갱이 떠난 빈자리를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갱의 의자에는 고흐가 못다 한 말, 표현하지 못한 감정, 원망의 마음이 섞여 칠해졌고, 그 위로 고갱을 대신하는 촛불 하나가 놓였다. 자신을 어둠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친구를 대신하는.
<고갱의 의자>,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90.5 x 72.5 cm, 반 고흐 미술관
고흐에게 공포를 느껴 줄행랑을 쳤던 고갱은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뒤늦은 사과를 전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미처 챙기지 못한 노란 집에 두고 온 자신의 짐들을 부쳐줄 것을 요청한다.
고갱이 탐내던 고흐의 그림은 바로 이 해바라기였다. 고흐에게 오랫동안 영감을 주던 꽃. 참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시작은 고갱이 지내게 될 방을 장식하기 위해서였습다. 파리 어느 레스토랑에 아름답게 장식된 커다란 해바라기를 기억하며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부지런히 그렸다. 꽃은 빨리 시들기 때문에 단번에 전체를 그려냈다. 완성되었을 때 보게 될 파란색과 노란색의 심포니를 상상하면서.
고갱과의 빚었던 갈등의 앙금 때문인지, 고흐는 고갱의 방에 걸려있던 해바라기를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대신, 그 그림을 선택한 고갱의 안목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그 해바라기와 똑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여름 작렬하던 태양을 닮아 온통 노랗고 노란 이 그림을. 아를에 도착한 이후 줄곧 그를 사로잡았던 옐로우가 이 그림에서 폭발했다. 꾹꾹 눌러 칠해진 배경은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고, 겹겹이 쌓은 황갈색의 물감은 거친 꽃의 질감 그대로였다.
그의 인생이 이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빛났으면 좋았으렸만, 이후 발작과 환각증세에 시달리며 고흐의 불꽃은 조금씩 사그라져만 갔다. 유난히 추웠던 1889년 1월 겨울이었다.
* 조셉 룰랭과의 대화는 상상력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