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집에 들어선다. 달려오는 딸아이와 엉금엉금 기고 있는 아들내미의 웃음 위로 갓 지음 밥 냄새,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는 소리가 날 반겨준다. 하루의 피로가 달아난다. 종일 아이 보느라 피곤했을 아내도 남편이 반가운지 웃으며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퇴근 후 아내가 해준 저녁을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 평범하기만 한 이 하루의 작은 일상이 그저 과거의 한 장면이 된지도 7개월째로 접어든다.
미국에 온 뒤로 가끔씩 팀원들과 밖에서 저녁을 하거나 약속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곤 했다. 한국에 비해 외식비가 비싼 이유도 있지만, '가족과 저녁을 집에서 함께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외국인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문화를 따르게 된 것이다.
퇴근 후 저녁을 가족과 함께 할 때면 작은 행복감이 밀려온다. 그리 거창하지 않지만 아내가 차려준 밥상에는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렸던 마음이 담겨있다. '이 밥 먹고 힘내서 저녁 육아에 힘쓰세요.'라는 자못 부담스러운 정성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밥그릇 위로 본격적인 수다가 넘나들기 시작한다. 아내는 둘째에게 이유식을 떠 먹이면서도 낮에 만난 동네 아줌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나는 간간히 회사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맞장구는 필수적인 추임새.
어른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세 살배기 첫째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듭니다. "아빠, 그게 아니지이~" 아내와 난 화들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니, 이 아이가 벌써 우리 대화를 알아들어?" 식탁 위에 한 송이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어렴풋 그림 한 장이 떠오른다. 반 고흐 미술관에서 본 <감자 먹는 사람들>이 말이다.
어두운 방안, 작은 등불 아래 모인 일가족이 수고로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끼니를 때우려 감자를 쪄먹는 모습이 참으로 특별하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이들의 표정에서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하던 아빠의 모습,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많이 들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엄마의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의 어린 시절이 아니던가.
아빠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 일터에서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했고, 아이들은 하루 종일 아빠를 기다리느라 배를 곯았다. 비록 찬거리는 변변찮았지만 엄마는 가족들을 위해 서둘러 맛있는 밥을 지어 내곤 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팍팍했지만 돌아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방한 켠 밥상머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허기를 달래던 가족이 있었기에. 잘 살고 있기보다 삶을 힘겹게 살아내야 할 지모르는 그림 속의 이 가족들도 그래서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것이 내가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발걸음을 쉬이 떨쳐내지 못했던 이유였다.
코비드가 창궐한 후, 근무형태가 전면 재택으로 바뀌면서 아이들과 아내는 내 퇴근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언제든 방문을 열면 아빠를 볼 수 있고, 낮에도 "놀아줘 놀아줘"를 연신 부르짖으며 아빠를 찾는다. "아빠 일하는 중이에요"하고 아이를 달래 되돌려 보내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가 아침, 점심까지로 이어졌다. 덕분에 세끼 식사를 오롯이 준비해야 하는 엄마의 수고로움이 그만큼 커졌다. 집집마다 엄마들의 아우성, 비명소리가 수시로 들려온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내가 우리 집의 식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도 못 가기에 24시간 아내를 시달리게 했고, 아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갔다. 나는 잠재적 위험요소를 하나라도 제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요리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던 제가 레시피를 뒤져 하나둘씩 음식을 차려냈다. 반신반의하던 가족들도 아빠표 요리의 진미(眞味)에 하나둘씩 엄지척을 든다. 식탁에서 딸내미가 소리친다. "아빠 요리사 같아!" 난 그저 레시피를 충실히 따랐을 뿐인데. 그렇다. 세상에는 이미 좋은 레시피가 넘쳐나고 있었다. 찾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가족과 저녁을 함께하는 데에는 유익한 점이 참 많다고 한다. 특히, 아이에게 주는 영향은 무척 크다고 한다. 골고른 영양 공급, 정서적인 안정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간에 사랑이 오고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저녁을 함께한다는 것, 내가 준비한 저녁을 함께 한다는 것이 우리 가족의 일상에 작은 물결을 일어내고 있다. 그것이 우리 가족이 코비드 시기를 살아내는 소심한 방법이 되어간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