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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없는 전화번호

by 약산진달래

시골집에 내려가면 전화기가 놓여있는 작은 상자가 있다. 꿀단지가 들어있던 상자인데 그 상자가 고급 져서 인지 엄마는 꿀단지를 다 먹고 상자는 전화기를 놓는 받침대로 사용을 했다. 전화기 옆에는 전화번호 책이 한 권 놓였다. 전화번호 책에는 섬마을 면 모든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집 전화번호만 기록되어 있는데 핸드폰을 갖게 되면서부터 핸드폰 번호까지 기록되어 있는 소중한 연락책이다. 늘 그 전화번호 책을 보고 전화를 걸었고 전화번호를 모를 경우 집으로 전화를 해서 전화번호를 책을 보고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전화번호 책 앞장과 뒷장의 빈 종이에는 자식들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있다. 자식들에게 택배를 보내거나 하실 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는 전화번호 책자이다. 전화번호 책자는 몇 해에 한 번씩 면에서 만들어 보급하는 것 같은데,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도 적어서 다시 만들어 지곤 하는 것이 신기하다. 아직 살아계신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다.


시골집에 전화기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화기의 전화번호 버튼 숫자는 가장 큰 글씨로 되어 있는 것 사다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시골집 전화기는 전화번호를 숫자 버튼이 아주 크게 적혀있는 것이 놓여있다. 쇼핑을 하다 숫자 버튼이 큰 전화기를 판매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구입을 해서 시골집에 보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보니 시골집 장롱 위에는 여러 대의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엄마는 숫자를 다 익히지 못했고 모든 문자와 관련된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숫자와 문자를 알지 못해도 불편한 일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가 아프시기 시작하면서 엄마에게는 문제가 문자와 숫자를 익혀야 하는 일이 생겼고 문자는 시골을 나서지 않는 이상 쓸 일이 없었지만 숫자는 전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숫자를 외우려고 애를 쓰셨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으셨던 것 같다. 숫자를 외우시는 것보다 숫자가 쓰여있는 버튼 자리를 외워서 번호를 누르셨기 때문이다. 단축다이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시골집에 내려갔을 때 다이얼 단축 번호를 만들어 드렸다.

"아이고 이제는 전화하기 쉽겠다. 우리 딸이 똑똑해야 ~"

그 뒤로는 1-9번까지 자리를 외워서 단 출번만 누르게 되니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 때 전화기의 숫자에 대한 두려움은 해결이 된 것 같았다.


핸드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노인정에 가면 할머니들이 한 분씩 핸드폰을 들고 오시는 것을 보고

"아야 누구도 핸드폰을 들고 다녀야"

"아야 그 집 아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야"

"아야 나도 핸드폰 하나 있으면 좋겄다."

결국 엄마도 핸드폰을 갖게 되었다.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핸드폰은 전화를 거는 목적보다 노인정에서 자식들이 사주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용도였다.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핸드폰이 최신형으로 바뀌어가며 엄마의 핸드폰도 최신형으로 바꾸어 갔다. 핸드폰 전화기의 숫자 버튼은 더 작은데도 불구하고 다행히 단축 버튼을 설정해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쓰러지신 이후 핸드폰은 엄마의 옆을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더 최신형으로 핸드폰이 바뀌었다.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엄마의 새 핸드폰은 오빠가 이중 폰으로 사용하다가 그것도 필요 없게 되자 해제를 하였다. 그리고 핸드폰만 엄마 곁을 지키고 있다.


엄마가 시골집을 떠나고 1년이 지나며 시골집의 전화번호도 해제를 하였다. 시골집 전화번호와 엄마의 전화번호는 뒷자리가 같은 번호이다. 시골집의 전화번호는 나에게 각인된 전화번호다. 핸드폰이 보편화되며 더 이상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되었는데 단 하나 외우고 있는 번화가 있다면 바로 시골집 전화번호이다.


지금도 시골집에 내려가면 전화기는 꿀단지였던 작은 전화기 받침대 위에 단정하게 놓여있다. "내 버튼을 좀 눌러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아주 큰 버튼을 가진 전화기이다. 꿀단지였던 전화기 받침대 안에는 몇 년 전에 발급된 전화번호 책이 가보처럼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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