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첫 만남과 마지막 인연
우리 일행은 천진항에 도착했다.
모두 12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었다.
의사, 간호사, 약사, 선생님들.
그리고 나와 두 명의 자매는 북경에 세워질 유아원의 교사로 중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밤.
북경에서 한 선생님이 차를 렌트해 천진항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다.
12인승 정도 되는 봉고차였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기사가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잇몸이 드러났고, 그 아래로 까만 치아가 보였다.
그렇게,
우리 일행을 실은 봉고차는 검은 도로를 달려 북경으로 향했다.
내가 중국에서 처음 만난 중국인이 바로 우리 일행을 태우러 온 봉고 기사였다.
그의 이름은 리센셩.
그 후, 그는 내가 근무하던 한국 유아원의 전속 기사가 되었다.
여름이면 중국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며 생계를 이어갔다.
나는 가끔 그의 차를 타고,
천안문, 만리장성, 이화원으로 여행객들의 관광 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리센셩은 내게 털어놓았다.
"나는 부인 말고도 애인이 하나 더 있어."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
그때 나는 중국에서 IMF 이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 돈 1만 원이면 인민폐의 두 배가 넘는 가치였고,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중국에서 받는 보수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한 달 수입이 300위안 정도라면,
한국 사람과 일하면 600위안, 700위안까지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머문 4년 동안,
리센셩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이 좋았고, 아부를 잘했으며,
무엇보다 돈을 좋아했다.
나는 그의 차를 여러 번 탔고,
그와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4년이 지난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비행장을 향하는 길.
그날, 내 마지막 중국 여행의 기사가 된 사람이 바로 리센셩이었다.
처음 중국 땅을 밟았을 때,
나를 처음 맞이했던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중국을 떠나는 순간,
나를 비행장까지 데려다준 사람.
그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중국인이자,
마지막으로 배웅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 만난 사람,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람.
이 인연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