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3_병

by 슈슈

‘뇌전증’ 참 고약한 병이다. 이 병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 힘들었다.


쓰러지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 않았고 아직까지 나조차도 내가 쓰러지는 상황에 대해 듣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쓰러지고 난 후 주변사람들을 다시 만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친구들이 119 신고를 하고 병원에 싣려 가게 되었는데 회복된 후 다시 만났을 때 친구들은 해프닝 그 이상의 무엇을 겪은 표정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트라우마틱한 경험을 준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다.


'뇌전증'은 나에게 단기기억상실을 가져온다. 쓰러지고 나면 일주일 정도의 기억이 날아가버렸다. 마치 컴퓨터에서 선택적으로 폴더를 지워버린 것 같이 더 오래전 기억은 나지만 일주일 전 기억과 쓰러진 후 일주일 정도 기억들이 잘 저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없이 가족들에게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보며 기억력을 회복시키려 노력하는 '회복 루틴'을 만들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시험기간 때 쓰러지기라도 하면 진짜 시험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시험기간에 쓰러진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하루는 엄마 차를 타고 등교를 하고 있었다. 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지루했고 가고 싶지 않아 창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는 엄마가 목이 잠긴 목소리로 '이제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라고 하셨다. 잠이 덜 깨서인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차 안에 시계를 보고 내가 발작을 했다는 것에 확신을 하게 되었다. 내가 쓰러진 것인지 묻는 말에 엄마를 대답을 피했고 내가 아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며 감추는 법을 찾게 된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행복한 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치료의 시작은 나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부터였다. 나의 약점, 다름을 인정하면서 이런 '나'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02_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