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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 Nov 15. 2023

나도 블라인드에 가입하고 싶다.

하지만 무직인걸요

 소속이 없음을 느낀 게 언제일까. 재수생 시절 독서실에 앉아 멍하게 난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난 무소속이구나.'를 온몸으로 느꼈다. 야자 도망간다고 야단치는 사람도, 지각한다고 서둘러야 한다는 압박도 없어진 그 자유로움 속에서 해방감도 느꼈지만 내가 사라진다고 한들 그 무슨 의미이며 이 우주 속에 나는 먼지 같은 존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그렇게나 했던 것 같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이 대학교 과잠을 입고 축제를 즐기는 사진들을 싸이월드에서 보며 나도 소속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느꼈더랬지. 


 그리고 10년 후 또 무소속이 되었다. 저는 하고 싶은 학업을 하고 싶습니다. 라며 당차게 군생활을 정리하고 나온 뒤 이래저래 차일피일 사회적 소속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무소속이다. 참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일상 속에서 주춤하게 되는 순간들이 참 많다. 토익 답안지조차 직업을 체크하는 란이 있으며 매번 내 직업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또 기존에 쓰던 신용카드를 재 신청하면서 절차가 더욱 복잡해지더라.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전환되고 남편 이름 아래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나의 사회적 이름을 잃었나?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특히나 직업란을 체크할 때에는 항상 어디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학생인가? 그런데 다니는 학교가 없는걸요.

 주부인가? 주부라기엔 그게 저를 전부 하는 직업은 아닌 것 같은 걸요.

 그렇다면 수험생인가? 그런 직업은 없습니다.

 무직인가? 그렇기엔 저 하루종일 애 보랴, 집안일하랴, 틈나는 대로 공부하랴 이렇게 바쁠 수 없는걸요. 저 없으면 저희 집 큰일 납니다. 

 군인인가? 그것은 과거의 나의 직업이었지 현재는 아닙니다. 


 이런 무소속의 나에게 아이를 낳고 00 엄마, 00 맘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내가 이렇게 아줌마가 되는 것인가 간지럽기 그지없던 이 호칭이 사실 요새는 제일 편하다. 아이의 연령과 개월수가 비슷한 부모끼리 육아로 대동단결하고, 친분을 나누는 새로운 사회 덕분에 흔들리던 나의 자아와 정체성을 다시금 든든하게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꽤나 좋은 방패막이로도 되는데 직업 특성상 남편과 나의 동료들이 주위에 많은데 전역하고 요새 뭐 하니라고 근황을 묻는 자들에게 이래저래 설명하는 것 대신 아기 키우느라 바빠요.라고 답변하는 기술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기 엄마 사회에서도 휴직 중이신가요? 아니요. 그럼 아가 낳고 그만두셨나요? 아니요. 이래저래 또 복잡하게 설명하는 순간들이 오긴 하지만 뭐 나름 괜찮은 정체성이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하면 뭐 하나. 요새 사람들이 그렇게 수다 떤다는 블라인드에는 인증을 할 수 조차 없으며, 브런치 자기소개조차 그 무엇 하나 맞는 게 없어 직업을 선택하는데 2년이 걸렸다. 물론 지금도 에세이스트라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택해 놓고 소개한 것이 우습기는 하다. 마치 미숫가루를 MSGR로 그럴듯하게 써놓은 카페의 메뉴판을 보는 느낌이다. 만약 나는 솔로에 나간다면 자기소개 시간에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를 오늘도 쓸데없이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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