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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한 오후 Oct 18. 2023

그녀의 부고장

<다고큐(多古久)>  1904년 문을 연 유시마의 오뎅집

마흔을 채 살지 못 하고 하늘나라로 가다

W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일본을 떠난 지 9개월 정도 되던 때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란 것은 그녀의 남자친구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술에 취한 채 핸들을 잡았던 것이다. 마흔이 채 되기 전에 스러진 생명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문득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너무 자주 본 탓일까.


W랑 나랑은 남녀 관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통해 알게 된 관계도 아니었다. 나랑 친분이 있었던 사람의 여자친구였을 뿐이다.


물론 단순히 아는 사람으로만 지칭한다면 떠난 그녀가 몹시도 슬퍼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의 남자친구에도 털어 놓지 못하는 얘기를 아주 가끔 나한테 털어놨으니까.     


그녀의 남자친구를 알게 된 건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친목 모임을 통해서였다. 나보다 몇 살이나 위였지만 고향이 비슷했고 정치 성향까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쉽게 형, 동생하면서 자주 만나는 관계가 됐다. 나랑 똑 같은 주재원으로 파견 와 있던 처지라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 것이다. 이혼한 전력이 있는 그는 가족 없이 혼자 와 있었다.  


지인의 여자친구였던 그녀

1년이 조금 안 됐을 때였다. 롯폰기 근처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축하한다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축하할 일이긴 한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만났는지, 나이는 몇 살 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혼 후 충격이 컸는지 평생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그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홀아비나 다름없는 그를 우리 집에 초대해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나눴던 적도 몇 번 있는 터였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와 같이 만나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 저녁, 유시마 오뎅집으로 가다

11월 찬바람이 불던 저녁 우에노(上野) 근처인 유시마(湯島)의 오뎅집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건 그렇고 이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식당이 왜 오뎅집일까. 그리고 동네도 번화한 곳이 아니라 변두리에 가까운 유시마라니.


많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뭐 찬바람이 부는 저녁에는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뜨끈한 오뎅이 생각나기 마련이니까. 일단 들어가 보자.     


그녀와 같이 갔던 유일한 식당인 다고큐. 입구가 더 쓸쓸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100년 오뎅집

입구부터 유서 깊은 노포라는 게 느껴졌다. 위치도 아는 사람만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다. 문을 열어보니 상상하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른 쪽에는 길게 다찌가 있었고 입구 바로 앞에서 기숙사 사감처럼 생긴 주인장이 자기만큼 나이를 먹은 오뎅 솥에 연신 국물을 들이 붓고 있었다.


잠시 오른쪽 벽을 보니 이 집의 역사를 말해주는 빛바랜 사진들이 붙어 있다. 대충 봐도 창업한 지 100년은 훌쩍 넘어 보였다. 왼쪽 바로 앞에는 여자 손님 둘이서 조용히 오뎅을 즐기고 있었고 가장 안쪽 자리에 그와 여자친구가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성큼성큼 그녀 곁으로 걸어 갔다.   


 

입구 바로 왼쪽에 이 집의 상징과도 같은 커다란 오뎅 솥이 있다.

짧은 머리에 기품 있는 여인

예상대로 미인이었다. 30대 후반 정도의 우아한 기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쇼트커트에 얼굴은 유난히 하얘서 실제 나이보다 더 앳되게 보였다. 일본 전통 문양이 그려진 자그마한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가며 얘기하는 그녀를 보면서 한국인일까, 일본인일까 궁금해졌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그는 나에게 그녀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터였다. 얘기를 많이 들었다는 내 말에 그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수줍게 웃던 그녀가 답했다.     


“저도 얘기 많이 들은 걸요.”     


내 얘기는 많이도 했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의 소재가 빈곤해질 때마다 하는 얘기가 자기 주변 사람들 얘기다. 그게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묵직해 보이는데 경쾌하고 기분 좋은 국물

몇 가지 소소한 얘기를 더 나누고 그가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우선 소라살과 참치와 대파의 하얀 부분을 꽂은 꼬치를 시켰다. 이런 식으로 몇 십 개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묘한 맛이다. 국물이 시커멓다. 물어보니 국물은 이틀씩 끓인 육수라고 하는데 재료가 무엇인지는 설명을 하는데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상당히 묵직해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시원하고 경쾌했다.


염도도 높지 않아 조금씩 마셔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가끔 라멘 국물이나 오뎅 국물이 너무 짜서 마시기가 곤란한 경우가 있는데 이 집 오뎅 국물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시커먼 국물이 묵직하고 짜게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뎅(おでん)에 관한 오해와 진실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오뎅집을 갔던 때가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일본어가 많이도 서툴렀다. 메뉴판을 보고 오뎅 종류 중 몇 가지를 시켰는데 무, 곤약, 스지 같은 것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살짝 화가 나서 종업원에게 서툰 일본어로 항의를 했다.     


“왜 오뎅이 안 나옵니까?”     


종업원은 갸우뚱한 눈빛으로 무, 곤약, 스지 등을 가리키며 답했다.     


“이게 오뎅입니다.”     


오뎅에 관한 오해 : 오뎅은 어묵 같은 개별 재료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끓인 음식 모두를 지칭한다. 무우도 오뎅이고 스지도 오뎅이고 두부도 오뎅이 된다.


무언가 종업원이 나를 기만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 주문해서 나온 것들만 부리나케 먹고 계산하고 나와 버렸다.


다시는 그 집을 가지 않겠노라고 뒤 돌아보며 욕하면서. 오뎅집에서 열받은 얘기를 회사 직원에게 했다. 그 직원이 크게 웃었다.     


“오뎅은 요리의 이름이지, 재료의 이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뎅은 우리가 아는 어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묵, 곤약, 두부, 스지, 무 등 다양한 재료를 넣고 끓여 내는 음식을 ‘오뎅’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이 오뎅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추억을 만들었을까.


오뎅에 변별력이 없다고? 이 집은 다르다

그가 유시마의 이 허름한 오뎅집으로 초대한 이유가 다 있었다. 정말 오뎅에 무슨 변별력이 있을까하고 생각했었다. 오뎅이 맛있어봐야 오뎅이지.


그런데 확실히 이 집은 특별했다. 한국 가서도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스칠 때나 딸아이가 말을 안들어서 외로워 질 때도 이 집이 생각나지 싶다. 시커먼 국물 속에 빠진 소랏살이라니. 술이 절로 들어갔다.     


이 오래된 공간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그녀가 크게 다투던 날

그렇게 첫만남 끝이 났다. 그 이후에도 가끔 셋이서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둘이 크게 다퉜다. 내용은 흔한 사랑 싸움이었다. 자신의 감정만큼 비례해서 오지 않는 그녀에게 그는 투정을 부렸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격분한 그가 갑자기 식당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나는 그를 따라 나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혼자 남아 있게 될 그녀가 안쓰러워서 조금은 얘기를 나누다 헤어질 요량이었다.

    

“우리 유치해보이죠?”     


사랑은 다 유치한 거잖아요, 라고 사랑 교과서 어디에나 나올 법한 말을 했다. 그녀도 평소와는 다르게 술이 많이 들어갔는지 유난히 감성적인 언어를 많이도 뱉어 내고 있었다.    


이금희와 박소현의 차이

“전 변덕이 심한 것 같아요. 라디오로 비교하자면, 기본적으로 이금희 같은 모든 걸 다 들어주고 다 감동해주고 다 공감해주는 정서적인 진행자가 좋은 것 같다가도 그게 너무 내 감정 깊숙이 들어오면 부담스러워져요.


그래서 어떨 때는 조금은 맹해 보이고 쿨해 보이고 한 발짝 뒤에 물러 서 있어서 간섭 안 할 것 같은 박소현 같은 진행자가 좋아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금희와 박소현이라면 저녁 6시대 한국 FM의 터줏대감이다. 이금희가 매우 정서적인 공감대형이라면 박소현은 건조하면서도 쿨한 스타일이다.


이금희는 청취자 사연에 같이 울기도 하고 같이 욕하기도 한다. 박소현은 울음도 별로 없을 것 같고 화도 잘 안낼 것 같다. 적잖은 사람들이 공감대형의 이금희를 좋아한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그러려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때로는 이금희의 공감이 감정 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히려 한 발짝 물러난 박소현에게서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구할 때도 있다.


잘해주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가끔 뒷걸음질 친다. 그게 사람이다.     


오래된 오뎅집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포스터.


꾀죄죄한 딱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마저도 정겹다.

우리만의 비밀

우리는 그 후에도 가끔 둘이서만 만난 적이 있다. 그건 그에게도 비밀이었다.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셨으니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없었긴 했다.


그런데도 그가 신경 쓰였는지 둘만 만나게 될 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그렇게 가끔 수다 떠는 친구가 됐다.     


그녀는 무용을 전공했다. 발목의 큰 부상이 오기 전까지는 상당한 유망주였단다. 무용을 접고 다른 일을 전전하던 때였다. 미모가 받쳐주는 그녀에게 내레이터 모델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타인 앞에 서는 걸 꺼려했던 그녀였지만 호구지책이 우선이었다. 경력이 쌓일 무렵 정치권에서 하는 행사에도 캐스팅이 됐다.


거기서 한 정치인을 알게 됐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대화를 하게 되었고 몇 번 더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


기구한 운명의 시작     

그러던 어느 날 정치인이 차 한 잔 하자고 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갑과을 관계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그 사람의 선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너무 잘 통했고 오래지 않아 연인이 됐다.


세상은 허락하지 않은. 정치인 연인에게는 그녀보다 나이 많은 자제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둘 사이가 알려지면 정치 생명은 거기서 멈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몰래 5년을 만나고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정치인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사랑한 사람이라고 했다.     

 

몇 년을 그 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연히 일본에 사는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일본행을 결심하게 됐단다. 삶도 사랑도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단다.


한국에서의 삶을 많이 잊어가던 때에 일본인 남자를 만나게 됐다. 그녀의 두 번째 사랑이었다. 익숙한 도쿄를 떠나 남자 하나 믿고 히로시마로 갔다.


두 번째 남자의 직업은 야쿠자였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술만 마시면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 집에 안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그러던 사이 아이가 들어섰다.      


갓난 아이 하나 데리고 히로시마에서 도쿄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내 남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있겠지만 내 아이의 아빠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정돼 있었다. 3년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아이와 단 둘이 도쿄로 왔다.     


자그마한 카페를 운영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 나갔다. 아이는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맡겼다. 항상 옆에 두고 볼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은 늘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좋은 교육환경으로 아이를 보낼 수 있을 때쯤 데려오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가끔 하는 아이와의 영상 통화가 삶의 가장 큰 활력소였다.


거기다 새로운 사람이 와서 그녀의 삶은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11월이면 생각나는 그녀

그런 그녀가 스러졌다는 것이다.  짧고도 우연한 몇 번의 만남 속에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던  W.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얘기가 계속 맴돌았다.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요 사는 게. 새끼만 아니면...”     


1년 중 가장 쓸쓸한 달인 11월이 되면 뜨끈한 오뎅이 생각난다. 특히 <다고큐>의 오뎅이 생각난다. 유시마의 오뎅집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가 생각나지 싶다.    

      

앙증맞고 귀여운 옛날 전화기. 언제나 함께 할 것만 같은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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