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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한 오후 Oct 18. 2023

그녀는 예뻤다(?)

<나가노야(長野屋)>  1915년 창업한 신주쿠의 동네 밥집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만 들으면 떠오르는 그 이름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파티~”    

      

회사 송년 파티장이었다. 장기 자랑 시간이었다. 덩치가 매우 큰 D가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를 열창했다. 일본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직원들 얼굴도 잘 모를 때라 당연히 그도 초면이었다.


특히나 교대근무를 하고 있어서 마주칠 일이 더 없었다. 노래가 상당히 특이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노래였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했다.


그런데 첫 소절부터 귀에 쏙쏙 들어왔다. 뛰어난 가창력과 탁월한 발성 때문에 가사 전달력이 매우 뛰어났다.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됐다. 춤도 어찌나 잘 추던지 정말 장기를 넘어서는 특기였다.      


노래든 춤이든 모든 게 되는 만능 엔터테이너의 탄생

덥수룩한 머리, 미국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나 입을 법한 헐렁하고 커다란 티셔츠 차림의 남자는 심취한 듯 노래를 부르며 모든 직원을 열광시켰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잘 생겼다.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미남은 아니었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고 선이 굵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옛날 미남’ 같은 느낌.      


현란하고 흥겨운 무대가 끝나자 바로 앵콜 세례를 받았다. 말없이 한 쪽 구석으로 가더니 낡은 기타 하나를 가지고 왔다. 의자도 어디서 하나 끌어 왔다.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이 된다. 3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숨죽이며 그를 바라다 보고만 있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You have made my life complete

And I love you so~.”     


송년회를 뜨겁게 달군 반전의 매력

감미롭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엘비스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를 눈 감으며 들려주는데 공짜로 듣기가 너무 미안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거의 그의 콘서트장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의 열창이 끝나고 나자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야말로 스타의 탄생이었다. 입사하고 1년 가까이 교대근무하면서 조용히 지내더니 송년회 자리에서 잠재력이 폭발한 것이다. 나야 초면이라고 해도 그동안 알아 왔던 다른 직원들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알고보니 개그맨 공채 최종까지 간 실력자이자 삼겹살집 운영까지도

뒤에 들은 얘기지만 락밴드의 리드보컬이기도 했고 지상파 개그맨 공채 시험 최종까지 갔을 정도로 끼가 많았단다. D는 일본에서 한국식 삼겹살집도 경영을 했단다. 알면 알수록 더 대단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존재였다.


사업까지 했더 친구가 어떻게 월급도 쥐꼬리만한 우리 회사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와 밥 한 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대근무라 시간이 잘 안 맞았다.


그의 <아모르파티> 공연 이후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저녁 한 번 먹을 수가 있었다. 교대근무를 마치고 쉬고 있는 D를 만나러 신주쿠로 갔다.


신주쿠에는 내가 혼자 잘 가는 단골집이 있다. 회사 간부가 밥을 사주는데 너무 허름한 곳이 아닐까 잠시 고민해봤지만 D라면 그 집도 잘 어울린다 싶었다.      


가장 지저분한 것부터 가장 화려한 것까지 다 있는 신주쿠

신주쿠(新宿)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한국 사람이라면 잠시 여행을 가도 신주쿠를 찾고 정착을 해도 신주쿠를 간다. 한인 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 지역을 넓은 의미의 신주쿠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신주쿠에는 도심의 모든 것이 있다. 면적도 시부야, 하라주쿠 같은 곳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다. 가장 화려한 것에서부터 가장 지저분한 것까지 도시가 가져야할 것들이 여기에 다 녹아 있다. 거기에 신오쿠보까지 붙어 있으니 안 갈 수가 없는 곳이다.     


 

도쿄 도심으 대명사 신주쿠. 가부키초로 대표되는 환락가가 우선 떠오른다.


멀리 서 본 신주쿠. 신주쿠에는 도쿄도청 같은 관공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터미널, 다양한 쇼핑몰 등등 신주쿠 자체로도 도시가 갖춰야할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신주쿠는 화려하고 번잡하다. 일본 최고 환락가인 가부키초(歌舞伎町)가 있는데다 고급 백화점이 즐비한 곳 또한 신주쿠다. 이런 신주쿠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100년 식당이 바로 <나가노야(長野屋)>다.


도심 속의 섬같은 집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팔고 있다. 유행과 첨단이 물결치는 도심 속에서 꿋꿋하게 시골 마을에나 어울리는 밥집을 100년 넘게 밀고 가는 뚝심이라니.     


이 식당에 들어서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었다. 늘 혼자 오던 곳인데 오늘은 D랑 왔다. 아내와 딸내미한테는 오자고 제안도 안 했다.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다.


낮에도 신주쿠에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낮이라고 해서 그 활기가 어디 가겠는가. 인파를 헤치고 타임슬립해서 과거의 시골 마을에 있을 법한 허름한 식당으로 당도했다. 문을 열자마자 다른 세상이다.


도심 속의 사랑방 같은 공간

일본의 나가노 산골 마을의 식당에 와 있는 듯하다. 아주 젊은 직장인부터 늙수그레한 노인까지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참 다양하다.


다들 편안해 보인다. 사랑방에 앉아 느긋하게 나가노야의 시간과 공간을 즐기는 듯하다. 담배도 피우고 신문도 본다. 또 어떤 이는 멍 때리고만 있다. 다들 빠르게만 움직이는 도시의 속도와는 반대편으로 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타입슬립으로 과거로 간 듯한 배경의 식당이 신주쿠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시간여행을 하기 위한 출입구


그 분위기에 취해 나랑 D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상대로 식당 내부에는 온통 오래된 것들이다. 적당히 손때 묻은 것들이 왜 그렇게도 정겨운지 모르겠다.


나가노야가 첨단을 걷는 신주쿠 한 복판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늘 떠나고 싶은 게 사람이다. 늘 꿈을 꾼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상상을 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인간적 욕구의 현실적 충족이다. 일상에서 떠나고 싶은 충동은 생활에 찌들어 갈수록 더 강해진다.


불륜을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불륜이야말로 그런 욕구가 끝 간 데까지 간 것이라고 본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세상이니까. 새로운 세상을 만나서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덧없는 욕망이 만나서 불륜이 된다, 라고 믿는다.


일본에 온 이유도 특별(?)했던 친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D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어떻게 일본에 오게 된 거예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재밌잖아요.”     


내가 ‘그게 다야’ 하는 얼굴로 다시 바라봤지만 그는 별 시덥잖은 질문을 한다는 식으로 딴 곳만 응시하고 있다. 식당 곳곳을 스캔하더니 ‘여기는 도쿄 같지 않아요.’라고 한마디 하더니 외계인 얘기를 한다. 진짜 이 친구 4차원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가 있다.      


웬만한 음식은 다 있지만 비싸고 고급진 것은 없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갔다. 음식은 어떨까. 메뉴마저도 정겹다. 우리로 치면 가정식 백반이다. 다만 일본스럽게 여러 가지를 자기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실제로 음식을 미리 준비해놓고 주문하면 그걸 데워서 가지고 나온다. 시골에 가면 이런 곳이 꽤 있다. 그날 팔 음식들을 미리 해놓고 주문하면 따뜻하게 해서 내준다.


그런 식당들은 대개 저렴하다. 신주쿠 한 복판에 이런 시스템의 식당이 있다는 게 경이롭다. 튀긴 두부조림, 햄에그, 아지 후라이(전갱어 튀김) 그리고 야채 사라다(샐러드)를 시켰다. 기린 병맥주를 시켰다.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일반적인 식사 메뉴도 많다. 음식은 맛있고 가격은 싸다. 가성비 집이라는 것은 여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메뉴판에 친절하게 한국어도 적혀 있다.


아지후라이(전갱이 튀김). 진정한 가정식이다. 편하고 부담 없다.


엄마에게 부탁하면 바로 이런 비주얼로 내놓을 것이다.


달콤 짭조름한 두부 조림. 기린 맥주가 절로 들어간다.

     

언제나 지친 당신을 위로하는 나가노야

담배를 피든 맥주를 마시든 신문을 보든 수다를 떨든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든 나가노야를 찾으면 된다. 누구와 함께 와도 또 좋다. 사람을 나누고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집이다.


그것마저도 싫다면 혼자 편안히 있다가 가면 된다. 저녁 때 지친 하루를 위로하기 위해 들러도 좋다. 지친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 뭔가 색다른 곳으로 가고 싶을 때, 신주쿠 밤거리를 헤매다 마음이 허할 때도 찾으면 된다. 무엇보다 배고플 때 그냥 가면 된다. 나가노야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당신을 기다릴테니.


동네의 휴게실 같은 편안하고 정겨운 식당. 정녕 우리는 식당이라는 공간에서 이런 걸 원하려는 게 아닐까.


D가 결혼을 했다.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D가 나오면서 짧고 굵게 한 마디했다.     


“저 여기 너무 좋아요. 단골되지 싶어요.”     


1년 반쯤 회사를 다니다가 D는 사표를 냈다. 식당을 다시 경영해보겠다고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결혼 소식까지 전했다. 사내 커플이었다.


잘 생기고 재주 많고 인기 많은 D의 선택은 도대체 누구일까.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F였다. 입사한 지 6개월 밖에 안되는 신입사원이었는데 다른 회사 경력이 있어서 나이가 적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직원이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뚱뚱하고 예쁘지 않았다(진심으로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매력이 보이지도 않았다. 팔방미인 D가 그녀에게 구애한 건 정말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마저도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나간 뒤 나가노야에서 다시 D랑 맥주를 마셨다.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예쁘잖아요.”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그의 행복을 머금은 미소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분명 다른 이들은 모르는 특별한 매력을 느꼈겠지. 그만이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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