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저녁이었다. 그날따라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일찍 퇴근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계획도 없이 빈손으로 집에 당도하였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저녁 먹으러 갈 곳을 정해놓지도 않았다.
아내에게 뭐 먹을까라고 물었다. '들어오는 길에 맛있는 거라도 좀 사올 것이지'라는 지청구만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얼마 전 가려고 찾아놨던 칸다(神田)의 노포 중국집이 생각났다.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정도.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정말 늦은 거였다. 그래도 서둘러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아내에게 제안했다. 그녀는 일본까지 와서 뭔 중국집이냐고 짜증을 냈다.
옆에 있던 딸내미도 중식당은 싫다고 거들었다. 순간 우리 딸을 쳐다봤다. 문득 우리 딸이 중국 사람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우리가 사는 맨션 엘레베이터 안 에서도 어떤 주민이 장난기 많게 생긴 딸에게 물었다.
"추고쿠진데스카(中國人ですか. 중국 사람인 거죠?)".
한국에서도 짜장면을 달고 살던 아이였는데 왜 중국집이 싫다는 거지. 아내에게 떼를 쓰듯 한 번 더 제안했다. 아내는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을 보더니 나가기가 귀찮다고 했다. 혼자라도 가야겠다는 오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옛 것들이 주인공이 되는 정취의 거리 칸다와 진보초
난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밥 생각이 없어졌어. 동네 한 바퀴 돌게. 편의점에서 맥주나 한 잔 마시든가 하지 뭐."
아내는 너 혼자만 먹냐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야간외출을 쉽사리 허했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주은래를 만나러 칸다로 간다. 칸다(神田)와 진보초(神保町)는 걷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도심이면서도 화려하거나 세련된 것들보다 오래된 것들이 넘쳐난다. 활기는 있지만 번잡하지는 않은 곳. 옛날 서점 거리가 펼쳐져 있는 진보초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 때문에 하루 종일 충만해질 수 있다.
이름 있는 사립대학인 메이지(明治) 대학 등도 있어 옛날 대학가 분위기도 많이 난다. 칸다와 진보초에는 깊고 그윽한 전통만큼 수많은 스토리와 추억을 간직한 식당들이 많다.
오래된 서점이 즐비한 진보초의 거리. 이 거리만 걷고 있어도 마음도 몸도 행복해진다.
주은래, 손문, 루쉰이 즐겨 찾던 상해요리집
칸다의 조용한 뒷골목에 위치한 칸요로
비오는 저녁 인적 드문 칸다 거리를 걸었다. 쑨원(孫文)、루쉰(魯迅)、저우언라이(周恩来, 이하 '주은래') 등이 일본 유학 시절 즐겨 찾았다는 상해요리집 <칸요로(漢陽樓)>로 갔다.
특히 중국의 영원한 2인자로 불리우며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주은래하고의 인연이 깊다. 중국의 1인자였던 마오저뚱(毛澤東)에 대해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지만 주은래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사람은 드물다.
중국 인민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정치인, 주은래
주은래는 1898년 강소성(江蘇省 장쑤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혁명가, 군인, 정치가, 외교관이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을 했다.
정치가로서 평생 마오저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주은래는 1인자였던 그의 옆에 평생을 2인자로 함께 했다. 어떻게 보면 1인자보다 더 존경받는 2인자이기도 했다.중국인들은 지금도 '저우 총리'로 부르며 사당의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정도다.
문을 열자 주은래의 시가 걸려 젊은 시절 사진도 걸려 있다. 주은래의 저서 <18세의 동경일기>에 칸요로를 자주 왔었다고 직접 소개하고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메이지(明治) 시대와 다이쇼(大正) 시대에 유학을 가는 것이 유행했는데 주은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주은래의 기사와 사진이 여러 곳에 붙어 있다
20살 주은래가 사랑한 '시즈토우'가 영혼의 밑바닥까지 적신다
주은래는 1917년부터 약 3년 동안 일본 유학을 했다. 아마도 그 때 가장 자주 드나들던 식당 중 하나였을 것이다.
칸요로 홈페이지에는 “돈이 없는 주은래는 주로 저렴한 두부 요리를 즐겨 먹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생한 자신을 위로하고 보상하기 위해 ‘시즈토우(獅子頭’)를 먹었다.”라고 돼 있다.
시즈토우의 의미는 ‘사자의 대가리’ 다. 강소성(江蘇省) 출신의 주은래가 도쿄에서 고향의 요리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나간 시절의 노래를 들으면 그 때가 떠오르고 고향 음식을 먹으며 고향이 생각난다.
나도 그랬다. 스무 살 이후 고향을 떠났다. 고향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하고 떠나온 고향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고향 음식을 먹으면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주은래가 즐겨 먹던 시즈토우(獅子頭) : 사자 대가리(?)만한 커다란 완자탕
씹을 수록 감칠 맛은 커지고 진한 육향도 배가 된다
시즈토우는 커다란 고기완자에 육향이 나는 스프에 끓여 냈다. 햄버거 패티와는 완전히 다르고 만두소를 크게 뭉쳐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맛 또한 그렇다.
씹을수록 감칠맛이 커진다. 잡내 없이 잘 만들었다. 내공이 뭉쳐 있는 맛이다. 스프 또한 깊다. 뒷맛에 한약재 냄새가 여리게 올라온다. 비오는 날의 따끈한 국물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적셔 준다. 한 번 먹고 끝냇 맛이 아니다. 적어도 한 번은 더 맛보고 싶다.
이 요리는 주은래가 메이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20살 때부터 즐겨 먹던 음식이란다.
주은래도 그랬을 것이다. 얼어붙은 영혼은 고향의 국물 한 스푼으로 녹았을 것이고 외롭고 쓸쓸한 마음도 잠시나마 충만해졌을 것이다. 음식이 주는 힘이 그런 것이다. 위로라는 게 별 게 아니다.
복잡한 고국을 뒤로 하고 나라의 발전에 밑바탕이 되고자 나름 선진화돼 있던 일본 유학 길에 올랐을 것이다. 한참을 공부하다가 나는 어디인지, 무얼 향해 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칸요로에서 백년 전 주은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비오는 저녁에 인적 드문 칸요로에 문득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붉은 빛깔이 감돌지만 전혀 맵지 않고 은은하고 부드럽다
붉은 빛이 감도는 요리도 나왔다. 빨갛게 보여서 매울 거라고 생각했다. 전혀 안 맵다. 빨간 게 고추가 아니었다. 처음 느껴 보는 식감과 맛이다. 약간의 산미가 올라 왔다. 관자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니…. 감탄하며 조금씩 아껴 가며 음미해본다.
아주 편하지는 않지만 절도있고 친절한 중국 식당
비오는 날 저녁 8시에 칸요로는 정말 고요했다. 일본의 흔한 중국집하고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본에서도 중국집은 싸고 배부른 곳이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접근성도 좋다.
일본 국민 음식인 라멘도 원래 중국 음식에서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중국 요리는 뿌리가 깊고 종류도 한국보다 훨씬 다양하다. 칸요로는 편하기만 한 중국집은 아니다. 인테리어에 기품이 있고 종업원에게서 약간의 절도도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손님을 참 편하게 해준다. 너무 친절해도 불편하고 불친절하면 더 문제인데, 칸요로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기분 나쁘지 않다.
일본에서도 중국식당은 대중적인 곳인만큼 평균의 일본 식당에 비하면 친절한 편은 아니다. 중국 식당에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친절이었다.
맛도 분위기도 남다른 110년 중국 식당
중국 음식은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를 시켜 먹어야 제 맛이다. 두 가지 요리를 먹으면서 확신이 들었다. 다른 것들도 분명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대중적인 중국 음식점은 아닌만큼 가격이 그리 저렴한 편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감당하기 버거울만큼 비싼 집 또한 아니다. 점심 때는 나름 합리적 가격으로 색다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1967년에 지금 자리에 이전했고 4대째 110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단다.
맛도 분위기도 평범하지 않은 집이다. 그러면서도 담백하고 편안한 집이다. 무조건 다시 찾을 집이다. 진보초와 칸다의 분위기에 취하고 중국과 일본을 한꺼번에 느끼고 싶을 때는 어김없이 생각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