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함 속에서의 안식

작은 하루가 말을 걸 때

by 앤의하루


오, 마이 가쉬.


아침에 테라스로 나가보니 애지중지하던 백합 화분이 깨져 있었다.

한쪽 귀퉁이가 나가 뿌리가 훤히 드러난 화분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속이 상했다.


그 백합은 외가에 갔다가 외삼촌에게서 받아온 것이었다.

사실 처음엔 별 기대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자라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떡잎 두 장 짜리 백합이었다.

테라스 한쪽 구석에 두고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보니 백합이 세 뼘이나 자라 있었다.

꽃망울도 세 개나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 피어봐야 어떤 백합인지 알 수 있다는 점이 설렘을 안겨주었다.

그때부터 백합은 내 최애가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깨진 화분 위로 자투리 도자기 조각이 살짝 덮여 있었다.

이건 자연재해가 아니다. 누군가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깨뜨려놓고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추궁해 봐야 다들 “나는 아니야” 할 게 뻔했다.


우선 급한 건 분갈이였다.

친정엄마와 함께 꽃시장에 가서 배양토와 치자 한 그루를 사 왔다.

백합과 치자는 정원에 심고,

실내에서 수경삽목하여 키우던 스킨답서스, 녹보수, 고무나무도 새 화분에 옮겨 심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식집사이자 어집사다.

한 번 꽂히면 그 분야의 베테랑이 될 때까지 열정을 쏟는다.


지금은 열대어 구피를 1년 넘게 키우고 있다.

산란기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산란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둘 만큼 열정적이다.

식물도 마음에 들면 일단 삽목부터 시작한다.

물론 실패도 많았지만 그마저 즐겁다.


집 안의 화분은 점점 늘어간다.

심지어 먹던 설국향(잡감류)의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기도 했다. 벌써 3년째다.

수경으로 뿌리를 내린 녹보수를 보고는 친정엄마도 인정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나는, 분명 식집사이자 어집사다.


그날 엄마와 함께 분갈이를 하던 중,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꽃시장부터 안개가 심상치 않더니, 이내 빗줄기가 굵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백합의 머리가 자꾸 땅을 향했다.

화분에 있을 땐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던 녀석이,

이제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살펴보니 화분에서 꺼내는 과정에서 줄기가 다친 듯했다.

“이런, 젠장.”

탄식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그냥 둘 걸 그랬다.

줄기가 두꺼우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세 개의 꽃망울을 이고 서기엔 머리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제발 살아라.”


비를 맞으면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하는 엄마의 잔소리 덕에, 나는 고개를 떨구는 백합을 뒤로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며칠 뒤, 해와 바람과 비와 시간을 듬뿍 머금은 백합은

장하게도 예쁜 분홍빛 꽃을 틔웠다.


과한 애정은 때로 독이 된다.

무심한 시간 속에서 안식을 찾을 여유를 주자.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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