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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Sep 21. 2020

스위스_ 그린델발트 & 주변 걷기 5

Männlichen – Kleine Scheidegg- Wengen 

- 그린델발트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스위스 메테오는 역시나 정확해서 날씨는 쨍쨍했다. 지난 이틀 간의 비가 아쉽고, 내 짧은 휴가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약간 우울해졌다. 오늘의 계획은 맨리헨까지 곤돌라를 타고 가서, 거기서 클라인 샤이덱까지 간 후에 벵엔까지 내려오는 걸로 잡았다. 사실 걷는 양은 오늘이 가장 많은 편인데 도착이 벵엔이라 짐을 다 가지고 걸어야 하는 게 약간은 부담이었다. 미니멀리스트를 외치는 나이지만, 나름 5일간의 짐은 배낭 하나에는 다 들어가지만 조금 무겁기도 했다. 앨리스 할머니는 내가 원한다면 가방을 여기 두고 가도 좋다고 하셨지만, 벵엔에서 그린델발트까지 가방 하나 찾자고 먼 길을 다시 가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짐 싸고 빨리 출발.


- 맨리헨으로 가는 곤돌라는 그린델발트 아랫동네인 그린델발트 그룬트에서 출발했다. 노란 버스를 타도 되지만 내리막으로 20분 거리라 산책 겸 걸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아이거가 보여서 행복했다. 첫 곤돌라가 9시에 출발한다고 해서 8시 50분 정도에 맞춰 갔더니 이미 센스 있게 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편도는 스위스 철도카드 할인받아서 16프랑!


- 사실 혼자 타도 되었는데 내 뒤에 스위스 청년이 아주 잘생긴 개를 데리고 같은 곤돌라에 탔다. 개를 데리고 곤돌라를 타서 그 높은 산까지 간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곤돌라는 며칠 전에 탔던 피르스트 곤돌라에 비해 새것처럼 보였다. 역시 30분 정도 올라가서 맨리헨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풍경만큼은 그린델발트에서 본 풍경 중 최고였다. 물론 날씨 덕도, 그리고 한적한 산을 오롯이 느낀 덕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맨리헨의 유명한 놀이터이다. 여기서 노는 아이들은 행복한 기억을 안고 살 것 같다. 


- 클라인샤이덱으로 가기 전에 1시간짜리 Royal Walk를 걸어보기로 했다. 왕관 모양의 전망대를 왔다 가는 건데 풍경이 멋지다는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길에는 벵엔에서 올라오는 곤돌라가 보였다. 역시나 감탄만 나오는 설산이 오르는 내내 펼쳐졌다. 스위스 산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고 해야 할까? 오르막은 오르막이라 숨이 차긴 했지만 오르기를 잘했다 싶었다. 또 역시나 유모차를 끌거나 아이를 업고 오는 에너지 넘치는 서양인들 있어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싶기도 했고. 도착한 왕관 모양의 전망대는 너무 직관적이어서 유치하긴 했지만 풍경은 굉장했다. 제네바에 살 땐 종종 잊고 있던 스위스의 그 이미지에 충실했다. 

 

Royal walk의 전망대다. 

- 한참을 구경하고 내려간다. 내려가는 건 빠르지만 역시 등산 스틱이 없으니 발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되었다. 제네바 돌아가면 당장 스틱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직진하느라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벤치들이 눈에 띄었다. 앉아서 쉬면서, 스위스에 살고 있음에 이 좋은 계절에 이렇게 산에 건강하게 오를 수 있음에 감사했다. 

- 마침내 Panoramaweg이라 불리는 맨리헨-클라인 샤이덱을 걸었다. 이 구간은 앨리스 할머니의 추천이기도 하고, 단 한구간만 걸을 수 있다면 나 역시도 이를 추천하겠다. 이유는 일단 길이 거의 평지에 가깝고 매우 잘 닦여 있어서 걷기가 쉽고, 걷는 내내 알프스 산 봉우리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어서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길이도 긴 편이 아니라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다만, 너무 유명하고 쉬운 길이라 다른 구간에 비해 사람이 좀 많아서 아쉬웠다. 그래도 걸으면서 하는 명상을 방해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 쉽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클라인 샤이덱에 도착했다. 이 곳은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이 동네의 교통의 요지인 듯했다. 그린델발트, 맨리헨, 벵엔 등등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처음으로 아 번잡하다, 정신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높은 정상을 비싼 돈을 주고 올라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돈도 아깝기도 했고) 바로 벵엔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 벵엔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 듯했는데, 역시나 몸을 사리는 나는 기찻길을 따라 난 가장 쉬운 길을 택했다. 하지만 이쪽으로만 들어서도 훨씬 고즈넉하고 융프라우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서 만족스러웠다. 가파른 산길을 느릿느릿 오르는 기차를 보는 것도 좋았고 드문 드문 떨어져 있는 샬레와 유유자적하는 소들도 구경했다. 또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갑자기 우르르 쾅광 하는 소리가 나더니 빙하가 부서져 떨어져 내리는 희귀한 구경도 했다. 

 

- 그렇게 클라인 샤이덱에서 벵엔까지 2시간 조금 넘게 걸은 것 같다. 풍경으로 본다면 역시나 이제까지 걸었던 구간 중에 가장 아름다웠고, 생각해 보니 벵엔에서 클라인 샤이덱은 내리막이 아니라 오르막으로 올라오면서 보는 풍경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내려오면 아랫동네를 주로 보지만 올라오면 설산을 주로 보게 된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던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벵엔이 가까워 왔을 때는 역시 나 혼자 걷고 있었다. 노란 표시판을 잘 보고 걷는다고 했는데 역시나 약간 헤매다 다시 제 길을 찾아서 왔다. 

벵엔 기차역이다. 기차를 기다리며 이런 풍경을 보는 호사를 누리다니...

- 벵엔에 도착해서 동네를 한가롭게 걷다 보니 나는 벵엔과 사랑에 빠졌다. 차가 다니지 않는 이 동네는 그린델발트보다 훨씬 작지만 고즈넉하고 한가롭고 또 예쁘다. 여기서 하룻밤쯤 묵었으면 더 좋았을 걸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다음에 온다면 벵엔에서 머무르면서 반대쪽 산들을 걸어보고 싶다. 


-오늘은 총 5시간 정도를 걸었다. 제네바 돌아가는 시간 때문에 점심도 너무 급하게 먹고, 산장에서 커피 한잔 마실 여유도 부리지 못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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