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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by 파란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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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 이름에 추가해야겠다. 백수린,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다.

언니를 잃은 후 파독간호사인 이모가 의사로 일하는 독일로 유학 간 엄마를 따라 독일로 간 주인공이 독일에서 사귄 친구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일들. 연달아 두 번을 읽었다. 문장의 근육이 탄탄하다. 멋지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30

남편을 생각하면 격하게 공감한다.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 40

너무 행복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66

내 새끼가 아닌 이상, 내 안의 이런 악의를 가끔 마주한다. ‘너도 그랬잖아!’ 싶은 마음이 면죄부가 되어 나의 악의가 덜 미안하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100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나는, 그것이 사랑이든 기쁨이든, 미움이나 경멸과 혐오든, 그 모든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바람이 바다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도시의 지붕들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만이 지닌 아름답고도 슬픈 매혹을 가르쳐주던 시간. 101

아름답고도 슬픈 매혹은 서서히 사라지는 것만이 지닐 수 있다. 사람의 인연도 서서히 물들이고 서서히 사라진다.


레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침햇살 아래 부드럽게 몸을 드러내는 연둣빛 들판처럼 완만한 것이었다면 한수를 좋아하는 건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과 벅차도록 밀려오는 기쁨의 계곡 사이를 곡예하듯 걷는 현기증 나는 일이었다 104

대학 1학년 때, 남자아이들은 문무대라는 곳에 일주일 가야 했다. 여학우들이 남자 동기들에게 편지를 써주자 하여 각각 세 명을 배정했다. 편지지를 앞에 놓고 그 아이를 떠올리며 편지를 쓸 때마다 세 아이에 대한 감정이 다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무덤덤과 건조한 감정의 두 아이와 달리, 한 아이는 콩닥거림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현기증 나는 관계보다 부드럽고 완만한 관계가 편안하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106

지금의 나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힘들기 때문이다. 귀찮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109

나아져야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살아내자. 살아내야 한다.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고 침전물을 켜켜이 쌓여 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142

무례한 것도 귀여운 경우가 있고 불쾌한 경우가 있다. 귀여운 경우는 넘어갈 수 있으나, 불쾌한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 그 인연은 지속하기 어렵다. 내가 그런 이들과 손절하는 이유는, 내 마음의 용량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잘 못한다. 자꾸 비워야 그다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그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판단했다. 하루하루를 잘 살아 그 하루하루가 쌓여 잘 살아낸 인생이 되기로 했다. 그러니 나의 하루를 소중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보람차게, 더 자주 행복하게. 매일매일 편안하게.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몸을 조금이라도 쓰면 인생이 살 만해져 214

그래서 내 삶은 단순하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매주 목요일에 책갈피, 가끔 통영길문화연대, 아주 가끔 친구들. 그리고 집에서 꼼지락꼼지락.


누구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본다.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아무리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 249

표정을 숨기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가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 그런 이들과의 만남을 피한다. 아예 안 만나는 것이 좋다. 서로 불편하니.

내가 만약 그 약사였다면, 노숙인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약국은 사람들의 방문이 많으니, 매일 오시려면 냄새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목욕하고 깨끗한 옷을 입어주라고. 목욕비와 옷은 제공하겠다고. 아니면 들이기 곤란하다고.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을 것이다.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는 고민하겠지, 기분 상해 추운 겨울 밖에서 지낼 것인지, 목욕과 깨끗한 옷을 입고 따뜻한 곳에서 쉴 것인지, 약국에 들이는 것은 벌써 약사가 선택한 일이니, 그 안에 들어갈지 말지는 노숙인 그의 선택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304

희망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잡는 지푸라기다.

불교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맹수에 쫓기던 사람이 우물가로 도망치다 나무에 달린 가지를 잡고 우물로 내려가 피하려 했는데, 밑에 독사가 보였다. 내려가면 독사가 있고, 올라가면 맹수가 있으니 어쩌지 못해 가만히 있는데, 쥐가 나타나 나무를 갉아대기 시작한다. 겁에 질린 사람의 입으로 나무에 달린 꿀벌집에서 꿀이 떨어졌다.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우물 밑으로 내려가면 어차피 죽으니, 밖으로 나와 맹수와 결판을 내야 하는데, 꿀에 혹해서 가만히 있다 우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세상은 어차피 맹수와 독사, 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나마 그 꿀이 있어 사람이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꿀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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