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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말가 Jul 12. 2020

[#502의 라디오브런치] -37.8도의 체온

- 옴니버스 소설 -


               [#502의 라디오브런치]는 글로 읽는 개인 라디오 방송을 콘셉트로 한 옴니버스 소설입니다.


안녕하세요, [#502의 라디오브런치] 이야기 길잡이 이오영입니다.

오늘은 원래 준비하고 있던 이야기 말고 갑자기 겪게 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시작했죠. 그날은 화장실 청소까지 한 뒤 샤워를 하고 시원하게 입가심으로 맥주 반 잔을 마셨어요. 잠시 뒤 힘이 빠지면서 피곤해지더니 발바닥이 아프고, 등이 뭉치고, 어깨가 결리고, 팔이 쑤셔오는 거예요. 자꾸 몸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어요. 멀미하는 것처럼 울렁거리고 호흡도 가빠졌고요.


 내가 화장실 청소를 너무 심하게 했나? 락스 냄새가 너무 심했나? 샤워를 너무 뜨거운 물로 했나? 더위 먹었나? 낮술... 먹어서 그런가?


남편이 퇴근하고 저녁밥을 대충 차려서 먹는데, 배가 고픈데도 잘 넘어가질 않는 거예요. 그렇게 허우적대며 왜 이러는 건지 증상의 원인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는데 급기야 고무줄로 팔, 다리, 허리, 가슴을 15센티 간격으로 묶어 놓은 것처럼 온몸이 조여 오고 저리고 욱신대기 시작했어요.


 설마,.... 열.... 나나?


열을 재보니 37.8도였어요. 저는 감기에 걸리면 먼저 편도선부터 붓고, 그러고 나서 콧물로 기침으로 넘어가는 나름의 지켜지는 단계가 있는데 이번에는 감기는 아닌 것 같았어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열이 나면 안 되는 시기잖아요. 절대 안 되는 시기잖아요. 코로나19!


인후통은 없고, 기침도 아직은 없어.

아-씨 남편이랑 밥을 같이 먹었네!

일단 마스크 해야겠어.


그때부터 30분에 한 번씩 발열체크를 했습니다. 욱신거리는 몸으로 내일이면 썩을 것이 확실한 콩나물을 다듬고 데쳐놓기까지 했어요. 12시까지도 열이 떨어지지 않자, 남편은 쌍화탕 하나 먹으라고 하더군요. 다른 증세 생기면 감기약 먹으라고. 그래서 쌍화탕을 먹고 방에 가서 누웠습니다. 누워서 휴대전화 메모에 최근 다닌 곳을 적었어요.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굉장히 분주한 시장 같은 곳을 엄청 헤매는 꿈을 꾸다가 깼는데 15분 정도 지났더라고요. 다시 열을 재보니 38도로 열이 약간 올랐더군요.


남편은 소파에서 자라고 해야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매트릭스 배경 화면처럼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그렇더라고요. 제가 만약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시한부 삶이었다면 하고 싶었던 일, '버킷리스트'라는 것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며 죽을 때의 회한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했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느닷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보니, 내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나 미련보다는 내가 할 수 없는 미래의 것들이 아쉽고 아련해졌어요. 생각보다 세상과 이별하는 것에 그렇게 크게 미련이 없는 것 같아서 조금 의외긴 했어요. 죽을 때,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던데 저는 아닌가 봐요.

제일 아쉬운 건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502의 라디오브런치]의 방송을 그만두게 되는 것이었죠. 저의 활력소였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생각하는 것을 접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죠. 저의 바이러스가 다른 사람에게만 옮겨지지 않았기만을 바랐어요.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를 저린 온몸을 뒤척거리며 쉽게 잠들지 못했는데 어느새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어요. 눈 뜨자마자 베개 옆에 둔 체온계로 발열 체크를 했어요. 35.9도. 다시 재 보았어요. 36.2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살았구나. 살았구나!


에이-진짜!


분명히 안도감이었는데 그냥 갑자기 투정이 튀어나왔어요. 그 당시의 감정이 다시금 떠올라서 눈 옆이 습해지네요. 훌쩍!

36.2도인 것을 확인하고 당장 맥주 한 캔 원샷 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일요일까지 외출을 삼갔습니다.

여러분, 저 살았습니다. 저 살아서 라디오 하고 있어요!

이 감격스러움을 빨리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와서 세상과 이별하는 것에 미련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잘못도 많이 하고 후회도 있고 실수도 많았던 인생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책임 있는 일이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세상과 이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전 남겨질 사람들이 잘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 미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유서를 들여다보고 고치고 다시 정리해보고 했던 것도 조금은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오늘 정신없이 쏟아낸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다음에 또, 꼭 다시 올게요.

[#502의 라디오브런치] 이야기 길잡이 이오영이었습니다.




PS) 분명히 살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세상이 달라 보이거나 하는 것 없이 제 삶은 여전히 재미없네요.

      훙...간사하네요, 사람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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