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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03. 2023

9화. 새옹지마

소설 같은 이야기



중국 국경 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쳤다. 이에 이웃 주민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말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다. 주민들은 “노인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며 축하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위로를 하자 노인은 역시 “이게 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며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 오랑캐가 침략해 왔다. 나라에서는 징집령을 내려 젊은이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야 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까닭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다. 좋은 날도 있고, 좋지 않은 날도 있고 예측 불가능하다.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지라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 한다. 나도 내가 스무 살까지 세 번이나 죽음을 생각해볼 정도로 힘든 적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 데 그때는 그게 전부라 생사를 결정하는 사건들이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입시와 취업으로 성공 여부를 가르니까 더욱 그랬다.      


실제 대한민국 청소년 3명 중 1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고, 대부분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실제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를 계속 차지하고 있다. 나도 모두 공부 때문에, 입시 때문에 그랬다. 그때는 그게 나에겐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20년을 더 살고 보니 고작 입시는 10대 때나 중요한 일이지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천리안이 없는 한 미래를 살펴볼 수 없으니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던 스무 살. 인터넷이 나름 발달했던 때라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방법을 3일 동안 연구했다. 뛰어내리기, 목메기. 손목 긋기, 수면제 먹기, 번개탄 피우기 등 5가지 방법이 가장 대중적이었다. 하지만 만일 실패할 경우 부작용이 더 커서 무서워 아무것도 도전하지 못했다.      


첫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사람이 죽는지 아는가? 대부분 바닥에 떨어지면서 크게 충격을 받아 죽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바로 ‘심장마비’ 때문이다. 떨어지면 죽게 될 거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인해 놀래서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한다. 만일 강심장이라면 떨어져서 죽지 않고 불구로 살아가게 된다고 하니 더 괴롭다. 둘째, 목메기는 매우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에 의해 발견될 가능성이 커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셋째, 손목 긋기는 가장 실패 확률이 높다고 했다. 겉에 있는 모세혈관으로는 피가 별로 나지 않고, 안쪽에 있는 동맥을 끊어야 하는데 과다출혈이 되려면 그것 또한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넷째, 수면제를 먹는 것도 발견 즉시 위세척하면 살 확률이 높고, 괜히 간만 상해서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째, 번개탄을 피우려면 사람 없는 좁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 인적 드문 곳에 차를 세우고 시도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건이 되지 못했다.     


유일하게 딱 하나 손목 긋는 것만 살짝 시도해 봤는데, 커터칼이 피부에만 스쳤는데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고통스러웠다. 차마 안쪽에 있는 동맥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천천히 생각해보니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뭐라도 할 수 있는 나이였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나는 두 번의 입시 실패 끝에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수도권의 한 대학에 진학했다. 심지어 성적이 좋지 않아서 예비로 붙었다. 나와 3년간 고등학교 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SKY에 갔다. 아니면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카이스트 등 미래가 보장된 그런 학교에 입학했다. 실제 22살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친구도 있었고, 23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로 일하는 친구도 있었다. 변호사와 의사와 같은 인기 많은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무리 못해도 대기업에 들어가서 높은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수도권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름도 모를 대학을 다녔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었던 나는 티를 낼 수 없었지만, 수치심이 가득했다. 친구들과 비교하니까 자격지심이 더 생겼다. 그래도 다시 살아 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일단 수도권에 다니는 대학생인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중3 때 반에서 1등이었고, 명문고를 나왔다는 사실을 지우기로 했다. 게다가 재수했지만, 빠른 84년생이니까 그냥 84년생인 것처럼 살면 1년 늦은 게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비록 용은 될 수 없는 신분이지만, 최소한 뱀의 머리가 되면 뱀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학교 때 나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살아갔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공부도 열심히, 노는 것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쉬지 않고 하루하루 보냈다. 남들은 어떻게 하든 주 4파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무조건 주 5일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나와 공부했다. 도서관은 내 놀이터였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만큼 정말 매일 열심히 공부했다. 심지어 주말에도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다. 진작 이렇게 고등학교 때 공부했으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이미 지난 과거니 어쩔 수 없었다.      


말로는 합리화했지만, 1년 늦춰진 내 인생을 되돌리고 싶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하면 다른 인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주말에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이 여자친구와 손잡고 데이트하러 나가는 장면을 뒤로하고 나는 항상 도서관으로 향했다. 남들 다하는 미팅도 소개팅도 대학교 3학년 때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연애는 사치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물론 모태솔로의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다.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여러 개를 해보니 가장 가성비가 좋은 건 과외였다. 과외를 2~3개만 해도 생활비는 충분했다. 문제는 등록금이었다. 나처럼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친구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나는 대출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4년 동안 빠짐없이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에 다녔다. 전액 장학금은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다 메꿀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경제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도 그렇게 사는지도 모르겠다.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학군단(ROTC)를 했다. 그냥 군대에 가면 월급이 얼마 안 되지만, 장교로 군대에 가면 매달 100만 원씩 모을 수 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병장 월급이 10만 원도 안 될 때, 장교는 100만 원 넘게 월급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볼 때 분명한 메리트가 있었다. 다만 병사로 가면 24개월 군 복무를 해야 하지만, 장교로 가면 대신 군 복무는 몇 개월 더해야 했다. 군 복무 기간만 보면 그렇지만, 실상은 달랐다. 학군단(ROTC) 자체가 학생이자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3학년 때는 죽을 맛이었다. 4학년 선배들이 우리를 교육한다고 매일 쥐잡듯이 잡았다. 다행히 구타 이슈가 있어서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육을 핑계로 매일 얼차려를 받았다. 학군단(ROTC)는 학교마다 번호가 부여되는데, 시작 번호가 101번이었다. 그래서 얼차려는 항상 학교 단번으로 시작되었다. 팔굽혀펴기,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기 등 온몸을 100회 이상씩 매일 하니까 점점 몸짱이 되어갔다.      


군대는 계급이 깡패다. 사실 알고 보면 선배 중에는 재수, 삼수하지 않은 순수 02학번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랑 같은 학년으로 학교 다닌 친구나 다름없다. 하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친구들한테 맨날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것도 억울했다. 형한테 혼나면 모를까 같은 친구한테 그런 수모를 당하니까 억울했다. 하지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오히려 나이가 같은 03학번 기수 후배들에게 더 가혹하게 했다. 행여나 기어오를까 그런 것만 같았다. 우리는 더 기죽은 척하며 살아야 했다. 군대에서는 나대면 더 혼났으니까.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까도 많이 고민했다. 1년 선배인 게 무슨 벼슬이라고 우리를 괴롭히는지 더럽고, 치사해서 장교 안 하면 되니까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당한 게 아까워서 그냥 끝까지 참았다.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했다. 하지만 잘한 결정이었다. 4학년이 되고 나니까 우리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 후배들은 똑같이 1년을 힘들게 보내야 했다.      


선배들 졸업식 날이었다. 우리는 학교 소속이기에 졸업식 행사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연예인들이 와서 공연도 했다. 나는 임원이라서 사회자와 연예인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 잘나가던 아이돌 가수 SS501과 파란(PARAN)도 바로 눈앞에서 봤다. 그렇게 신기하고도 특별한 경험을 했던 날 나는 새옹지마를 제대로 경험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던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때 놀러 나가면 길거리에서 그렇게 동네 양아치들을 만났다. 나는 다행히 돈이 없어서 빼앗기진 않았지만, 나랑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그렇게 돈을 뜯겼다. 그땐 키가 아직 덜 자라서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어딜 가든 우리를 잡아먹으려 안달이었다. 하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키 큰 남학생이 갑자기 나에게 오더니 말했다.     


“야! 돈 있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랑 동갑인 친구였다. 비록 중학교 때는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게다가 우린 같이 손잡고 병원에 고래를 잡으러 간 동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못 봐서일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나는 전교 부회장이었는데, 그 친구는 학교 삶은 별로 관심이 없었나 보다. 공부도 하기 싫은, 싸움질이나 하고 애들 돈이나 빼앗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 갑자기 멀리 벤치에 앉아 있던 다른 남자애가 다급하게 와서는 말했다.     


“얘는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냥 보내줘.”

“왜?”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더니 나중에 왔던 남자애가 나보고 미안하다며 그냥 가라고 했다. 이 친구 또한 6학년 때 우리 반이었고, 그해에 같은 반 친구였다. 선생님들의 신임을 받고 있던 나를 괜히 건드렸다가는 불똥이 튈 수 있으니 현명한 대처였다. 그때는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면 일진들이 괴롭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설프게 공부하거나 어설프게 학교생활을 하면 다 자기들 밥으로 생각하고 건드리고 괴롭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는 정글이었다.     


진짜 일진들은 나름 규칙이 분명했다. 장난으로 애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학교 짱은 공부도 잘했다. 뭐든 제대로였다. 하지만 일진 중에서도 어설픈 이진들은 괜히 주변 애들을 괴롭혔다. 돈도 빼앗고, 빵셔틀도 시키고 그랬다. 그러니 공부를 잘하든, 운동을 잘하든 남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무언가를 잘해야만 했다.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친구들은 그래서 학교에 생긴 운동부에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부 못하면 운동이나 하라는 의식이 있었으니까. 나중에 느낀 거지만, 사실은 운동도 머리가 좋아야 잘할 수 있다.      


나는 중3 때 반에서 1등이었고, 돈을 빼앗지 말라고 말리던 친구는 우리 반 꼴등이었다. 그래도 심성은 착한 아이였다. 그렇게 믿고 싶다. 최소한 나한테 돈 빼앗지 말라고 말려준 친구였으니까.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나중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노력을 통해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그 친구가 딱 그런 친구였다. 중학교 때 반 1등과 반 꼴등이 대학교에서 만났으니까. 내가 방황하는 동안 그 친구는 열심히 살았고, 성장해서 대학에도 갈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나보다 1년 선배니까. 인생 역전 아닌가?      


졸업하는 그 친구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매우 상기된 얼굴로 내가 맞는지 확인했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야! 너가 이 학교에 왜 다녀? 너 안양고 갔잖아. 말도 안 되는데? 진짜야?”     


그 친구는 못 믿겠다는 듯이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친구는 진심으로 황당했겠지만, 나는 찐으로 당황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극과 극에 있던 두 친구가 180도 역전된 상황으로 만나게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보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다.      


공부만 잘하던 엘리트라고 불리는 친구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노예로 살아가는 반면에 공부 안 하고 맨날 싸움박질만 하던 친구 중에는 20대부터 사업해서 엄청난 부자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건 하나의 예일 뿐이고, 얼마든지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이 얼마든지 생긴다.      


선배들이 투잡으로 대리운전하고, 배달 대행 일을 하며 돈을 많이 벌 때 내가 유튜브에 도전한다고 하니 비웃었다. 물론 처음에는 수익이 나지 않아서 별 볼 일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포기상태니까. 결과적으로도 비웃을만하지만, 대신에 나는 몸빵으로 하는 일이 아닌 나이가 들어서도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 도전했다.

     

비록 영상으로는 실패했지만, 영상 편집 실력이 생긴 덕분에 가끔 아르바이트로 소소하게 돈을 번다. 그리고 영상 대신 글을 쓰는 일로 전환하면서 나는 적성을 찾았다. 지금은 3년도 안 되었는데 10권이 넘는 책을 쓰고 돈을 벌고 있다. 가끔 강의나 강연도 들어와서 나간다. 소셜미디어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서 나의 인지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 비록 시작은 미약했으나 창대한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책이 1권 나왔을 때, 마찬가지로 선배들은 돈 주고 책을 냈냐고 물었다. 자기들과 달리 명문대를 나오지도 않은 듣보잡 대학을 나온 애가 책을 냈다고 하니까 대놓고 무시했다. 하지만 2권, 3권, 그리고 10권 가까이 책이 나오니까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오히려 자기도 책을 내고 싶다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묻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사 새옹지마다. 내 친구가 비록 중학교 때는 공부를 못했을지라도 열심히 살고 성장한 것처럼 나도 비록 명문대 출신이 아니지만 이렇게 바뀔 수 있었으니까.     


어두운 현실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평생 그 늪에 살아야 한다. 하지만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더 나은 위치로 가기 위해 매일 갈고 닦으면 분명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의 부자와 아닌 사람의 큰 차이는 딱 하나라고 한다. 실천하느냐 또는 실천하지 않느냐의 차이뿐.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큰 차이가 벌어진다고 한다. 그 친구도 나도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실천했기에 그런 결과를 얻은 게 아닐까.       

   



한 마을에 두 친구가 살고 있었다. 둘은 먹고살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물을 길어서 팔았다. 아직 젊었기에 튼튼한 몸으로 무거운 물통을 나를 수 있었지만, 평생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친구는 현재 돈을 잘 벌 수 있으니 더 열심히 물을 날랐다. 하지만 다른 친구는 생각이 달랐다. 오랜 연구 끝에 파이프를 연결하기로 했다. 한 명은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해서 부자가 되었다. 다른 한 명은 먹고 살 정도만 벌고, 나머지 시간에는 파이프를 계속 연결했다. 몇 년이 흘러 부자가 된 친구는 몸이 망가져서 일할 수 없었다. 반면에 다른 친구는 파이프 연결에 성공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파이프 연결에 성공한 친구는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을 팔아서 떼돈을 벌었다. 

     

이 이야기는 <파이프 라인 우화>라는 책의 내용이다. 혹시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내가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처음으로 읽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당장 나에게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꾸준하게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매진했다. 덕분에 이렇게 글 쓰는 일을 찾게 되었고, 매일 글을 쓴다.      


사실 책 인세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에서 인정해주는 책을 쓰게 되는 날에는 평생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파이프를 건설 중이기 때문에 언젠가 그럴 날이 오리라 믿는다. 지금 쓰는 이 소설이 종지부를 찍어줄지도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니까. 매일 3시간씩 글을 쓰니까 나는 계속 글 쓰는 실력이 늘 것이고, 책을 매일 읽으니까 아이디어가 생겨 더 좋은 책을 쓰게 될 것이다.          



(엔딩곡)     


“이 세상 위엔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나는 문제 없어

- 1993년 11월에 발매된 가수 황규영의 첫 번째 앨범 ‘끝없는 사랑을 꿈꾸며’, 1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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