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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07. 2023

10화. 어학연수

소설 같은 이야기



내 나이 또래라면,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 한 번쯤 꿈꿔봤을 것이다. 요새는 교환학생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어학연수를 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는 취업을 위해 토익 점수를 따고, 어학연수 가는 게 유행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메리트가 있었으니까. 물론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밑바탕이 되어야 가능했지만 말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학연수는 사치였을 테니까. 당장 아르바이트를 하든, 취업 전선에 뛰어들든 돈을 버는 게 먼저였으니까.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어학연수는 우리 집 사정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안이 있었다. 군대에서 돈을 모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월급을 타면 매달 집에 돈을 보내드렸다. 장교로 근무해서 병사 월급의 10배는 되었으니까. 어차피 군인이라 돈 쓸 때도 없고, 사교육에 투자하신 돈 조금이라도 회수하시라는 의미로 그랬다. 28개월 동안 보내 드린 돈이 거의 2천만 원은 됐다. 게다가 내가 따로 모은 돈도 천만 원 정도 되었다. 어학연수 밑거름으로는 충분했다. 일단 자리 잡고 또 돈을 벌면 되는 거였으니까.     


대학교 4년 내내 열심히 영어 공부한 덕분에 일상 회화를 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비행기 한 번 타보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이왕이면 영어권 국가로 가고 싶었다. 그래야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고 싶었던 나라는 원래 영국이었다.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환율에 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말 기준 환율이 거의 2천 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북미권과 비교해 볼 때 거의 2배 정도 차이가 났다.     


한국에서는 사실 북미권 영어를 선호한다. 나도 바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은 항상 나를 시험한다. 미국 환율이 이전과 달리 1300원까지 올랐다. 다른 영어권 국가에 비하면 이것 또한 비쌌다. 다음으로는 캐나다였다. 군대 전역할 때까지 거의 캐나다로 마음을 굳혔는데, 2010년 초에 하필이면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 열릴 때라서 점점 환율이 올라갔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돈을 바꾸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지역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호주로 유학 간 불알친구랑 연락이 닿았다. 호주 환율은 800~900원 정도였지만, 발음이 워낙 구려서 거기는 피하고 싶었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는 영국에 있던 범죄자들을 이주시켜서 만든 나라라고 해서 심적으로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에서 몇 년간 유학 생활하고 있는 친구의 말에 금방 설득됐다. 호주도 똑같은 영어권 국가이고, 영어 배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자기가 있으니 정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더 안전하지 않겠냐는 말에 완전히 넘어갔다. 나의 어학연수 최종 목적지는 그렇게 호주가 되었다.     


비행기도 처음, 해외도 처음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어학연수 다녀온 주변 사람들한테 많이 물었다. 그랬더니 다들 필리핀에 몇 달 가서 적응 먼저 해보고 넘어가라고 했다. 가격 면에서 가성비가 있으니 꼭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무리 가성비가 있어도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고민했다. 그때 어머니께서 현금 오백만 원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보내준 돈으로 생활도 했지만, 아들이 어학연수 가는데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모아두었어. 어차피 주려고 했던 돈이니 필요에 맞게 편하게 써.”     


전혀 생각지 못한 돈이 생겼다. 서프라이즈는 항상 더 감동이다. 남들이 그렇게 추천하는 필리핀 어학연수 3개월 비용으로 충분했다. 호주에 가는 비행기 표 비용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가 모은 천만 원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든든했다. 호주에 가서 정착할 때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되면 천천히 일을 구해도 되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수퍼 J인 나는 군대 전역 3일 후에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세이퍼시픽 항공이라 홍콩을 경유하는 비행기였다. 공항에서 잠시 대기할 때 점심을 사 먹었다. 100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이지만, 홍콩 사람이 쓰는 영어는 약간 이상했다. 광둥어 억양 때문이지 발음이 조금 센 느낌이었다. 밖에 나가볼 수는 없었지만, 공항에서 영어와 광둥어를 들어볼 수 있었다. 제대로 외국에 온 느낌이었다. 호주에 가면 얼마나 더 좋을지 기대가 됐다. 하지만 첫 번째 목적지는 필리핀이었다.     


그렇게 홍콩에 잠시 들리고 약 4~5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필리핀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습한 날씨에 코끝이 찡했다. 추울 때만 코가 찡할 줄 알았는데, 무척 더워도 그랬다. 긴바지를 입고 온 걸 후회했다. 바로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어학원 담당자는 나를 포함해 4~5명을 봉고차에 태워 숙소로 데려갔다. 내가 선택한 곳은 어학원과 숙소가 한 장소에 같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외출도 자유로운 곳이었다. 다른 지점은 철저하게 평일에는 외출 통제를 하는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같은 어학원인데도 분위기는 완전 반대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숙소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2인실을 골랐다. 1인실은 비용이 너무 부담되고, 6~8인실은 다시 군대처럼 단체 생활을 해야 하니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간 방에는 마침 룸메이트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기는 이제 이틀 후면 여길 떠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첫 마디가 나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클럽에 가면 게이 조심해요. 여기는 상체는 여자인데 하체는 남자인 애들이 꽤 많아요.”     


초면인데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다 왔는지, 그런 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물론 나이는 물었다. 알고 보니 동갑이었다. 그리곤 오직 자기가 겪은 충격적인 경험만 소개할 뿐이었다. 클럽에서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같이 나가고 있는데, 다른 한국인이 조용히 와서 충고해주었다고 한다. 같이 나가고 있는 사람이 남자니까 나가지 말라고 했단다. 그 광경을 목격한 두 성을 가진 필리핀 사람은 엄청나게 화를 내며 충고해준 한국인과 피 터지게 싸웠단다. 싸울 때 갑자기 목소리가 남자로 바뀌어서 식겁했단다.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정확히 룸메이트의 대사가 기억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인 내용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필리핀 생활에서 지극히 일부이자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학원 공식 일정으로는 오리엔테이션과 레벨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자료도 모두 영어로 되어 있고, 설명하는 사람도 영어를 쓰니까 외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시험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4개 영역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보는 시험과는 확실히 달랐다. 필리핀에 사람들이 오는 이유는 영어를 잘 말하고, 쓰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당연했다.      


나는 수업을 선택할 때 일부러 동기 부여를 위해 IELTS반을 선택했다. 호주에 있는 불알친구도 혹시 모르니 IELTS 점수를 딸 수 있으면 따오라고 했다. 친구는 호주에서 어학원을 다니든 대학원에 가든 IELTS 점수가 있으면 편하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 했다. IELTS는 영국에서 만든 공식 영어 시험이다. 미국에서 만든 TOEFL 쯤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IELTS는 분명히 목적을 나누어 두 가지 버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민을 원하면 GENERAL로 유학을 원하면 ACADEMIC으로 보면 되는 거였다. 다른 건 다 같은데 쓰기 시험 주제가 목적에 맞게 다르게 출제되었다.     


나는 혹시 몰라 ACADEMIC을 선택했다. 이민해서 생활을 목적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학문을 배우기 위한 초석으로 영어 시험을 봐야 하니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기 부여는 확실했다. 단기간에 몰입해서 영어 시험을 준비하며 영어 실력을 향상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모든 수업은 거의 다 소수 아니면 1:1이었다. 적은 비용으로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게 필리핀 어학연수의 매력이었다. 비록 매달 레벨테스트가 있어서 부담은 되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비싼 IELTS 모의고사를 공짜로 치르는 셈이었으니까. TOEFL도 그렇지만, IELTS도 시험 비용이 20만 원대로 비쌌다. 지금은 더 비싸지 않을까. 찾아보니 30만 원 초반이고, 명칭도 바뀌었다. 역시 세월이란...     


이 어학원 외출 규칙은 간단했다. 밤 11시 이후 새벽 6시 이전까지는 정문을 폐쇄했다. 그 외 시간에는 자유롭게 출입 가능했다. 입구에는 총을 든 가드가 지키고 있었다. 필리핀은 총기 휴대가 가능하고, 실제 칼이나 총 등으로 범죄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했다. 주말에 종종 갔었던 대형 쇼핑몰 입구에서는 무장한 가드가 심지어 가방과 몸을 수색했다. 무기 소지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치안이 불안한 나라였다. 실제 길 가다가 혹시 칼이나 총을 들이대면 그냥 돈을 주라고 했다. 안 그러면 칼을 맞든, 총을 맞든 몇 푼 때문에 황천길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외출이 가능한 분위기라서 많은 사람이 밤 문화를 즐겼다. 알코올 쓰레기인 나는 실제 한국에서도 나이트나 클럽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돈 주고 영어 공부하러 와서 굳이 그런데 갈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생각이 달랐다. 많은 남학생이 저녁에 나가서 다음 날 아침까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룸메이트가 대표적이었다. 내가 지낸 3개월 동안 방에서 얼굴을 본 게 한 손에 있는 손가락 수로 꼽는다. 항상 반대편에 있는 침대는 비어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필리핀 여자친구를 사귀어서 그 집에서 생활했던 것이었다. 숙소 비용을 생으로 날려도 아깝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 친구는 부유했다. 어학연수 간다고 할머니가 통장에 1억을 넣어줬다고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급할 때 쓰라고 주신 돈이라고 했다. 있는 놈이 더 한다고, 자기 여자친구한테는 돈을 잘 쓰면서 한국인 남자애들과 다 같이 놀 때는 스크루지처럼 짜게 굴었다. 그래서 부자인가 생각이 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필리핀 연수가 끝난 후에 미국에서는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와 같이 살 예정이라고 했다. 아주 개방적인 친구였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태솔로였던 나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룸메이트인데도 역시 ‘out of sight, out of mind’였다.     


누군가 그랬다. 필리핀에 다녀온 남자는 만나지 말라고. 그 말의 이유를 나중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전부 다 그러는 건 아니지만, 밤 문화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기에. 어떤 친구는 필리핀 강사와 연애 끝에 결혼해서 애 낳고 잘살고 있다. 그러니 케바케다. 하지만 필리핀에 아빠 없는 코피노가 많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 종교적으로 카톨릭 국가라서 낙태도 불법이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나도 딱 한 번 동기들 등쌀에 못 이겨 클럽에 간 적이 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공간에 사람이 가득 차 있고, 음악 소리는 귀가 터져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다. 나는 알코올 쓰레기라서 술을 먹지 않으니 그 공간이 불편했다. 게다가 첫사랑과 결혼을 꿈꾸는 나로서는 클럽에서 특별한 목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 같이 갔지만, 결국 중간에 나 먼저 택시 타고 도망쳐왔다. 더 있다가는 출입통제 시간에 걸려 숙소에 들어와 편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필리핀에서 3개월은 영어 공부, 농구, 약간의 여행과 쇼핑이 전부였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3개월 후에 돈 주고 치른 공식 IELTS 시험 성적이 잘 나왔다. 알고 보니 그 어학원 졸업생 중에서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기네스에 내 이름을 등재 시키고 부푼 꿈을 꾸며 호주로 넘어갔다. 드디어 제대로 된 환경에서 영어를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설렘이 폭발했다.      


9월 말이라 호주는 슬슬 겨울이 끝나간다고 했다. 여름에서 갑자기 겨울을 맞이하는 상황이었다. 습하고 더운 날씨가 아닌 쾌적한 날씨도 기대됐다. 2천 개가 넘는 화산섬 중 한 지역에 있어서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먹지 않고, 깔끔한 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필리핀이 가격 면에서는 아주 좋은 세상이었지만, 생활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주는 가격 면에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곳이었다. 갑자기 세계 경제 상황이 변하면서 호주 환율이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 바로 옆자리에 홍콩 친구가 앉아 있었다. 케세이퍼시픽 항공이라 그런지 홍콩 사람이 많았다. 홍콩식의 독특한 악센트에 약간 호주식 악센트가 섞여서 처음에는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계속 대화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다. 호주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친구라 그런지 영어도 꽤 잘했다. 금세 친해져서 내리기 전에 전화번호를 받았다. 고맙게도 호주 생활 초기에는 친구가 별로 없어서 그 친구랑 종종 통화하곤 했다. 하지만 생활고가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여유가 없어서 더는 연락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잘 살려나 모르겠다.     


호주에 넘어갔을 때 불알친구는 이미 호주 생활 3년 차였다.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호주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호주 영어를 들었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아서 당황했다. 역시 예상대로 호주는 달랐다. 그동안 내가 들었던 미국식 영어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를 만나 기차를 타고 친구네 집으로 갔다. 호주에서는 지하철도 그냥 ‘train’이라고 불렀다. 신기했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놓고, 배고파서 바로 근처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두 번째로 신기한 건 호주에는 버거킹이 버거킹이 아니었다. 영국연방 국가라서 ‘king’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호주는 버거킹 대신에 ‘헝그리잭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메뉴는 거의 똑같았다. 한국에서는 호주 고기는 개차반인데, 현지에서 먹으니 햄버거 패티인데도 한국에서 먹는 햄버거 패티보다 더 맛있었다. 그렇게 호주에서의 첫 끼니였다. 지나고 보니 제대로 된 밥을 먹을 걸 하는 후회가 된다. 그렇게 대충 때운 끼니가 1년 반 동안 계속 이어질지는 몰랐으니까.     


 나는 친구가 구해놓은 빌라의 한 개 방을 쓰게 되었다. 아직 호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당분간은 신세를 질 생각이었다. 친구도 자기가 책임질 테니 일단 오라고 했기에 그 말을 철썩 믿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하마터면 20년 지기 친구를 일을 뻔한 사건이 생겼으니까.      


호주에 천만 원을 들고 와서 시작이 여유로웠지만, 대학원에 합격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대학교 성적도 좋았고, IELTS 점수도 충족되니 친구 말대로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발급받고 온 거라서 일하고 여행하고 그러는 게 목적이었는데, 학생 비자로 바뀌면서 일하는 것도 제약(일주일 20시간 이하)이 생기고 학교도 다녀야 하니 모든 게 달라진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학비를 내야 하는데 그 시점에 호주 환율이 1300원까지 올라갔다. 그럴 거면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는 건데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이미 엎어진 물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외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는 현지인보다 몇 배 더 비쌌다. 1학기 학비만 10,000달러였다. 내가 가진 돈을 다 바꿔도 채울 수가 없었다. 환율이 이래서 무섭다. 다행히도 친구가 빌려줘서 학비는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때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간신히 구해서 하고 있을 때였는데,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매니저님께 말씀드려서 1주일 치 돈을 미리 당겨 받았다. 간신히 그렇게 위기를 모면했으나 진짜 위기가 찾아왔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집 안에 친구가 여자친구랑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직 빈대 안 들어왔어. 조금 있으면 일 끝나고 오겠지. 괜찮아 더 통화해도 돼. 근데 얘는 몰라서 그런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방세를 안 내고 있다니까. 염치도 없지 참...”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통화 내용에 나오는 ‘빈대’는 나를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놓고 나한테 방세를 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몰랐다. 친구가 들어 오라서 해서 온 것이고, 방도 내어주니 당연히 나는 고마워했지 미안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문제가 발생한 것이니 해결해야 했다. 헛기침하며 인기척을 내며 집으로 들어왔다. 친구는 나를 보고 놀라더니 황급히 통화를 마쳤다.     


“그런 거였어?”

“뭐가?”

“미안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서 이제 알게 됐어.”

“아...”

“나 방세 내야 하는 거였지? 얼마야?”

“그게...”


친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니 나는 더 안달이 났다.


“괜찮으니까 말해줘. 그래야 나도 계속 있을 수 있지. 내가 잘 모르고 있어서 미안해. 진작 말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도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타이밍을 놓쳤네. 사실 너 오기 전에는 룸메이트를 구해서 반반 집세를 내고 있었거든. 그런데 너 온다고 해서 내보냈지. 그래서 내가 다 내고 있었는데...”

“그럼, 그렇게 말해줘야지. 나만 나쁜 놈 된 거잖아! 얼마 내야 해?”

“집세가 일주일에 320불이라서 반반하면 160불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는 전세라는 개념은 전혀 없었다. 전세는 전 세계에 한국만 있는 개념이라고 했다. 대부분 월세란다. 게다가 시내는 월세가 너무 비싸서 워킹홀리데이나 유학 온 사람들이 한 방에 2층 침대를 4개 놓고 같이 사용한다고 했다. 마치 닭장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심지어 거실에도 커튼을 쳐놓고 방을 내어주는데 그게 가장 싸서 110~120불 정도라고 했다. 아니면 거의 150불 내외라고 했다.      


친구네 집은 시내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다. 가격은 비슷하지만, 둘이서 한 집을 다 사용할 수 있으니 매우 쾌적한 환경이었다. 비행기를 처음 타본 나로서는 그리고 친구가 그냥 오라고 했기에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생활비를 보태는 수준에서 더 자주 장보고, 물건을 채워다 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찼을 것이다. 일주일에 160불씩 더 내야 했고, 그게 2~3달이 넘어가고 있었으니 부담이 되었을 수밖에. 빈대라고 불러도 뭐라 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어떻게 20년 지기 친구에게 ‘빈대’라니. 그것도 고작 몇 개월 안 사귄 여자친구한테 그렇게 별명을 붙여 부르다니. 너무 서운했다. 일단 그동안 밀린 방세를 갚겠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이 한계가 있으니 조금 기다려달라고 했다. 다행히 대학원에 합격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인을 대상으로 과외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현금으로 받으니 주 20시간 제한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해서 조금씩 돈을 갚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에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따로 나가 살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직접 보면서 방을 알아봤는데, 같은 가격으로 이렇게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을 바꾸어 서운한 마음은 버리고, 친구와 잘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친구도 내가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자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 상처는 아물었지만, 가끔 ‘빈대’라는 말을 떠올리면 가슴 한쪽 구석이 아프다. 역시 한번 난 상처는 자국이 남는 법. 지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호주에서의 대학원생으로서 삶은 피폐했다. 학교, 집, 아르바이트를 빼면 별것이 없었다. 방세도 내야 하고, 생활비도 있어야 하니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 돈이 많아서 도와주실 수 있다면, 공부만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현실이 피눈물 나도록 힘들었다. 안 그래도 현지 호주인들보다 영어가 서툴러서 과제를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과제 제출 날이 다가오면 밤새기 일쑤였다. 하버드생들이 새벽 4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의 삶에 녹아 들어왔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죽을 맛이었다.     


버는 돈은 한정적인데, 나가는 돈은 많으니 어쩔 수 없이 줄여야 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식비를 줄이는 일이었다. 그나마 영양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만만한 달걀을 잔뜩 사두는 일이었다. 하지만 배가 부르지는 않으니 저녁에는 매일 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밖에서 제대로 된 밥을 사 먹으면 최소 10불 정도가 되니 한 달만 해도 금세 식비가 올라간다. 그래서 아침에는 달걀 프라이에 밥, 점심에는 5불짜리 스시(김밥 모양), 저녁에는 1불짜리 봉지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이렇게 돈을 아껴서 주말에는 딱 한 번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이렇게 1년 반 정도 생활하니 신기하게도 10kg 가까이 살이 쪘다. 저녁에 라면에 밥을 말아 먹으니 살이 찔 수밖에. 하지만 영양이 부족한지 항상 눈 밑이 바르르 떨렸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병원에서 진료받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영양 불균형이었다. 특히 마그네슘이 부족해서 그런 증상이 계속되었던 거라고 했다.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게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라면을 끓였으니 라면 장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영양 채우려고 라면 1개에 달걀을 2개 넣어서 끓였던 방법이 면발을 쫄깃하게 하는 비결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라면은 무조건 라면 개수 +1로 달걀을 넣는다. 게다가 매주 구웠던 돼지고기 덕에 고기 굽기 장인이 되었다.    

  

아내가 나보다 요리를 엄청나게 잘하지만, 딱 2개만은 나에게 양보한다. 라면 끓이기와 고기 굽기다. 처가에서는 장인어른이 절대 고기 집게를 내어주시지는 않지만, 라면만은 사위 라면을 고집하신다. 영어 공부하러 호주에 유학 간 것이지만, 덤으로 라면 끓이기 장인이 되어 돌아온 나를 알아보신 것이다.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주가 생겨서 좋다.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잠시 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더 긴축해야 해서 달걀 없이 라면을 끓이곤 했다. 그때 그냥 라면을 끓였더니 면발이 맛이 없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공기에 면 치기를 해서 졸깃한 면발을 다시 완성했다. 공기에 면 치기는 물에서 면발을 건져 공기와 접촉할 수 있도록 막노동을 좀 해주면 된다. 궁금하다면 한번 시도해보시길.   



        


  

아르바이트 시간을 제외하고는 만날 공부만 했으니 성적이 잘 나올 수밖에. 나중에 졸업하고 메일을 하나 받았다. 상위 15% 안에 들면 주는 멤버십 가입 대상자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우수한 등위로 졸업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돈이 많아서 만날 연애하거나, 게임 하거나, 카지노에 가거나, 애니메이션 보며 공부는 뒷전이었던 유학생들이 졸업을 못 할까 전전긍긍하던 것과는 완전 달랐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헝그리 정신은 강했다. 그때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기에 지금도 어디에 내놓아도 굶어 죽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다.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호주 유학 생활에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원래 목적은 어학연수였다. 어학연수는 보통 영어 회화, 말하기에 초점을 둔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내 생활은 대학원 수업을 듣고, 원서 읽고, 과제로 에세이를 쓰는 데 초점을 둔 영어 공부였다. 전공 관련 주제로 대화를 하면 막힘 없이 유창하게 학문 용어를 사용해서 영어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활 영어 표현에 약하다. 구어체로 말하지 않고, 문어체로 자꾸 말하게 된다. 모순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호주식 억양이 남아 있어서 ‘호주 교포’라는 별명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호주 사람들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후 바로 한국에 적응했다.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호주식도, 미국식도 아닌 한국식 영어를 하는 것 같다. 차라리 아쉬운 대로 호주식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그게 더 영어를 잘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또한 한국에 와서는 취업 후에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영어 실력이 줄었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원리인 듯하다. 그때 그렇게 개고생해서 얻은 건 대학원 졸업장뿐이라니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또 후회스러운 것은 생활고에 시달려서 마지막 수업이 끝난 다음 날에 바로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그냥 조금만 더 참고 비자가 남아 있었으니 여행이라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중에 돈 벌어서 다녀와야지 생각했지만, 한국에서 10시간이나 걸리는 호주는 15년째 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역시 여행도 다 때가 있는 법. 이제는 애들이 좀 크면 돈도 좀 모아서 짧게 여행으로 다녀오는 수밖에 없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한 긴 여행은 불가능하니까.       


   



필리핀 남자는 만나지 말라는 말이 있다면, 호주에 다녀온 여자를 만나지 말라는 말도 있다. 호주에서는 여러 일이 있다고 한다. 특히 동거에 개방적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도 케바케다. 하지만 내가 봐도 주변에 동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쩌면 내가 보수적인 걸지도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처럼 외국인 여자친구라도 사귀었으면 영어 실력이 더 늘었을지 누가 알까. 실제 외국인 애인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영어가 금방 늘었다. 필리핀 룸메이트도 3개월 사이에 영어 실력이 꽤 늘어 있었다. 그것만 봐도 효과는 만점인 듯하다.     


그 친구는 미국에 어학연수 1년, 나는 호주에 유학 1년 반 이렇게 생활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같이 첫 토익 시험을 봤다. 그 친구는 900점을 그냥 넘겼고, 나는 5점이 부족해서 900점이 안 나왔다. 할머니가 준 1억으로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금수저와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아르바이트하거나 책만 보던 흙수저의 토익 점수마저 수저대로 결과를 받았다. 게다가 그 친구는 바로 취업했다. 하지만 나는 토익 고득점이 나올 때까지 취업이 힘들었다. 불공평한 세상에 땅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나는 3개월 동안 토익 문제 2만 개를 풀었다. 그러자 겨우 거의 만점 가깝게 토익 점수가 나왔다. 토익 점수가 올라가니 그제야 서류가 통과되기 시작했다. 운칠기삼이라고 하드만, 타고난 운이 아무래도 7이니까 기를 쓰고 노력해봤자 3이 7을 이길 수 없나 보다. 누군가는 80%만 노력해도 100% 결과가 나오고, 누군가는 120%를 노력해도 100%가 안 나올 수 있다. 이건 타고난 운이니 빨리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200% 노력해서 150% 나오게 하면 결국엔 그들을 이길 수 있을 테니까.      


         

(엔딩곡)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거위의 꿈

- 1997년 5월에 발매된 이적&김동률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의 첫 번째 앨범 ‘Carnival’, 10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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