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이야기
2022년 대한민국 사교육비 총액 26조원,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를 봤다. 학생 수는 줄었지만, 오히려 사교육비 지출은 10% 이상 늘었다고 한다. 10명 중 8명이 사교육을 받고 있고, 일주일 평균 7시간이 넘는단다. 한 아이당 한 달 평균 사교육비는 40~50만원 선이다. 아이가 둘이라면 100만 원은 금방이다. 만일 월급 200~300만 원 받는 외벌이라면 사교육비 지출은 너무나 출혈이 크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고, 출산율 저하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나도 아이 둘을 키우면서 점점 사교육비 지출이 늘어나고 있는 걸 느낀다. 첫째는 피아노와 미술, 둘째는 태권도를 다닌다. 아이가 어려서 국,영,수는 시키지도 않는데도 매달 수십만 원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심지어 어느 곳은 현금으로만 받아서 세금 공제도 받지 못한다. 탈세니까 신고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아이가 만족해서 다니고 있는데 누가 그렇게 하랴. 오히려 아쉬운 건 우리니까 어쩔 수 없다.
사실상 아파트 대출금과 사교육비만 해도 거의 월급 절반 이상이다. 거기에 생활비에 고정 지출비를 합하면 사실상 월급으로는 충당이 되지 않는다. 요새는 그런 말이 있다. 애가 둘이면 능력자라고... 경제적으로 힘든 면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그렇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2023년부터 두 명 이상 자녀도 다자녀 가구로 인정하는 분위기고, 실제 법적 장치도 점차 마련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혜택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나.
지금은 어떻게 하든 버티고 있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아이가 무엇 하나 더 배우려 하면 사교육비 지출이 더 커질 테니까. 사교육비 걱정 중인데, 처가 어른들한테 지령이 떨어졌다. 첫째가 내년에 학교에 들어가니 한글을 꼭 뗄 수 있도록 하라는 것. 사실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은 방관했다. 자연스럽게 관심 가질 때 가르치면 어떨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붙잡고 앉아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이상 그게 그냥 되는 건 아니더라. 막상 초등학교 입학이 얼마 남지 않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릴 때 부모님께 무언가를 배울 때가 가장 괴로웠다. 부모님은 기대치가 높고, 나는 어리니까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고, 결국엔 큰 소리가 난다. 교육적으로 최악이다. 원래 가족끼리는 가르치다가 상도 치를 수 있다고. 실제 부부가 자동차 도로 주행 연수시켜주다가 이혼한 사례도 있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간에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는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 고통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 둘 모르는 것 가져와서 물어보면 친절히 알려줄 수는 있지만, 각 잡고 가르치는 건 싫다. 직장에서 교육을 관장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으니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그맨도 집에서는 조용하다는 것처럼, 나도 집에서는 교육을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가르치다가 아이랑 관계를 망치기 싫은 것도 한몫한다. 내가 생각보다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라서 참을 수는 있겠지만, 화병이 날까 봐 못하겠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 끝에 자본주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내가 가르치지 못하면 남이자 전문가가 가르치게 하면 되니까. 그게 쉽고 빠른 길이다.
물론 아이 혼자서 한글을 뗄 수도 있다. 어떤 집 아이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따로 공부하지 않고 한글을 뗐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 그냥 한글을 뗐기에 꼭 한글 교육을 꼭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처가 어른들의 노심초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글 익히게 하려고 했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알고 보니 다 사정이 있었다. 바로 아내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떼지 않았다고 했다. 처가 어른들도 나와 같은 교육적 신념이 있었다고 했다. 한글은 알아서 스스로 떼는 거라고. 그런데 막상 한글을 모르고 학교에 보냈더니 멍하니 창문만 쳐다보다가 왔단다. 학교에 공부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가방만 메고 왔다 갔다만 한 꼴이라고...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꼭 한글을 떼는 데 중요하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궁금한 나머지 실제 주변에 아는 초등교사가 있어서 한글을 안 떼고 학교에 가면 어떤지 물어봤다. 한글을 쓸 줄 몰라도 읽을 수 있으면 괜찮은데, 한글을 전혀 모르면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하고 낙오한다고 했다. 심하면 학교 가는 걸 힘들어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현직에 있는 전문가의 말을 들으니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겠구나.
차마 한글 때문에 학원에 보내기는 그래서 학습지를 알아봤다. 나도 아내도 어릴 때 했던 눈높이도 그대로 있고 구몬(빨간펜)이랑 재능교육도 있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났는데도 그대로라니 신기했다. 아 물론 나 때는(라떼는) 처음에는 눈높이는 ‘공문 수학’으로 불렀다. 나중에 대교의 눈높이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는 가장 익숙한 눈높이부터 가서 상담을 받았다. 따로 아이 테스트를 하지는 못했지만, 한글을 빨리 떼고 싶다고 했다. 7살이면 주 4회 한글 교육을 하면 두 달이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하지만 교육비가 문제였다. 주 1회라면 부담이 되지 않지만, 4회니까 4배나 되었다. 거의 보통의 다른 학원 교육비 이상의 비용이었다. 이대로 진행한다면, 우리 집도 한 아이당 평균 30만 원대 사교육비 지출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평균 사교육비에 매우 가까워지는 것이다. 갑자기 지출을 늘리려니 부담이 되었다.
혹시 몰라 재능교육도 알아보았다. 여기는 조금 여유로울 때 방문해서 다행히도 첫째의 현재 한글 실력을 간단히 테스트해볼 수 있었다. 테스트 결과 굳이 주 4회까지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몇 개월 동안 매주 1회씩 공부하면, 학교 가기 전에는 읽는 거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마침 우리가 원하는 시간대에 붐비지도 않고, 주 1회만 하면 된다고 하니 첫째에게는 여기가 딱 알맞았다.
하지만 한글에 관심을 보이는 두 살 어린 둘째를 나 몰라라 하고 둘 수 없었다. 마침 눈높이에 놀이 식으로 한글을 배우는 게 있길래 그걸 신청하기로 했다. 어릴 때는 놀이로 배우는 게 나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주 4회 진행해서 나갈 사교육비의 절반으로 두 명을 배우게 할 수 있으니 만족스러웠다. 물론 추가 지출에 대한 부담감은 있을 수밖에 없다. 기회비용은 언제나 있는 법. 다른 걸 줄이면 되니까 괜찮다.
아이 둘 부모가 되니까 분명히 달라진 점이 있다. 길 가다가 이쁜 아이 옷을 발견하면 지출을 하면서도 막상 우리를 위한 소비는 줄었다. 한정된 예산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도 추석이라 명절 보너스로 아이들 새 옷은 사 오면서 막상 본인의 옷은 사 오지 않은 아내를 보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우리 것 안 사고 아끼면, 애들 고기라도 한 번 더 먹일 수 있잖아요.”
처음에 아이를 낳았어도 아내가 출산 전에 일해서 모아둔 돈으로 우리 생활은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돈을 다 쓰고 나 혼자 벌게 되니 우리는 긴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그 생활이 2년이 넘어서자 나도 아내도 그 생활에 적응한 듯하다. 아끼는 데 더 익숙해졌으니까.
현시대에 월급쟁이로 게다가 외벌이로 살아가면서 생활을 유지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34평 넓은 새 아파트에 살면서, 차도 있고, 애도 둘도 있으니 겉보기에는 여유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마치 백조가 물 위에서는 우아해도 발을 수백 번 발을 굴러야 떠 있는 것과 같다.
원래 편의를 위해 기존 차를 처분하지 않고 두 대를 운영했었다가 긴축할 때 다 줄였다. 아파트 대출금 때문에 생활이 힘든 거니까 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갈까도 여러 번 생각했었다. 사실은 지금도 몇 번이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집이 오히려 미래 가치가 있으니 힘들어도 버티는 게 돈 버는 거라는 걸 알기에 실천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은 선택권은 두 개다. 다른 지출을 줄이거나 더 벌어서 지출을 메꾸는 것이다. 그게 유일한 생존법이고, 나는 두 개를 모두 실천하고 있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도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수십 년 하면서 우리를 키웠다. 사교육비는 어쩔 수 없는 기회비용이고, 상황에 따라 지출 범위도 달라지는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때에 따라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어머니가 일하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버지 혼자 버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받았던 사교육은 고작 초등 저학년 때 눈높이 학습지랑 피아노가 전부였다. 그리고 초등 고학년 때 서예, 태권도를 배운 게 전부다. 따로 주요 과목을 배우는 학원을 간 적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사연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가 어린 시절 영재였다는 것, 둘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보면 믿을 수 없지만, 내가 아주 어릴 때 나는 영재였다고 한다. 한글도 빨리 떼고, 구구단도 3살에 다 외우고, 시계도 5살에 볼 줄 알았다고 한다. 이미 몇 년씩은 앞선 아이였다. 주변에서도 영특하다고 영재 교육하라고 아우성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그럴 수 없었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선조 중에 천재가 있었는데 10대에 단명했다고 한다. 그냥 평범하게 자라는 게 더 좋은 거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는데 어느 부모가 아이가 빨리 죽는다는데 그걸 그냥 둘까.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만일 내가 영재교육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평범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오히려 나는 공부 쪽으로 지원을 받지 않고, 방치된 채로 살아왔다. 그래도 어린 시절 영특함 때문인지 받아쓰기도 항상 100점을 받았다. 오히려 90점 받는 날이 이상한 날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이미 다른 학년 때 하는 구구단과 시계도 볼 줄 아니까 초등학교 때는 특별히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뒤처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한 형성평가에서 모든 과목에서 내가 11개를 틀린 적이 있었다. 부모님은 그때 충격이 컸다고 했다. 분명히 영재였는데 얘가 어떻게 된 걸까. 속상한 마음에 그날 틀린 문제 1개당 10대씩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셨다. 두 다리는 시커멓게 멍들고 부풀어 올라 상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도 연출됐다. 내가 울면서 잠들었을 때 어머니가 연고를 가져와 바르며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때 그렇게 심하게 혼나고 맞은 게 충격이었는지 그 후로 다시 공부를 잘했다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부모님의 의도대로 평촌 지역에 맹모삼천지교를 하러 이사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 왔으니 딱 중학교 진학을 고려한 것이다. 사실 전에 살던 동네는 서울이지만, 변두리였고 중학교 학군이 좋지 않았다. 그 동네에서 패싸움으로 유명한 중학교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런 상황은 인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옮긴 게 아닌가 싶다. 안타깝지만 내가 다녔던 중학교도 일진이 있었다. 평촌 지역에서 싸움으로도 유명한 학교였다. 물론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서울 변두리만큼 심한 건 아니었다.
중1 첫 시험 성적을 받은 날이었다. 나의 첫 성적에 아버지가 엄청나게 실망하셨다. 반에서는 50명 중에 10등 남짓, 전교에서는 100등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그랬다면, 아마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크게 혼났다. 나도 가출을 혹은 자살을 처음으로 고민해볼 정도로 그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날이었다.
급한 마음에 부모님은 처음으로 나를 주요 과목을 가르치는 학원에 보냈다. 당일 상담을 하고, 시험 결과에 따라 중간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런 사교육을 받지 않았던 나는 어느 순간 영재에 아주 평범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공부를 딱히 잘하지도 않는, 그렇다고 못 하지도 않는 중간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는 지옥 같았다. 원래 기대치가 높으면, 그만큼 실망도 크기에 그렇다.
부정적인 상황에 놓였지만, 다행히도 나는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켰다. 공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가 충격 요법으로 인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친놈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막상 해보니 공부도 재미있었다. 특히 학원에서 매달 형성평가를 보고 더 높은 반으로 승급할 수 있어서 동기 부여가 분명했다. 나도 모르는 강한 승부욕이 있었다.
그렇게 학원에서도 점점 높은 반으로 올라 최상급 반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도 시험 성적은 상승 곡선을 그렸다. 덕분에 중3 때는 반에서 1등을 했다. 그 결과 부모님의 희망 사항대로 경기 4대 명문고 중 한 군데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시기에 사교육을 시작한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 무너지고 말았다. 뱀의 머리가 되거나 용의 꼬리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고등학교 1학년 첫 성적을 받고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부모님께 도저히 성적표를 보여드릴 수 없었다. 열심히 공부를 안 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절대평가라서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닌데, 등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 위치가 어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학교가 멀어서 학원까지 다니는 건 체력적으로 무리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학원을 안 다닌 게 화근이었다. 게다가 그때 교육 정책을 그대로 믿고 따랐던 바보 같은 나의 잘못도 있다.
일명 이해찬 1세대라고 해서 ‘한 가지 특기만 있으면 대학에 간다’는 슬로건 아래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필수였던 자율학습도 말 그대로 자율적인 학습이 되어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자 나는 방황을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건전하게. 비행 청소년이 되지는 못했다. 대신 매일 밤 학교 근처를 배회하며 사색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이지만 공부는 안 하고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 읽어보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내용이지만, 그때는 틈틈이 시를 적기도 했다. 그래서 내 별명은 문학 소년이었다.
성적만 잘 안 나왔지, 수업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성실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임포스터(가면)을 쓰고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심지어 필기도 정말 열심히 해서 반에서 1등 하는 친구가 내 공책을 빌려 가기도 했다. 또한 다음 시험에서는 내가 높은 성적이 나올 거라고 다른 친구들이 똑같이 말했다. 하지만 낮에는 성실맨으로 밤에는 방황맨으로 살아갔으니 결과가 안 좋을 수밖에.
고2 때 재기를 꿈꿨으나 이미 나보다 출발선을 넘어 앞서가는 다른 공부 괴물 친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시작해서 선행이 잘 되어 있었고, 시험에 특화된 공부법을 터득한 후였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때 깨작거리며 학원에 다닌 진골도 성골도 아닌 6두품도 안 되는 사교육 경험자였다. 명문대에 간 친구들은 보면 거의 다 이미 입학할 때부터 이과에 가서나 배우는 수학II도 끝내고, 토익도 만점 받고 공부로 엄청난 괴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머지 고2 겨울방학 때부터 부모님은 나를 사교육 세계로 억지로 다시 밀어 넣으셨다. 심지어 퇴직금 일부를 미리 받아서 많은 돈을 나에게 투자했다. 초반에는 효과가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부분 정시로 대학을 갔기 때문에 수능 성적이 중요했다. 역시 투자는 유의미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에서 갭을 극복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SKY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은 없고, 더 올라갈 수는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2001학년도 수능이 물수능이라 모의고사가 쉬운 것도 사교육 효능이 한몫했다. 비슷한 문제를 많이 풀었더니 모의고사에 비슷한 문제가 나오면 쉽게 맞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수가 금방 오른 것도 있다.
고3 내내 하교 후에는 학원에 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적이 올라간 후에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문제는 많이 풀었지만, 어려운 문제를 정복할 시간은 부족했다. 마음만 급했다. 어느새 수능 당일이 되었고, 작년에 선배들이 물을 먹었다면 우리는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불타 죽을 것 같았다. 400점 만점 가까이 받던 친구들도 50점 넘게 떨어지면서 나락으로 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 같이 떨어지니까 340점대가 연대, 고대에 진학하는 걸 봤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지옥으로 떨어졌다. 정말 어려웠던 1교시 언어영역이 끝나고 시험장 옥상에 올라가 투신하여 떨어지지 않고, 집에 가는 길에 전철로 뛰어들어 떨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 전국 수험생은 성적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뛰어내렸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으니까. 그깟 대학 시험이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도저히 내 점수로는 갈 대학이 없는 것 같았다. 당연히 어딘가 있겠지만,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부딪혀서 이길 수 없으니 회피할 수밖에. 곧바로 부모님은 나를 취업 전선으로 보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전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향했다. 7시부터 꽉 찬 강의실에 책상 하나에 3명이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앉아서 1타 강사의 강의를 하루 내내 들었다. 대학에 못 갈 거면 공무원이나 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부모님의 생각이었다.
수업은 듣고 있지만, 내 마음은 딴 데 있었다. 멋진 캠퍼스 생활을 하는 다른 친구들 모습이 아른거렸다. 반면에 갓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다. 마치 거울에 미친 내 모습은 지옥에 끌려간 죽은 사람과 같았다.
‘나는 앞으로 캠퍼스 낭만은 없겠구나...’
억울하면서도 괴롭고,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일주일 만에 포기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그동안 나를 위해 사교육비로 이미 수천만 원을 쓴 부모님께 손을 더 벌리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건 진짜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명을 거슬렀다. 이제 나는 성인이니까. 내가 스스로 책임지기도 결심했다.
“저...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대학생이 되고 싶어요. 돈은 제가 알아서 벌 테니 허락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나는 그렇게 재수를 시작했다. 사교육비 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명문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기가 많아서 여러 명 과외를 했다. 덕분에 재수 학원비는 충분히 벌 수 있었다. 게다가 돈이 남아서 인터넷 강의도 결제할 수 있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영접했던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강사를 나는 그제야 온라인으로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발 주자로 나섰던 이투스 강의도 신청해서 들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동안 굶주렸던 사교육을 있는 대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내 성적도 휘몰아치듯이 올라갔다. 우리가 2002년 월드컵 때 4강에 올랐던 것처럼 내 성적이 오르는 기세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거기까지였다. 나의 목표설정이 잘못되었기에.
나는 원래 문과였다. 하지만 재수할 때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한의사가 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전과했다. 재수 학원도 이과로 다녔다. 인터넷 강의도 이과 과목을 주야장천 신청해서 들었다. 3월, 4월, 5월 모의고사 성적이 가파르게 올라 수학 빼고 다른 과목은 거의 만점 가까이 나왔다. 수학만 잡는다면 한의대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기하와 벡터 개념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그때가 6월이었다. 2002년 대한민국은 붉은 악마의 응원으로 가득했다. 도저히 수학 성적이 오르지 않자 나는 또 피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1 때 성적이 나오지 않아 방황했던 것처럼.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길거리로 나가 응원했다. 모르던 사람도 골이 들어가면 하나가 되는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역전승을 거뒀던 16강 이탈리아전 때는 정말 모르는 사람을 부둥켜안고 울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전 국민이 하나 되는 한 달이 쏜 화살처럼 지나갔다. 순식간이었다. 나의 공부 루틴이 다 깨졌다. 역시나 내 성적도 다 부수어졌다. 모든 희망이 산산 조각났다. 한의대는커녕 인서울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과로 바꾼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차라리 문과로 시험을 준비했으면 작년보다는 훨씬 나아졌을 텐데 한순간의 선택이 후회로 바뀌었다.
재수 학원에 다니면 왔다 갔다 왕복 시간에 필요하지 않은 수업도 들어야 하니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끊으면 과외도 줄여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모든 강의는 온라인으로 바꾸었다. 빠르게 속도를 바꾸어 들을 수도 있고, 돌려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사교육비 절감에 따라 여러 면으로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성적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결국에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과로 시험을 신청했고, 수능 성적은 작년보다 더 처참했다. 내 인생도 그렇게 다 무너져내렸다. 캠퍼스의 꿈은 그렇게 물 건너갔다.
고1 때 나처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방황하던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게다가 한 친구는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가정사로 인해 방황하곤 했다. 둘 다 형편도 넉넉한 게 아니라 사교육은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예비 고3부터 부모님의 지원으로 사교육에 올인했지만, 그 친구는 오롯이 ebs 무료강의와 자기 주도 학습으로 꾸준하게 성적을 끌어올렸다. 결국에 그 친구는 인간 승리하며 SKY에 입성했다. 꼭 사교육에 투자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다.
실제 수험생들은 대략 10% 이내 들어가야만 우리가 아는 주요 대학에 진학한다. 일명 입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오면 상관없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그 돈을 모아서 주식에 넣어주거나, 세금 절약 가능한 범위 내에서 양도하여 시드(seeds)로 주는 건 어떨까? 나중에 아이가 성인이 되어 무엇을 하든 오히려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실제 한 아이에게 한 달에 50만 원씩 10년 동안 투자하면 6천만 원이다. 증여세 공제가 10년간 5천만 원이니 세금 공제 선에서 증여하면 어떨까? 게다가 이제는 혼인할 때 자녀에게 1인당 최대 1억 5천만 원까지 가능하니까 시기를 잘 고려하여 주는 건 어떨까? 사교육만이 정답이 아니라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영어 유치원 월 교육비가 약 150만 원 내외라고 한다. 이 정도면 누군가의 월급일 수도 있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다. 그래서 지인 중에는 아이 학원비 때문에 투잡을 뛴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리운전을 많이 했는데, 요새는 배달 서비스가 인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부모 등골브레이커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는가. 더욱 출산이 꺼려지는 이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주변에서 하니까 우리 아이는 혹시 뒤처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에 너도나도 다 따라 하게 된다.
심지어 아이 교육을 위해 지인 한 명은 모든 재산을 털어서 강남에 입성했다. 도저히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 월세로 산다. 그래도 좋단다. 아이가 배우는 환경이 너무 좋단다.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끼리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는 환경이란다. 따로 학원에 가지 않아도 알아서 영어를 하게 된다나 뭐라나. 학원비 대신 월세로 사교육비를 내는 셈이다. 참 대단하다. 우리도 부모님처럼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게 맞을까?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할 텐데. 과연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여러 마음이 든다.
(엔딩곡)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볼까. 오빤 강남스타일. 강남스타일.”
*강남스타일
- 2012년 7월에 발매된 가수 싸이(PSY)의 여섯 번째 앨범 ‘싸이6甲 Part 1’, 3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