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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Sep 27. 2023

6화. 자본주의

소설 같은 이야기



우리 아버지는 삼형제 중 장남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태어났다. 전쟁통이 끝난 후 베이비붐 세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먹을 것이 귀했다.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생전에 6.25 전쟁에 부사관으로 참여하셔서, 전쟁 후에도 직업 군인이었기에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그때는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할아버지는 공군 부사관으로 근무하며 1~2년마다 이사를 수없이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여러 번이나 옮겼다. 전국 팔도를 거의 다 돌았을 정도라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마지막으로 가서 정착한 도시가 바로 강원도 강릉이었다. 강릉에서 근무하시던 할아버지는 퇴직금을 더 준다는 말에 군 생활을 청산하고 덜컥 세차장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군대에서만 살아왔던 할아버지한테는 군 밖의 사회는 6.25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혹독했다. 안타깝게도 세차장을 운영하다가 사기를 당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나마 택시 사업이 남아 있었으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그것도 벌이가 변변치 않았다. 결국에 할아버지는 흰 수건을 내던지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할아버지 퇴직금은 게눈감추듯 사라졌다.     


생활력이 강한 할머니가 노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시장이며 가게며 돌아다니며 일수를 돌며 곗돈을 모았다가 챙겨주는 역할을 했다. 하릴없이 할머니의 희생으로 삼형제는 간신히 살아갈 수 있었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무능한 아버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공군 간부 출신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집을 ‘공군 집’이라고 불렀다.      





우리 어머니는 강원도 고성 출신이다. 오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머슴을 두 명이나 부릴 정도로 지역에서는 유지 집안이었다. 게다가 부잣집 막내딸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으랴. 1960년대 흑백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1970년대 컬러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동네에 TV가 어머니 집 1대뿐이었다고 한다. 국가 경기라도 있는 날에는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였다고 한다.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물질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80년대 시대적 배경에 맞게 중매로 결혼했다. 아버지 댁 뒷집에 사는 ‘뻐꾸기 집’ 아주머니가 중매를 섰다고 한다. 강릉에 둘째 이모가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강릉에 놀러 온 우리 어머니를 보고 좋은 신랑감이 있다고 해서 성사된 중매였다. 아무래도 그 시절 거인국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 시점에는 다행히 할아버지가 세차장도 운영하고, 택시도 돌리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보일 때였다. 남자가 인물도 훤칠하고, 집안도 괜찮게 살아 보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네 집도 부유한 집이었으니 남자네 집에서도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 직후에 아버지 집이 기울면서 이 결혼은 사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뱃속에는 내가 생겼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해군 장교로 임관했지만, 다시 병으로 남은 군 생활하러 갔다. 그때는 해군 장교 중에 기관사로 근무하면서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을 때였다. 1:1 매칭이 되는 건 아니지만, 방위 산업체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혹은 의사들이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군의관이나 기관사나 둘 다 장교가 하는 거니까 오히려 후자에 가까우려나...     


어쨌든 아버지의 선택은 멋진 장교로서의 삶이 아닌 외화벌이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배를 타는 일이었다. 사실 시작 점부터가 다 ‘돈’ 때문이었다. 공군 간부라고 해도 월급은 쥐꼬리만 했기에 삼형제는 넉넉하게 살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삼형제 모두 강릉에서 명문중학교와 명문고 코스를 밟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도 있었고, 심지어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할 정도였다고 한다. 강릉의 경포중학교, 강릉고등학교 코스를 밟으면 명문대 진학은 당연한 시대였기에 그랬다. 그래서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며 추운 겨울날 학교 정문에 엿을 붙여 놓고 엄마들 수백 명이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아버지 삼형제는 그럴 필요도 없이 중고등학교 시험을 모두 한 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대학에는 모두 ‘돈’ 때문에 명문 사립대학에 가지 않고, 모두 국립대학에만 지원했다. 우리 아버지도 일부러 돈 많이 벌 수 있는 부산 해양대에 지원했다. 그런데 필기시험은 합격하고, 엉뚱하게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안 좋아 불합격했다. 1년 더 준비해서 다음 해에 안전하게 조금 기준이 낮은 수산대에 들어갔다. 어차피 둘 다 국립대고 졸업 후 진로를 같으니까...     


하지만 순간의 선택이 우리 인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는 기계 관련 전공 공부와 배 타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돈을 그렇게 많이 주는 대도 중간에 그만두었을까? 다시 군대에 가야 하는 데도 말이다. 약간은 군경력으로 인정되어 복무 기간이 줄었지만, 장교에서 병으로 다시 군에 갔으니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구타가 심했던 시절이라 매일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가정도 있으니 나름 봐준 것이 때릴 때 망을 보는 일이었다고...     


아버지도 고생이었지만, 시댁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임신했을 때는 애가 잘못되면 안 되니 시어머니가 그렇게 잘해줬단다. 게다가 아들이라고 하니 더 좋아했고, 우리 아버지가 배 타고 번 외화벌이 월급이 일반인의 2~3배는 되었기에 살림도 나름 괜찮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무렵 아버지는 배 타는 일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 당연히 돈줄도 자연스럽게 끊겨버린 셈이었다.      


과거에는 여자를 잘못들이면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시아버지는 뭐라 안 하는데, 시어머니는 사정이 어려워지자 며느리를 쥐 잡듯이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하긴 시아버지도 마누라한테 매일 구박을 받았으니 같은 처지니까 뭐라 말할 수 있나. 할머니는 집에 있는 사람에게 별일도 아닌 일도 트집 잡는 일이 일쑤였다. 몽둥이로 때리지만 않았을 뿐, 말로 사람을 죽도록 팬 것만 같았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역시 ‘돈’ 깡패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면 마음도 여유롭고, 부족하면 마음이 피폐해지나 보다.  

   

하루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어머니는 탈출을 시도했다. 얼마 없는 옷가지를 싸서 집을 나서려는데 낮잠에서 깨어난 갓난아기가 방긋방긋 웃으며 엄마를 사랑스럽게 쳐다봤다고 한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아기를 안고 펑펑 울며 미안하다고 내내 말했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는 그때 이야기를 하시며 한탄한다.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는데 아쉽다고... 특히 내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면, 종종 그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제대했다. 어머니도 한 가닥 희망을 꿈꿨다. 분가를 결심했다. 그리곤 겁 없이 바로 상경했다. 직업도 없었지만, 도저히 이 집에서 더는 할머니와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매일 구박받으며 살고 있겠는가. 백수 아들네가 매일 쌀을 축내니 할머니도 아들네 분가를 반겼다. 다행히 아버지가 용돈으로 모아둔 돈이 조금 있어서 서울 후암동 언덕배기에 있는 집에 전세를 얻었다. 남산 바로 밑 99계단이 보이는 집이었다.      


허름하지만 세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했다. 가진 것은 없어도 알뜰하게 살아가며 행복했다. 취업 시험을 준비하던 아버지는 몇 개월 만에 여러 공공 기관에 붙어서 골라서 들어갔다. 심지어 한 군데는 전국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제 창창한 미래만 남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그리 창창한 미래는 아니었다. 월급쟁이가 환골탈태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으니까...     


몇 년 그곳에 살다가 전세를 올려줄 때가 왔다. 네 식구 살아갈 생활비로도 빠듯했기에 여력이 없을 때였다.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기저귀 값, 분유 값으로 더욱 힘들 때였다. 아들에게 간식 사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네에 친구가 먹다가 흘린 과자를 주워 먹기도 했었다. 너무 먹고 싶어서 어린 마음에 더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몰랐다. 부모님은 그걸 보시고 많이 마음 아파하셨다.     


결국에 우리는 서울이기는 했지만 조금 더 변두리로 이사 갔다. 하지만 교육 환경은 별로 좋지 못했다. 부모님도 알고 계셨지만, 경제적으로 여건이 안 되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차곡차곡 저축한 끝에 청약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는 경기도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었다. 분당 신도시, 평촌 신도시, 산본 신도시, 일산 신도시 등 갈 수 있는 곳이 많았다.      


부모님은 고민 끝에 평촌 신도시를 선택했다. 청약을 넣었고, 당첨되어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다행히 그때 아파트가 몇 달 간격으로 계속 올라올 때라서 물량은 넘쳐흘렀다. 지금과 비교하면 현재는 사막에 오아시스 발견하듯이 청약을 넣어야 한다면 그때는 옹달샘이 마르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모님은 맹모삼천지교를 외치시며 드디어 자녀 교육이 나아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사실 그랬다. 평촌은 지금도 학원가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시절에는 외고, 과학고, 자사고를 이길 정도로 막강한 경기 4대 명문고가 유명했다. 안양에는 안양고, 분당에는 서현고, 일산에는 백석고, 부천에는 부천고가 있었다. 1년에 서울대를 50명 넘게 보내는 명문 중 명문이었다. 내심 부모님은 내가 안양고에 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강릉고 이야기를 그렇게 하면서 명문고에 가는 게 얼마나 좋은지 찬양했기에...     


HOT, SES, 핑클, 젝스키스, 유승준 등 아주 핫한 K-pop 스타가 즐비했던 중학교 시절에 내 성적은 서서히 올랐다. 중3 때는 드디어 반에서 1등을 하게 되었고, 결국 안양고에 진학했다. 평촌으로 터를 옮기며 시도했던 부모님의 맹모삼천지교가 성공한 셈이었다. 아파트값도 같이 빨리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때는 상승세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첫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할 때가 2002년 월드컵 때였다. 아직 동생이 중학생이라서 입시가 남았지만, 비평준화 지역에서 평준화 지역으로 바뀌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는 시험 봐서 고등학교를 선택할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는 변화가 있었다. 어머니가 우연히 경기 남부 지역에 새로 지은 큰 평수의 아파트를 보고 오셔서는 아직 분양 미달이라고 아버지와 상의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우리는 바로 이사했다. 19평 아파트에 살면서 방이 하나 부족해서 항상 불편했는데, 33평으로 이사하니까 각자 방이 생겨서 천국 같았다. 게다가 같은 값으로 더 큰 집으로 갈 수 있으니 행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원리를 몰랐던 우리는 1년 후에 그리고 3년 후에 두 번씩이나 땅을 치고 후회했다. 1년 후에는 집값이 2배나 올랐고, 3년 후에는 4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 간 집은 변동이 없었다. 역시 모든 일은 신중하게 고민한 후에 선택해야 한다. 아니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니까.   

  

우리 부모님은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부동산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재테크 문외한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자율 높은 적금이나 예금 드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주식을 하면 패가망신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낮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때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더 심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것도 아니라서 정말 관심이 많거나 하지 않는 이상 부동산 관련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2000년대 초니까 전화기 모뎀으로 하는 PC 통신에서 이제 막 광선 랜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이 유명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인터넷으로 사랑 이야기를 전하는 한석규, 전도연 주연 영화 《접속》과 이정재 전지현 주연 《시월애》 같은 영화가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부모님은 평생 아파트 대출 이자가 갚으며 살다가 퇴직 후에는 여력이 안 되어 다시 강릉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국민연금으로는 생활비 정도밖에 나오지 않으니 수도권에서 아파트 생활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생각해보면 명의만 우리 집이었지 결국 은행에 월세 내고 살다가 끝난 꼴이었다. 평촌 집을 안 팔고 계속 갖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불킥을 하며 속상함을 표출한다. 하지만 지난 일은 되돌아오지 않으니 후회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맞다.     


나는 부모님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은행에 빚을 내고 사는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난은 돈이 없어서 대물림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난을 대물림하는 이유라 했다. 나도 부모님을 보고 자랐기에 자본주의 원리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오히려 은행 빚을 내면 평생 은행의 노예가 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내 생각이 들렸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레버리지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버는 것이니까. (EBS 자본주의 제작팀이 출간한 ‘자본주의’ 책 첫 번째 파트 내용 꼭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혹은 TV에서 방영했던 녹화본 유튜브 영상을 봐도 좋다.)     


한가지 잘못이 있었다면, 우리 부모님은 노른자 땅에서 오히려 밖으로 나간 것이 문제였다. 노른자 땅은 집값이 오르면 더 오르지 떨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능력이 된다면 오히려 적절한 시기를 잘 타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게 맞다. 특히 도시 내핵으로 갈수록 집값은 더 높으니까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맞다. 외국의 큰 도시를 가봐도 집값 격차가 어마어마하다. 선진국들은 우리의 몇십 년 앞선 상황을 보여주니 우리나라의 서울 집값 중 노른자 핵 지역은 나중에는 3대가 돈을 모아도 발조차 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민이라면 절대 집을 살 수 없다. 심지어 수도권에 있는 집을 사는 것조차 어렵다.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1억이 아니라 그 이상이니까. 누가 사회 초년생이 그만한 집을 구할 능력이나 될까? 1년에 악착같이 모아서 2천만 원 정도를 저축한다고 해도 10년을 모아야 2억이 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은행 대출받아서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할만한 지역에 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 준비해서 아무리 빨라도 20대 중후반부터 일을 시작했다면, 30대 중후반이나 되어야 이제 좀 집을 구해볼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 결혼을 다들 안 하려고 하지. 그리고 1년에 저축으로 2천만 원 모으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부모님 집에서 계속 빌붙어 살면서 캥거루족으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말이다. 결혼이 늦어지는 이유도, 출산하지 않는 이유도 모두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나 집값이 오를 때로 오른 이 시대에 사는 청년들에게는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처가 어른들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결혼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다. 평생 솔로로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아이 둘 아빠라서 때로는 혼자가 더 좋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정을 이룬 게 다행이고 감사하다. 처가살이였어도 캥거루족이 되어 내 집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니까. 장모님이 좋은 꿈을 꾸고 나에게 팔았기에 나는 정말 거품으로 치솟은 부동산 집값의 막차를 타고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었다.      


물론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은행 대출로 얻은 집이다. 앞으로 30년 가까이 원금과 이자를 갚으며 살아야 한다. 도저히 외벌이 월급쟁이로 네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다. 내가 N잡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 그래서다. 겨울에 다람쥐가 먹을 게 부족해서 포기하고 굶어 죽는 게 아니라 먹을 것을 더 구해오면 살 수 있는 원리와 같다. 소비를 줄일 수 없으니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을 늘리는 게 옳지 않은가?     


나는 몸이 부수어져도 절대 이 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버틸 것이다. 혹은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생긴다면, 꼭 노른자 지역에 대한 투자도 생각해볼 것이다. 10년, 20년, 30년 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부격차는 더 커질 테니까 말이다. 빚이라면 치를 떨던 내가 이렇게 자본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엉뚱한 상상을 하며 있다니 가끔 믿기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 지금 사는 집값이 올라 판다고 해도 다 같이 집값은 오르니까 빚을 갚고 나면 갈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우울하기도 하다. 부모님처럼 평생 은행의 노예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원금과 이자를 같이 갚고 있으니 이 집이라도 남게 된다. 지방으로 간다면 아마도 노후 자금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자식들에게도 조금 도움을 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때는 집값이 솟구친 상태라 자식들은 집을 사지 못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집값이 천정부지와 같은 상태는 아니니까. 아직은 로또 10억, 20억에 당첨되면 수도권에 괜찮은 집 한 채 정도는 구할 수 있으니까. 로또가 되든 내가 하는 일이 대박이 나든 잘 되었으면 좋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빈이 아니라 극부로 향했으면 좋겠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으면 이루어진다고 하니 매일 기도해야겠다. 이러려고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니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해봐야 하지 않을까?          





분양받은 아파트가 지어지기 6개월 전에 첫째가 태어났다. 더는 처가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2년 가까이 우리 둘로도 충분히 부담을 드렸으니 양심을 챙겨야 할 수밖에. 물론 아기 짐으로 집이 더 좁아지면 생활이 위태로워질 테니 대책이 필요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처 외할머니를 모실 사람이 필요했다. 처 외할머니는 거동은 가능하지만, 허리디스크에 당뇨가 있어서 누군가 옆에서 보살펴야 했다. 식사랑 약만 챙겨드리면 되는 정도니 갓난아기를 키우는 아내가 힘들어도 할 수는 일이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분양받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할머니를 모시고 살기로 했다. 게다가 약간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신다고 해서 돈을 모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좋은 선택지였다. 그래서 조리원 생활이 끝나고 처가가 아닌 처 외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에서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면, 새로 짓고 있는 우리의 보금자리가 점점 거의 다 완성되어 갔다. 그리고 드디어 이삿날이 다가왔다.     


할머니는 새로 태어난 생명이 좋으셨는지 우리와 함께 더 살았으면 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미국에 사는 처 이모가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상황이 생겨서 할머니가 혼자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아내도, 장모님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제안했다.     


“하얀 할머니 저희가 계속 모시고 살면 어떨까요?”     


할머니를 홀로 두고 가려니 우리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려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백발의 80대 처 외할머니를 우리는 ‘하얀 할머니’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는 하얀 할머니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겼다. 결혼 시작부터 처가에서 시작했기에 우리에겐 신혼 생활은 없었다.    

  

허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나갈 수 있었다. 다만 딱 하나 빼고는 나는 하얀 할머니랑 사는 건 다 괜찮았다.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고 싶은데, 샤워 후에는 꼭 옷을 입고 나와야 했다는 점 하나만 빼면 말이다. 사실 별것도 아닌데 그땐 그 자유가 살짝 아쉬웠다.        


   

(엔딩곡)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번 한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어머님께

- 1999년 1월에 발매된 5인조 남성그룹 GOD의 첫 앨범 Chapter 1, 6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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