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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Sep 25. 2023

5화. 프러포즈

소설 같은 이야기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비록 지키지는 못했지만, 아내와 내가 결혼을 약속한 날이었다. 10월 첫 주에는 항상 여의도에서 한화에서 주관하는 세계 불꽃 축제를 진행한다. 예정대로였다면, 아마도 전 세계인들의 환호와 함성이 담긴 불꽃과 함께 결혼 축하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꿩 대신 닭이라고 나는 결혼 전이지만, 그날 프러포즈를 하기로 했다.      


그 시절 프러포즈도 유행이 있었다. 이벤트 회사에서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면 간단했다. 대부분 시나리오는 지인 집에 잠깐 방문한다고 여자 친구한테 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실제 당일이 되면 여자친구와 손잡고 지인 집에 잠깐 들린다. 문 입구를 들어서면 예쁜 조명과 장미꽃잎이 바닥에 깔려있다. 레드카펫을 밟고 마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 안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플랜카드가 눈에 띈다. 식탁에는 촛불이 놓여 있고, 맛있는 스테이크와 고급스러운 와인이 올려져 있다. 집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황홀할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방법을 택한 게 아니라 정확한 감정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남들 다하는 그런 건 따라 하고 싶지 않았다. 특별해지고 싶었다. 평생 딱 한 번 있는 날이니까.     


모아둔 돈이 있으면, 이 방법이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또 다른 방법도 유행했다. 결혼식 날짜까지 다 잡고, 신혼집을 구한 경우다. 아직 같이 사는 게 아니니까 아내 몰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꾸민다. 대략 구성은 아까 말했던 이벤트 회사랑 별반 다를 게 없다. 바닥에 조명이나 꽃을 이용해 길을 만들고, 방에는 플랜카드를 설치한다. 그나마 조금 다른 게 있다면 헬륨가스로 풍선을 불어서 둥둥 떠다니게 하는 것이다.     

 

친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할 수도 있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게 여자는 더 감동이다.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힘들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말이다. 값비싼 물건도 좋지만, 엔도르핀 돌게 하는 건 나를 위해 서슴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볼 때다. 하지만 이 방법은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결혼식 날짜를 잡은 것도 아니거니와 신혼집조차 준비하지 못했으니까.      


대신 나는 특별해지고 싶었다. 우리 둘만의 추억을 만들 수 있으면서 동시에 나의 피, 땀, 눈물이 들어간 노력이 빛나는 그런 이벤트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를 처음 해보는 나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첫 100일 이벤트를 말아먹은 사건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우린 100일 날 터무니 없는 이벤트로 헤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여자를 잘 몰랐다. 100일까지 소소하게 생일 챙기는 일밖에 없었기에 탈이 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100일 날 나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정말 이별로 가는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될 줄이야... 그날은 지금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평소 나는 매일 굿모닝 문자를 했다. 하지만 그날은 하지 않았다. 오후에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벌써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감이 와서 한숨이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일부러 오후까지 계속 연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친구가 먼저 안부를 묻고, 나중에 걱정하는 문자를 보낼 때까지 계속 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카톡이 있을 때가 아니라서 문자였기에 자연스럽게 읽씹(읽고 씹기: 읽고 답장하지 않기)이었다. 답답했는지 걱정이 되었는지 오후에는 전화를 몇 번이나 했다. 연락되지 않자 문자가 계속 왔다.      


“오빠,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잠시 후...     


“이제는 걱정된다. 이 문자 보면 바로 연락줘.”     


마지막 문자에 너무 심했나 싶어 답장했다.      


“응. 괜찮아. 오늘 좀 바쁘네.”   

  

그런데 여자의 촉은 무섭다. 잠시 후 약간 건조한 말투로 답장이 왔다.     


“설마 이거 100일 이벤트는 아니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이미 들켜버린 것 같아 서프라이즈는 망했다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했다.      


“아... 들켰네.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문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오빠!!! 이건 아니지! 나 정말 걱정했잖아!”      


얼마나 흥분했는지 여자친구의 목청이 떠나갈 정도로 큰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수화음을 낮추고 조용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진짜... 이래서 연애 안 해본 남자 만나지 말라는 건 가봐. 나 기분 나아지면 연락할게. 그때까지 반성 좀 하고 있어!”     


사귄 지 100일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던 우리.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단단히 화난 것 같았다. 사실 절대적으로 평화주의자인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었다. 내가 우물을 팠으니 내가 책임지는 수밖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 몰랐다. 내 인생에 이런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가족은 그냥 시간이 지나면 서로 풀려서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지만, 가깝기는 하지만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 어려웠다. 내 인생 최대 위기였다.     





사실 내가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친구 덕분이었다. 어쨌든 사내 연애였기에 나는 신중했고, 고백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거의 한 달 동안 매일 만나면서도 썸을 타는 불상사를 만들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한 달쯤 됐을 무렵, 여자친구는 종종 한숨을 쉬었다.      


매일 퇴근을 같이하다가 하루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카페에 들리려고 했다. 여자친구도 할 일이 있다면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카페에서 나는 1시간도 넘게 일에 집중하느라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에효~”     


바로 앞에서 나는 소리였기에 나는 반응했다.     


“왜~?”     


“너 땜에...”     


“오빠다~”     


이때까지는 사실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나 답답해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우리는 직장에서는 서로 호칭을 불렀지만, 동네 이웃사촌이니까 나와서는 오빠, 동생 하기로 해서 편하게 부르곤 했다. 그래도 꼬박 존대말을 쓰곤 했는데, 갑작스러운 반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뭔가 조금이나마 잘못했음을 감지했다.     


“어떻게 카페에 같이 와놓고선 말 한마디 안 할 수 있지?”     


그 말에 ‘아차’ 싶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대화를 시작했다. 이제야 나는 조금 눈치를 채고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사귀자’는 말을 엄청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백하고 나서 후폭풍을 견딜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차이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직장 계약 기간이 3개월이나 남았고, 업무도 얽혀 있어서 매일 봐야 하기에 무서웠다.      


다음 날에도 우리는 만나서 밥 먹고 대화를 나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에효~”     


“왜?”     


“너 땜에”     


“하하하. 오빠라고~”     


똑같은 레퍼토리. 그녀는 분명 답답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고백할 수도 없고,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서 나와 우리는 수원 성균관대 운동장을 걸었다. 우리들의 아지트다. 산책하면서 대화하는 걸 가장 많이 했다.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즐거웠기에. 그런데 그날은 작심이라도 한 듯했다. ‘쨉’이 아니라 ‘훅’을 한 방 맞았다.     


“근데 오빠는 여자친구 사귀어 본 적 있지 않아?”     


거의 다운될 수 있을 정도로 센 한 방이었다. 역시나 거짓말을 못하는 나는 대답했다.   

  

“아니... 그동안 지내봐서 알겠지만, 내가 거짓말을 못 하잖아? 나는 모태솔로야...”     


그러자 또 다시 한 숨을 크게 쉬었다.     


“에효~”     


혹시 그런 거 아는가? 부끄러움이 많던 사람이 갑자기 용기가 솟구쳐서 힘이 나는 경우를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물론 내 몸은 벌벌 떨고 있었다. 밤이라 보이지 않을 뿐.     


“사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나... 사실... 그동안 생각 많이 했는데... 너를... 좋아해.”     


이 말에 잠시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울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에효~ 다행이네.”     


“뭐가?”     


“사실 이번 주까지 우리 관계 정립이 안 되면 나는 혼자 정리하려고 했거든... 매일 이렇게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대화하는 데 우리 관계가 뭔가 싶었어. 난 그래서 오빠가 어장 관리하는 줄 알았지...”     


“에이... 그건 절대로 말도 안 된다. 지금도 이렇게 엄청나게 떨면서 고백했는걸?”     


“근데 오빠는 다 남녀공학 나오고, 문과라서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여초 집단, 게다가 외국도 다녀왔으니까 외국인이라도 한 번쯤 사귀지 않았으려나 생각했지 나는... 게다가 자연스럽고 마치 ‘꾼’같고...!”     


“하하하하하하.”     


‘꾼’이라는 말에 나는 모든 긴장이 풀렸다. 모태솔로 연애 왕초보인 내가 꾼이라니... 여유가 생겨서 나는 뜬금포 다른 고백을 더했다. 물론 손은 좀 오글거렸다.     


“내가 그동안 너 답답하게 해서 한숨 많이 쉬게 했으니까... 앞으론 한숨 안 쉬게 해줄게!”     


“그래! 기대할게! 용기 내줘서 고맙고!”     


“응! 그리고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뭐야~ 유치하게~”     


나는 유치하지만, 이 말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10월 중순 무렵 날씨를 제법 쌀쌀했지만, 내 생에 첫 봄날이었으니까. 이상하게 춥지도 않았다. 버스 타고 가도 되지만, 그날은 그냥 걸었다. 1시간 가까이 손잡고 여자친구네 집까지 가는데도 마냥 봄이었다. 역시 사랑의 힘이란 위대한 것인가.      




     

나의 첫사랑이지 마지막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100일의 악몽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나를 용서했다. 처음이고, 몰랐던 거니까 용서할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여자에 대해 수업을 들었다. 요지는 이랬다.     


“여자는 크레센도야. 절대 한 번에 바닥에서 하늘로 올라올 수 없어. 잔잔하게 계속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감동하는 법이지. 음악 시간에 배웠지? 크레센도, 점점 세게... 이것만 기억하면 앞으로 실수하는 일은 없을 꺼야.”     


다행히도 나는 학습이 빨랐다. 그 후로 200일과 300일도 챙기면서 무사히 잘 지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1주년 행사 때는 ‘크레센도’가 무언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혹시나 나처럼 책으로, 영화로 연애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간접 경험으로나마 성공적인 이벤트 방법에 대해 배워보라고 자세히 공유해볼까 한다.     


1주년을 위해서 나는 미리 3개월 전부터 용돈을 모았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1주년 행사를 위해 준비했다. 크레센도 법칙에 의해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잔잔하게 기분 좋게 해주려 노력했다. 원래 하던 레퍼토리도 우선은 최선을 다했다. 생일 때나 200일, 300일에도 했던 꽃과 케이크를 직장으로 보냈다.      


그때는 2시간이 넘는 거리에 각자 다른 직장에 근무할 때였는데, 전날 퇴근 후 저녁에 몰래 가서 택배인 것처럼 물건을 놓고 왔다. 직장에 갔는데 선물이 놓여 있으니 얼마나 기쁘지 아니할까. 내가 전날에 다녀간 것도 알게 되자 감동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소소하게 링크를 하나 보내서 플래시 형태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이것도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우리가 자주 만나는 대형마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기가 나름 괜찮은 이벤트 장소다. 대형마트에는 개인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사물함이 놓여 있다.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해서 준비한 여러 선물을 보관함에 보물을 숨기듯 넣어두었다. 여자친구가 도착했을 때는 몰래 숨어서 지켜보며 문자로 사물함 번호를 알려주고, 비밀번호를 맞히게 했다. 하나를 열면, 그곳에 다음 사물함 번호가 적혀있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선물 받는 이벤트다. 물론 선물 크기나 가격도 점점 갈수록 더 커지고 세진다. 일명 크레센도 법칙이다!     


마지막 사물함 열 때 바로 옆에 와서 표정을 봤는데,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1주년 이벤트는 대성공이었다. 여자친구는 고맙다며 저녁 식사는 자기가 산다고 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라 나름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었다. 사실 그것도 내가 부담할 생각이었는데, 잠시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고선 이미 계산을 끝낸 후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아직 남겨둔 선물을 내밀었다. 비싼 명품까지는 아니지만, 괜찮은 브랜드 지갑을 건넸다. 오늘 준 선물 중에는 가장 고가였다. 감동까지는 아니었지만, 신났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직접 제작한 사진첩을 건넸다. 진짜 마지막 선물이었다. 사진첩에는 1년 동안 우리가 쌓은 추억이 담긴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을 넘기면서 닭똥 같은 눈물이 사진첩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자친구는 통곡하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그러냐며 달래며 토닥여주는 수밖에...     


“나는... 나는.... 엉엉엉...”     


이럴 땐 기다리는 게 정답이라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진정한 그녀는 이제 입을 열었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당연하지!”     


“나는 마음이 이상했어. 감동적이기도 하고,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어.”     


“뭐가? 왜?”     


“이렇게 잘해주다가 갑자기 안전 이별하려는 건 아닌가 하고...”     


“그게 뭔 소리야. 나는 자기가 알려준대로 ‘크레센도’ 법칙을 제대로 한 번 해본 것 뿐인데? 나 성공한거네?”

     

“그러면 다행이고... 역시 오빠는 특별해... 남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 호호호”  

   

“울다가 웃으면 알지? 하하하하하”     


이벤트 꽝이었던 나는 ‘크레센도’ 법칙으로 제대로 여자친구를 감동시켰다. 이 기세를 몰아서 과연 결혼 프러포즈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매년 10월 초에 여의도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 사실 사람 많은 곳이 싫어서 여의도로 가지 않고, 불꽃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산한 곳을 찾았다. 여자친구는 서울 지리에 약해서 내가 가자는 대로 항상 따라왔다. 덕분에 프러포즈하는 날에도 여자친구는 의심 없이 나를 따라왔다. 잠실 선착장에서 여의도 불꽃놀이가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마 이 세상에서 내 여자친구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프러포즈는 다른 유행하는 방법과는 매우 달랐다. 우선 프러포즈를 위해 매월 10만 원씩 돈을 모았다. 그리고 기획과 준비는 한 달 정도 걸렸다. 잘 속이고, 많은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철저해야 했다. 우선 직장 부장님이 잠실에 있는 선상 레스토랑 쿠폰이 있는데 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공짜로 쿠폰을 줬다고 거짓말했다. 이건 레스토랑과 짜고 치는 나만의 고스톱이었다. 그리고 잠실이지만 편하게 실내에서 불꽃놀이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여자친구는 역시나 전혀 의심 없이 더 좋겠다며 기뻐했다.     


선상 레스토랑인 이유는 아무래도 옷을 갖추어 입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맛은 보통이었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좋았다. 게다가 공짜니까 얼마나 맛있었을까. 디저트를 먹을 때쯤 직원이 와서 이벤트를 진행한다. 요트 탑승 이벤트인데, 종이 뽑기를 잘하면 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 또한 나와 이미 약속된 일이다. 어떤 종이를 뽑든 당첨이기 때문이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바람타고 가는 요트를 붙잡는 몸짓을 하며 발연기를 시전했다.      


“근데 이렇게 추운데 요트 타다가 떨어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호호호. 아니에요. 전동 요트라서 매우 안전하답니다. 왜 영화에서 보면 항구에 비싼 요트 있잖아요. 바로 그 요트에요! 당첨되시면, 잠깐 탑승하실 수 있답니다. 행운을 빌어요!”     


여자친구는 신중하게 종이를 골랐다. 당연히 당첨이었다.     


“당첨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식사 다하셨으면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또 발연기를 시전했다.     


“오늘 운이 좋은 날인가 봐. 공짜로 밥 먹고, 공짜로 배 타면서 불꽃놀이 볼 수 있겠어!”     


우리는 선착장으로 안내받았다. 배에 올라타니 요트 항해 관련 안내 영상이 나온다. 엔진 소리와 함께 요트는 서서히 선착장으로부터 멀어졌다. 강바람이 시원했다. 홍보 영상이 거의 끝날 때쯤 익숙한 음악 소리가 나왔다. Back Street Boys의 ‘As long as love me’.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당신이 누구든 날 사랑하는 한 신경 안 쓰고 사랑하겠다는 낭만적인 가사라고.     


노래를 배경으로 영상에는 우리가 3년 넘게 만나온 시간을 추억하는 사진이 연달아 나왔다. 노래가 나오자 여자친구 눈에서 다이아몬드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노래가 끝날 무렵 마지막 사진은 바닷가 절벽 큰 바위 위에서 남자가 무릎 꿇고 여자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이다. 나도 미리 준비해두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그리고 요트 사장님께 말해두었던 꽃다발을 건네며 자막에 적힌 대사처럼 말했다.     


“Will you marry me?”     


여자친구는 펑펑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1주년 이벤트 때는 두려움의 눈물도 함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분명히 행복과 감동이 섞인 눈물이었다. 대망의 프러포즈가 끝나고, 우리는 가판 밑에 마련된 비밀의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여기에도 내가 미리 부탁한 케이크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앉는 곳 뒷배경에는 우리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내가 요청한 대로 모두 준비해주신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한 달간의 기획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중간에는 가판에 올라가서 뒤에 한강 다리와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강바람이 심해서 머리카락이 해파리처럼 날렸다. 다행히 건진 사진도 있었지만, 대부분 엉망이었다. 한창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데, 뱃고동 소리가 났다. 큰 유람선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선장님이 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내려오세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큰 유람선 배의 영향으로 큰 파도가 우리 배로 향했다. 배는 거의 뒤집힐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소리를 꺅 지르며 빠르게 가판 아래로 대피했다. 만일 제때 대피하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아침 신문 기사에 실리지 않았을까?      


‘잠실에서 프러포즈하다가 유람선에 봉변당한 커플’     


다행히 우리는 살았고, 구사일생했으니 더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뜬금없이 여자친구는 불꽃놀이 못 봤다며 아쉬워했다. 가판 아래 공간에 있어서 밖을 보지 않아 못 본 것으로 착각한 듯했다. 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여기는 잠실이라서 여의도 안 보여! 하하하”   

  

“어? 그런 거였어? 하하하”     


마침내 선착장에 도착했고,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계산대로 가서 저녁 식사 비용을 결제했다. 왜냐하면 그 공짜 쿠폰은 가짜였기에...! 여기에서 또 한 번 여자친구는 놀랐다. 모든 게 내가 기획한 일이었다는 걸 그제야 이해하는 듯했다. 나의 결혼 프러포즈는 1주년 이벤트에 이어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었다. 지금도 자신한다. 이런 결혼 프러포즈는 거의 없을 거라고. 모태솔로이자 연애 왕초보가 개과천선한 결과라고나 할까?          


     



프러포즈 대작전을 위한 한 달 동안 모든 게 순조롭지 않았다. 우선 혹시 여자친구가 잠실에서는 여의도가 안 보인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하나 걱정해야 했다. 여기서 들통나면 모든 게 망쳐지는 일이었다. 사실 공짜 쿠폰도 매우 허접했는데, 다행히 잘 넘어갔다. 누가 10만 원 넘는 선상 레스토랑 쿠폰을 그냥 주겠는가? 신기하게도 그때 주변 지인이 서태지 콘서트 티켓을 구해줘서 간 적도 있고, 올림픽 공원에서 있었던 공연 티켓도 공짜로 구한 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제작이 늦어져서 퀵으로 간신히 전날에 받을 수 있었다. 프러포즈 영상은 전문가한테 의뢰했는데, 오류가 있어서 내가 거꾸로 음악을 넣어서 작업해서 보내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소한 일로 문제가 많이 발생해서 당일 프러포즈를 망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80%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딱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계획한 대로 당일 모든 게 수월했으니까.     


10년이 지난 아직도 그날을 회상한다. 하마터면 물에 빠져 죽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때 스쳤던 강바람, 아름다운 야경, 심장을 뛰게 하는 요트 엔진 소리 모두 생생하다. 화려한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진짜 감동은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생기는 것이라 믿는다. 준비하면서 상대방을 떠 올리며 느끼는 감정이 진실하니까 말이다. 결과가 어떻든 과정이 충실했다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면 모든 괜찮은 것처럼 말이다.            


    

(엔딩곡)     


“I don’t care who you are. Where you’re from. What you did. As long as you love me.”     


*As long as love me


- 1997년 9월에 발매된 미국 가수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싱글 2집 앨범 Backstreet’s Back의 2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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