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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Sep 22. 2023

4화. 데릴사위

소설 같은 이야기



수원 인계동에 위치한 경기 아트 센터에서 진행하는 연극 표가 생겼다. 강원도 춘천에 생가가 있는 김유정 작가의 소설 《봄봄》을 기반으로 한 연극이었다. 계절 탓인지 쌀쌀한 바람에 콧등이 시린 날이었다. 추위를 달래려고 여자친구와 손을 꼭 잡고 연극을 보러 갔다. 다행히 극장 실내는 온풍기가 나와서 따뜻했다.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봄봄》에서는 주인공이 데릴사위로 점순이의 집에서 3년째 생활한다. 앞서 두 명의 데릴사위는 결국 점순이 키가 자라지 않자 참지 못하고 도망가고 말았다. 하지만 세 번째 데릴사위인 주인공은 점순이가 클 거라고 믿고 살아간다.      


데릴사위제는 고구려의 혼인 풍속이었다. 여자가 부모님 집을 떠나지 않고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와 사는 혼인 형태다. 원래는 딸을 외동딸만 둔 부모가 데릴사위를 들였다. 상황에 따라 아들이 있는 집에도 데릴사위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못 믿겠지만, 나는 현대판 데릴사위였다. 부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을 받는 쪽이었다. 물론 결혼을 허락받기 전까지는 살걸음 걷는 기분이었다. 여자친구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내가 비정규직으로 근무할 때였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나의 상황이 탐탁지 않으셨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순수한 마음으로 3일간 매일 가서 장례식장 일을 도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말 두 마디뿐이었다.     


“열심히 해라.”     


 이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말 그대로 정규직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라는 격려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열심히 하지 않아서 정규직이 되지 않으면, 자기 딸을 줄 수 없다는 협박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열심히 해도 절대 안 된다는 말은 포함되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결혼을 승낙받은 해에는 정규직이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좋아하니 올해는 결혼시켜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내가 정규직이 되었단다. 덕분에 일사천리로 모든 게 진행되었다. 정규직 합격 소식을 들은 주 바로 주말에 여자친구의 가족들과 저녁 식사했다.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셨던 아버님도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환대해주셨다. 심지어 축하 선물로 넥타이를 주셨다. 티는 안 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바로 본가 어른들께 말씀드려서 상견례를 잡자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상견례를 진행했다. 퇴직 후 강릉에 내려가 살고 계신 부모님이 수원으로 올라오셨다. 굳이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보단 단 두 명만 움직이면 되니까 그렇게 결정했다. 많은 사람이 상견례 직후 파혼한다고 해서 걱정이 앞섰다. 주변에 친척, 친구, 지인 등 많은 사람이 상견례 전후로 결혼 약속을 파기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그랬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상견례를 하기 전에 먼저 강릉에 내려가 본가 부모님께도 여자친구를 소개했다. 상견례 전에 얼굴도 익히고 조금이라도 친해져서 덜 어색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행히도 별일 없이 인사를 잘 드리고 왔다. 게다가 들린 김에 결혼 날짜도 정했다. 양가 모두 사주팔자, 궁합 등 그런 건 전혀 보지 않았다. 우린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였기에...      


다만 손 없는 날만 피하라는 의견을 수용할 뿐이었다. 10월 3일과 10월 31일 이렇게 두 선택지가 있었다. 부모님은 10월 말을 선택하셨다. 그렇게 결혼 날짜가 바로 잡혔다. 다만 해결해야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집은 신랑이 준비하고, 혼수는 신부가 준비하는 시대에 사는 나는 사실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지 고작 3년 반밖에 안 되었다.      


계약직에 신입이라 월급도 쥐꼬리만 했다. 하지만 저축하고 하는 의지가 강했다. 절약 정신 또한 투철했다. 매달 꼬박 100만 원씩 저축했다. 월급이 200만 원도 안 되기에 50% 이상 저축한 셈이다. 그 와중에 대학원은 해외에서 공부하느라 친척한테 빌린 돈도 있어서 매달 갚았다. 순수하게 생활비와 데이트 비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저축한 거였다.     


대략 2년 정도 돈을 모았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아프셨다. 평생 한 번 안 해본 수술을 했다. 아주 지독한 병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수술이라도 잘못되면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실까 두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수술은 잘 끝났고, 어머니도 완전히 회복하셨다. 병의 주된 요인이 ‘스트레스’였기에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효자였던 아들은 어머니 차가 낡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모은 전 재산을 털어서 새 차를 사 드렸다. 할부는 0원, 현금 100%로 차를 샀다. 덕분에 내가 모은 돈은 다 사라졌다. 남자로서 집을 마련해야 하니까 열심히 모으던 돈이었다. 한방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차마 여자친구한테는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누가 개털과 결혼하고 싶을까 싶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결국 들켰다.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고 있었으니 서로의 사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나에게 매우 실망한 눈치였다. 결혼이 물 건너가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3년 정도 만나면서 별로 싸우지 않았는데, 그날은 심하게 말싸움이 오갔다. 중요한 지점은 바로 ‘한 마디 상의 없이 혼자서 결정’한 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실망스러운 게 아니라 나중에 결혼해서도 큰일을 결정할 때 말없이 혼자서 덜컥 저질러버릴까 봐서였단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말은 했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결혼 가능성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현실적으로 볼 때 집을 구할 수 없으면 결혼도 무리니까 말이다.     





집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신부가 보낸 예단비의 절반을 다시 처가로 돌려보낸다. 상견례를 앞두고 강릉에 인사하러 온 예비 신부는 예단비를 예쁜 봉투에 담아서 부모님께 드렸다. 부모님은 적지 않게 당황해하셨다. 사실 아들이 집 구할 때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예단비를 안 받겠다고 미리 선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비 신부 측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반대 상황에서 똑같이 받지 않을 수는 있지만, 예단비를 전하는 쪽이니 도리를 다하고 싶었단다.     


결국 강릉 부모님이 흰 수건을 던졌다. 풍습처럼 예단비를 받되 절반만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마음을 표현하자 예비 신부는 당당하고 야무지게 대답했다.     


“어머님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온전하게 저의 집은 아니지만, 제가 집을 해놓은 게 있답니다. 저희 둘 다 돈을 벌고 있으니 충분히 은행 이자 갚으면서 그 집에서 살아가면 될 거예요. 그리고 요새는 집값이 비싸서 같이 한다고 해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셔요.”     


그랬다. 예비 신부는 그동안 자신이 번 돈으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둔 것이었다. 게다가 세상 이치와 반대로 여자인 자기가 집을 하고, 오히려 남자인 내가 혼수를 해오면 된다고 생각했단다. 누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냐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혼자 결정해버리는 일에 많이 서운했던 게 아니었을까.     


양가에 무사히 인사를 마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상견례 날이었다. 수원 터미널까지 버스 타고 오신 부모님 두 분을 모시러 아내와 함께 갔다. 그리곤 재잘거리며 대화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직 며느리가 된 것도 아닌데 예비 신부는 시부모님과 편하게 대화 나눴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상견례도 무사히 지나갈 것 같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약속 장소에는 아버님, 어머님, 신부의 남동생(예비 처남), 그리고 할머니 이렇게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릉에 계신 우리 할머니는 장거리를 하기 부담된다고 해서 그냥 부모님과 여동생만 참여했다. 아버님들의 주도하에 순조롭게 식사하며 상견례가 진행됐다. 상견례 자리에서 재산, 혼수 등 민감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는 게 좋다고 들었는데, 다행히도 아버님들 취미 이야기가 주된 주제였다. 그래서 아주 편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예비 장인어른이 딱 한 마디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예비 사위가 다 좋은데요. 술을 못 해서...”     


여기까지 듣고, 상견례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이 숨죽였다. 갑작스럽게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1~2초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다들 ‘어떻게 하지?’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있었던 정적은 예비 장인어른의 다음 말로 깨졌다.  

   

“더 좋습니다. 하하하”     


아버님의 긍정적인 마무리에 모두 환하게 웃으며 위기를 넘겼다. 아주 다행이었다. 사실 본인은 술을 같이 마시지 못해 아쉽다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딸에게는 술 먹고 힘들게 하지 않는 최고의 남편이 될 수 있기에 아빠로서 오히려 좋다고 다시 강조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다시 좋은 흐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끝까지 집 이야기든, 혼수 이야기든 상견례에서 최악을 만드는 불필요한 주제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비 사위는 이제 저희가 잘 챙기겠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그 자리에서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타지에서 고생하는 아들 걱정한 부모님을 안심시키려는 말뿐인 줄 알았기에... 하지만 예비 장인어른은 입으로 뱉은 말은 꼭 실천하시는 분이었다. 상견례 이후로 나는 금요일 저녁이면 처가로 퇴근했으니까 말이다. 주말에는 처가 식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같이 놀고, 먹고, 한 가족처럼 지냈다.      


일요일 밤이 되면 다시 자취하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개그콘서트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엔딩 음악이 나오면 내가 30~40분 운전해서 갈 시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게 싫었다. 혼자 지내는 게 외로웠는데, 장인어른의 언행일치로 정말 처가에 맡겨진 사위가 된 것이었다. 물론 데릴사위는 아니지만 말이다.     




하루는 여자친구와 어머님과 마실 나갔다가 오는 길에 우연히 모델하우스에 들려 구경하게 됐다. 멋지게 꾸며진 모델하우스는 드림하우스였다. 3명 모두 방 구조라던가 구성이라던가 다 마음에 들었다. 포베이 구조라서 모든 방에 해가 잘 드는 구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멋진 집에 매료되어 청약 신청서를 받아왔다. 마침 내가 청약을 들어놓고 쓰지 않은 게 있어서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일이었다. 분양받고 잔금 치를 돈만 없는 것만 빼면 말이다.     


용감이 무식이라고 일단 신청해보기로 했다. 정 안되면 처가 어른들이 들어가 살아도 되니까 해보라고 용기를 주셨다. 밑져야 본전이니 넣어 보기로 했다. 되면 좋고, 안 되어도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모두 좋은 옵션이었다.      


게다가 며칠 후 어머님은 돈이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엄청나게 많은 물이 들어오는 꿈이었다. 꿈 해몽을 찾아보니 큰돈이 들어오는 꿈이라 했다. 나는 1만원을 주고 그 꿈을 샀다. 희망찬 꿈을 꿨다. 아마도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파트에 당첨되면 잔금을 치를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로또 1등은커녕 5천 원짜리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히 어머님 꿈은 잘 맞는다고 했는데,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다음 날 문자를 받았다. ‘청약에 당첨되셨습니다.’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그때는 몰랐지만, 부동산 시장의 열기가 폭발하기 전 마지막 막차를 타게 된 것이었다. 여전히 나에게는 부담되는 경제적 규모였지만, 지금으로서는 싼 가격에 집을 분양받는 것이다. 아파트에 당첨되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거였다. 물론 수도권이라서 로또 1등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분양에서 떨어진 사람도 있었으니 그게 로또가 아니고 무엇일까.     


기쁨도 잠시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 되었다. 계약금을 넣으려면 지금 자취하는 집 보증금을 빼야만 했으니까. 그러면 나는 갈 곳이 없게 되니까. 그게 문제였다. 다시 부모님과 살고 싶어도 강릉에 계셔서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딱 한 가지 방법만 있었다. 결혼 전이지만, 처가에 들어가 사는 방법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것조차 허락받아야 했다. 어른들이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까.     


처음에 어른들은 반대했다. 결혼하고 신혼 생활을 해야지 무슨 처가살이를 하냐고 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처가 근처에 새로 생긴 주택가에 집을 구하려 부동산에 어머님과 아내와 함께 알아보러 갔다. 부동산 사장님은 대뜸 어머님께 이렇게 말했다.     


“아드님 집 구해러 오셨나요?”     


아내가 더 어머님과 닮았을 텐데 사장님 사람 보는 눈도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니 부동산에 집 구하러 오는 사람은 남자 쪽이지 여자 쪽일 가능성이 희박했다. 사회적 분위기는 그게 정상이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시어머니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집 매물이 단 하나도 없었다. 신축이라 벌써 다 계약됐다고 했다. 빌라가 아닌 아파트를 알아보려니 너무 비쌌다. 그렇다고 돈이 거지같이 없어서 아파트로는 못 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었으니 돈을 모으기 위해 처가에 같이 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어필하는 수밖에.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행히도 아버님은 들어와 사는 것에 대해 본인은 찬성한다고 했다. 다만 우리를 챙기느라 더 많이 신경 쓸 어머님이 힘들 수 있으니 어머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어머님은 알콩달콩 부부가 둘이서만 사는 게 더 좋지 않냐고 한 번 더 물으시고는 정 우리의 생각이 그렇다면 좋다고 했다.      


나는 나름 양심껏 약간의 생활비를 보태기로 했다. 보증금을 받자마자 처가로 바로 이사했다. 여자친구 방에 내 짐을 모두 넣고, 결혼 전까지 나 혼자 거기서 잤다.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도 결혼식 전까지는 각방을 썼다. 하지만 우리는 한 식구였다. 식구란 함께 밥을 먹는 사이니까.     


비록 출퇴근하는 길은 멀어졌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외로웠던 자취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처가 어른들은 친아들처럼 정말 잘해주셨다. 강릉에 계신 부모님이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 착각이 들었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실상은 아들에 가까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분명한 데릴사위였다. 그렇게 시작한 처가살이는 첫째가 태어나는 날까지 거의 2년 정도 계속되었다.           





나랑 사귀기 전이었지만, 아내는 종종 어머님께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머님은 예지몽을 꾸셨다. 꿈에 건장한 남자가 나왔는데 하나님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해줬다는 것이다. 신앙심이 깊으신 어머님은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나를 받아들이셨다. 그래서일까 내가 얼마를 모았는지, 집은 있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게다가 상황을 대충 알고서도 마치 아들 대하듯 오히려 도와주려고 하셨다.    

 

어머님과의 첫인사 자리에서도 대화가 편했다. 처음 만난 날 겨울 따뜻하게 나라고 내복을 선물로 사주시기도 했다. 아버님은 모르지만, 어머님과 아내와 셋이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강릉에 1박 2일로 놀러 다녀온 적도 있었다. 찜질방에서 잤는데, 아내는 쿨쿨 잘 잤고 나와 어머님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다고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전생에 인연이 깊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 자주 생각했다. 심지어 어머님과 아내와 나는 셋이 같은 날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다. 우리의 관계는 그만큼 특별했다.      


처가에 살게 되면서 나는 아침 메뉴로 ‘고기’ 반찬이 매일 나올 때마다 어색했다. 처음에는 특별히 어머님께서 나를 신경 써주시느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집에서는 아침에도 구운 고기를 만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나는 강호동만 아침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른 현실도 있었다. 하지만 매번 아침의 ‘고기’ 반찬은 낯설기만 했다. 이 집에 사는 게 낯설어야 하는데, 아침 식사가 낯선 건 이상하지 않은가?     

     


(엔딩곡)     


“왜 하필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나게 된거야.(야)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맬 때는 없더니(어디서 무얼 했어).”  

   

*운명

- 1996년 11월에 발매된 가수 쿨(COOL)의  에이트(8Eight)의 3집 앨범 Destined For The Best의 2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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