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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Sep 17. 2023

2화. 모태솔로

소설 같은 이야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이성 간의 교제를 하지 않은 채 티끌 하나 묻지 않고 굳건히 솔로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바로 모태솔로라고 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모태솔로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 번도 이성 간의 교제를 하지 않은 채 티끌 하나 묻지 않고’라는 문구가 특히 눈에 띈다.      


나는 29살까지 모태솔로였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은 있지만, 누군가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누나는 모태솔로인 나를 보며 ‘천연기념물’이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너무 귀하다며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할 정도인가 싶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에이~ 키도 크고 멀쩡하게 생겨서 연애 한 번 안 해봤다는 건 말도 안 돼.”      


나는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키가 비교적 큰 편이었지만, 사실 우리 가족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면 살짝 실망스럽기도 하다. 아버지는 55년생 양띠다. 키는 183cm이다. 어머니는 59년생 돼지띠다. 키는 172cm이다. 두 분은 어린 시절 항상 줄반장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두 분은 모두 호적상으로는 1년씩 늦게 올려져 있다. 옛날에는 아이가 금방 죽을까 봐 일부러 그렇게 했다나 뭐라나.      


두 분이 만나서 아이를 낳았으니 내 키는 사실 적어도 190cm는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내 키는 10cm 모자란 180cm이다. 물론 작은 키는 아니다. 아니 큰 편이다. 하지만 여동생의 키를 말하면, 그리 큰 편도 아닌 것 같다. 매일 아침 정신 차리고 여동생과 조우하는 순간에는 내가 조금 작은 느낌도 받기 때문이다.

      

여동생은 키가 정~말 크다. 177.8cm이다. 본인은 175cm라고 우기지만,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 부모님의 좋은 외적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외모도 준수하다. 주관적일 수 있으니 리즈 시절의 일화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중3 때 여동생은 170cm정도였다. 그때는 한창 ‘얼짱’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길거리 캐스팅’이 한창 붐이었을 때이기도 했다. 동생이 서울에 잠깐 나갔다 오면 만날 명함을 받아왔다. 처음에는 가족들 모두 놀라고, 신기했다. 하지만 수십 번도 넘게 명함을 받아오니까 무덤덤했다. 여동생은 별로 끼가 없어서 이쪽 분야는 맞지 않을 거라 모두 생각했다. 자꾸만 명함을 받아오니까 정말 한번 시켜봐야 하나? 의구심도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어머니한테만 말씀드리고 동생을 연예인 아카데미 면접 보는 곳에 데려다주었다. 그때 인기 많았던 얼짱들이 많이 등록한 학원이었다. 큰 포스터가 복도에 수십 개도 넘게 붙어있었다. 유명한 곳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동생도 여기서 미래를 꿈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동생은 카메라 테스트랑 간단히 면접을 봤다. 정면 및 옆면 카메라에 나오는 모습을 찍고, 그리 어렵지 않은 사소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봤다고 한다. 동생은 크게 감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동생의 반응으로 판단해볼 때 분명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서울에 나온 김에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학원 소속 얼짱으로 등록해준다고 했다. 1년간 연습생으로 연기, 춤, 노래, 모델 등 다양한 분야 진출을 위한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이런 게 바로 캐스팅이구나 싶었다. 설레발도 잠시뿐이었다. 길거리 캐스팅 후에 합격한 거라 수업료는 면제지만, 시설 사용 및 관리 명목으로 연간 등록비가 있다고 했다. 연간 200만 원이라고 했다.   

   

연예계 진출이 보장만 된다면,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습생 신분이라서 더 기회가 생길 수는 있지만, 보장은 하기 나름이라는 말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나도 이렇게 확신이 안 드는데, 부모님께서 지원해 주실지는 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해보고 연락드리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디션을 보고 온 것은 아버지께는 비밀이었지만, 목돈이 들어가는 마당에 더는 비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처음에 아버지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역시나 200만 원이라는 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매우 부정적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간절한 마음과 열정이 있다면 생각해보겠지만 그냥 해보는 거라면 절대 반대라고 입장을 분명히 보였다.      


이제 제일 중요한 건 내 동생의 의지였다. 하지만 동생조차 별로 관심 없다며 포기를 선언했다. 그 이후에도 연예인 아카데미 매니저한테 불이 나게 전화가 왔다. 부모님이 반대해서 안 된다고 말했지만, 매니저는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말에 혀를 내두르고 ‘차단’했다. 그 후로 다시는 동생은 명함을 받아오지 않았다. 받았어도 그냥 버리고 온 듯했다.      


나는 그런 동생을 매일 집에서 봐왔기에 ‘미’의 기준이 꽤 높았다. 눈이 높았다는 말이다. 내가 29년간 모태솔로였던 이유 중 하나라고 봐도 무관하지 않을까? 그리고 엄청 가까이 지내는 사촌 동생도 키가 큰 편이고, 많이 이쁜 편에 속했다. 나중에 승무원이 되었으니 알아서 판단하리라 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별로 여자들을 봐도 웬만해서는 마음을 쉽게 빼앗기지 않았다. 이 이유뿐만 아니라 초중고 12년 동안 남녀공학을 나왔고, 대학에서는 문과 특성상 여자가 더 많았다. 처음에는 조금 호감이 생기더라도 친해지고 나면 더는 여자가 아니라 여사친이 되어버렸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참 연애하기가 힘들었다.     


후광이 비추며 나의 심장에 불을 지피지 않는 이상 외적으로는 잘 끌리지 않았다. ‘자만추’(요새 버전 아님)를 선호했기에 미팅이나 소개팅도 대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몇 번 안 해봤지만, 부자연스러운 만남은 역시나 별로였다. 평생의 소개팅 숫자를 세어봐도 5번이나 될까 말까다. 그렇다고 연애를 안 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다. 사랑에 빠지면 정말 잘해주고 싶었다. 직접 경험으로는 능력치를 쌓을 수 없으니 간접 경험이 더 많았다. 예를 들면, 책을 읽거나 다른 친구들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연애관을 정립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비롯해 연애 관련 책을 열심히 읽었다. 책으로 연애를 배운다는 사람이 바로 나다. 또한 그때는 MBTI가 유행할 때가 아니라 혈액형이나 별자리 책으로 연애를 꿈꿨다. 나는 A형이다. 혈액형 책에 따르면 나는 B형과는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호감이 생겨도 혈액형이 B형이라고 하면,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리고 나는 염소자리다. 염소자리와 궁합이 좋은 별자리는 처녀자리, 황소자리, 염소자리다. 반면 상극인 별자리는 쌍둥이자리, 게자리, 천칭자리다. 마찬가지로 상극인 별자리는 피했다. 그러니 여자친구가 생기기 어려울 수밖에... 책으로 연애를 공부한 자의 최후였다.     


별자리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실제 혈액형은 좀 맞는 것 같았다.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자기주장이 세고, O형은 활달하고, AB형은 이성적이면서 특이했다. 혈액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지 않은가. 정확한 제목이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밥 먹을 때 혈액형 이야기’ 정도다.     


A형, B형, O형, AB형 각기 다른 혈액형을 가진 사람 네 명이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AB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O형이 바로 뒤따라 나갔다. B형은 힐끗 쳐다본 후 다시 자기 밥을 먹었다. 하지만 A형은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리곤 한 마디 뱉는다. “쟤들 혹시 나 때문에 그래?”

     

AB형은 엉뚱해서 언제 어리로 튈지 모르는 유형이고, 천재 아니면 싸이코란다. 그래서 갑자기 밥 먹다가 생각이 떠올라서 밖으로 나갔다. O형은 호기심이 많고 오지라퍼라서 AB이 왜 나갔는지 확인하러 따라 나간 것이다. B형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그래서 AB형과 O형이 나가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자기가 먹던 밥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A형은 예민하고, 걱정 많은 소심쟁이다. 그래서 AB형과 O형이 나간 이유를 자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러니 A형인 나로서는 B형은 잘 안 맞아 보였다. 나보다 세심하지 못해 나에게 상처를 많이 줄 것만 같았다. 혹은 자기주장이 강해서 무서울 것 같았다. 그래서 피했다. 대학교 때 우연히 혈액형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 학과 여자 동기들은 B형이 왜 이리 많은지... 덕분에 모태솔로를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B형이 아니라서 호감이 있었던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특히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도 몰랐고,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다. 쉽게 말해 서툴렀다. 초짜였다. 여러 가지로 나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내가 의도적으로 모태솔로를 추구한 게 아니란 말이다. 의도치 않게 모태솔로의 길로 가게 되었다. 20대 중반에는 군대에 있어서 연애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군인이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A형이라 그렇게 생각한 지도 모르겠다. 나름의 배려였지만, 나 자신에게는 미련한 선택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술을 안 먹어서 더 기회가 없는 거라고. 나는 알쓰(알코올 쓰레기)라서 술을 잘 못 먹는다. 알코올에 민감해서 술 한 방울만 들어가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맥주 한 잔에도 취하고, 온몸이 빨개진다. 밤새 술 안 먹고 술 냄새에 취해서 놀 수 있다. 처음에 만난 사람들은 아쉬워서 자꾸만 나에게 술을 먹이려 하지만, 나는 그러면 바로 잠든다. 놀 수가 없다. 그래서 사정을 말하고 거의 안 마시고 더 신나게 논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말이다.      


주변에 있는 여자들에게 은근슬쩍 대시를 받아본 적도 있다. 물론 직접 사귀자고 말한 게 아니었기에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대신 이야기 해주곤 했다. 하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아름답고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들이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어릴 때 교회 목사님 댁에 세를 들어 우연히 살게 되어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물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후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종종 기도하곤 했다. 조기 교육의 힘이었다고나 할까? 우연한 기회로 대학원은 외국에서 다니게 되었다. 아쉽게도 돈이 없어 가난했다. 매일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상황도 더러 있었다.      


아침과 점심은 대충 먹고, 대신 저녁에는 매일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을 다 먹은 후에 밥을 말아 먹으면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라면을 끓였다. 덕분에 귀국 후에는 몇 년간 라면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라면 장인이 되었다. 아내가 요리를 잘하지만, 라면만은 내가 끓인다. 유일하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식사 준비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레시피가 있다. 요리라고 하기보다는 조리에 가깝다. 라면을 끓일 때 달걀을 1개씩 더 넣는 방법이다. 면발을 더욱 쫄깃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라면 1개를 끓이면, 달걀 2개. 라면 2개를 끓이면 달걀 3개. 이런 식이다. 정말 맛있다. 한번 해보시길... 단, 달걀을 절대 풀지 않아야 한다. 흰자 부분이 면발을 잘 감싸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달걀을 푸는 게 개인 취향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다.     


만일 달걀이 없는 상황이라면 두 가지 방법을 추천한다. 첫 번째는 돈이 조금 들지만, 제일 작은 사이즈의 참치 캔을 사서 라면을 다 끓인 후에 위에 통째로 부어서 먹는 방법이다. 이건 컵라면을 먹을 때 먹는 방법인데 그냥 라면에서도 통한다. 두 번째는 공기 면치기를 시전하는 것이다. 라면이 80% 정도 거의 다 끓여 갈 때쯤 면발을 젓가락이나 집게로 들어 올려 공기 중에 노출 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면발이 또 쫄깃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매일 라면을 먹기도 했지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밥을 먹었다. 첫 시작은 아는 동생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자고 한 장소가 바로 교회였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고 집밥 같은 맛있는 밥을 주니까 한번 들리라고 했다. 내가 배고픈 걸 어찌 알고, 그 동생은 그렇게 말했을까. 커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교회에 가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밥’이라는 말에 끌려 동생을 만나러 갔다.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예배하기 전에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시간이 달콤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타지에서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외롭고, 슬프고, 힘든 내 마음을 많이 달래주었다. 이를 ‘은혜’받았다고 한다. 예배 후에 밥을 먹는 시간도 달콤했지만, 실제 교회에서 있는 모든 일이 은혜로웠다.      


나는 한번 발을 들이면 최선을 다한다. 처음에는 동생을 만나러 갔지만, 다음 주부터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게다가 예배 물품을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내린다고 해서 짐을 나르고 같이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렇게 몇 달간 열정을 다해 교회에 다녔다. 심지어 수요 예배에도 참여했다. 누가 보면 원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처럼 봤을 것이다.      


어릴 때 빼고는 교회에 간 적이 없으니 ‘새신자’(새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로 보는 게 맞다. 그런데 정말 열심히 다녀서였을까? 목사님이 나에게 ‘사역’을 요청했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기에 거절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세 번이나 나에게 부탁하셨다. 계속해서 이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존경받는 분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는 짐을 나르고, 바로 예배에 참여해서 찬송을 부르곤 했다. 하지만 내가 맡은 사역은 입구에서 그날 예배 순서가 적힌 종이(주보)를 나눠주고 안내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찬송이 거의 끝날 때쯤 들어가게 되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이 시간이 나에게 도움이 되어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책임을 지는 일을 하러 다니게 된 것이다.      


아직 크리스천으로서 준비가 부족해서였을까?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우연히 식사하러 갔다가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그 시간이 사라졌다. 그런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내 성격 탓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개인 사정이 생겼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이사를 한 후에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게 교회에서는 하루라도 빠지면 계속 연락해서 오라고 했다. 나는 예배하는 시간이 좋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하지만 나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다. 어느 곳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죄’라고도 했다. 신을 믿는 것이 먼저고, 그다음으로 인간들이 만든 장소가 아닐까. 믿음이 강하게 있다면, 가끔은 인간사에 일이 있다면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이유는 그동안 잊고 지내던 ‘은혜로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목사님은 내가 열심히 하니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게 맞다. 하지만 내가 준비가 부족했기에 우리의 타이밍은 엇나갔던 것이었다.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 후로 교회를 다시 갈 일이 없었다. 또한, 크리스천은 괜찮지만, 교회에 다니라고 강요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연애를 할 수 없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솥뚜껑 보고 놀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게 3가지 있었다. 첫째는 키가 작지 않았으면 했다. 우리 가족이 워낙에 크니까 와서 주눅이 들지 않았으면 했다. 둘째는 B형이거나 나랑 상극인 별자리가 아니었으면 했다.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셋째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했다.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 사람은 교회에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번에 내리실 역은 범계, 범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첫 출근길 나는 첫사랑을 지하철에서 만났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로맨틱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용감하다고도 말한다. 매일 성균관대역에서 1호선을 타는 그녀는 7-4번 칸을 탔다. 7-4번 칸은 금정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범계역에서 내릴 때 곧바로 계단으로 이어지는 칸이다. 일주일 정도 같이 내리니까 자꾸만 모습이 보였다.     


내 이상형과는 조금 달랐지만, 눈길이 자꾸만 가는 미인이었다. 아담한 키가 아무래도 나에게는 의식적으로 미인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 그녀를 만날 때마다 심장은 두근거렸다. 지하철을 내리고 나서는 서로 다른 길로 걸어갔다. 운명 같으면서도 운명이 아닌 듯했다. 가끔 내가 5분 늦게 나올 때면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정확한 시간에 전철을 타는 것 같았다. 내가 서둘러 나와야만 만날 수 있었다.

      

취준생에서 벗어나 9월부터 처음 일을 시작했기에 신입이었던 나는 일주일 넘게 직장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부서에 누가 일하는지 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씩 적응할 무렵 다른 부서 사람과 협조할 일이 있었다. 사내 방송 관련 업무였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만나던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흘긋 봤던 것보다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상당한 미인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본능에 충실한 내 심장이 알려줬다. 내 심장은 고장 난 시계처럼 주책없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가 뭐라고 설명하든지 상관없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설명을 부탁했다. 이번에는 집중해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심장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였지만, 점수를 깎이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로 다시 한번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내 심장 소리와 그녀의 목소리 사이에서 경쟁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날 퇴근 후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됐다. 나보다 20걸음 정도는 앞서 있었지만, 뒷모습만으로도 그녀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속도를 내어 내가 그녀를 따라잡았다. 말을 걸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때 뒤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 퇴근하세요?”     


다행이었다. 성격이 좋은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우연히 만난 것처럼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나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하철역 가시나 봐요?”

“네. 집이 수원이라서요.”     


묻지도 않았는데, 집을 알려주는 그녀. 고마웠다.     


“어? 저도 수원 쪽인데 같이 가면 되겠다.”

“그러세요? 수원 어디신데요?”

“저는 지하철 타고 우선 수원역까지는 가야 해요.”

“그렇군요? 저는 성균관대역에서 내려요.”

“덕분에 성균관대역까지 심심하지 않게 갈 수 있겠네요! 하하하”     


그녀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혼자 가고 싶을 수도 모르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내가 9월부터 근무한 신입이라는 사실과 집 방향이 같은 동향이라는 걸 어필했다. 친하게 지내자는 말을 그런 이유로 내세웠던 거다. 성격조차 미인인 그녀는 나의 말을 잘 들어줬다.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도 바로바로 했다. 어느덧 그녀가 내릴 역이 다가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번호를 묻고 싶었다. 대신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혹시 가끔 이렇게 만나면 같이 가요. 나름 동네 주민인데. 하하하”     


나는 말하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러자고 했다. 분위기를 타서 자연스럽게 번호를 물어봤다. 동네 주민이기도 하고, 같은 직장에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핑계로 물어봤다. 다행히도 그녀는 번호를 알려주었다. 번호를 서로 저장하고 나니 방송이 나왔다.     


“이번 역은 성균관대, 성균관대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첫사랑의 기준은 무엇일까?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 처음으로 사귀고 만난 사람? 아니면 사귄 사람 중에서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 사람마다 정의나 기준은 다를 것이다. 나는 첫사랑이란 처음으로 사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심으로 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어야 한다. 3일 만나고 헤어졌는데 과연 첫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지.     


나는 주로 혼자서 좋아하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혼자서 이별하기를 반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고백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한 번 좋아하면 1년 정도는 진지하게 한 사람만 생각하며 좋아했다. 다행히도 스토커는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서 많이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실제 만나지 않는 이상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현실이 아닌 꿈을 꾸는 거라고나 할까. 꿈을 꾸고 나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에 여러 감정이 든다. 아쉽기도, 허무하기도, 때론 안도하기도 한다. 실제 내 사랑은 다 그랬다.      


모태솔로로 살아가며 어느덧 29살이 될 때까지 연애 상대로 피하고 싶은 3가지를 깨지 못했다. 누가 그랬다. 1만 일이 될 때까지 연애하지 못하면 용으로 승천한다고.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여인을 만났다. 그런데 또 3가지에 걸리면 난 포기할 것인가? 그것부터 생각이 떠올랐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용으로 승천할 것인가? 나의 3가지 신조를 깨트릴 것인가?’ 이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 나온 대사처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엔딩곡)     


“중2 때까진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고백

- 2003년 1월에 발매된 델리스파이스 5집 <Espresso> 6번 트랙으로 영화 《클래식》,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7 극 중에 삽입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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