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월 추운 겨울에 태어났다. (참고로 1983년이 아니라 1984년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안 계셨다. 아니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다시 말하자면, 같은 장소에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도 수개월 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사정이 있어서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요즘 아빠들은 아내가 출산할 때가 되면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언제든 연락이 오면 바로 출산 장소로 달려나가야 한다. 때로는 출산을 함께 하기도 한다. 아내와 같이 출산한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방구냐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내가 그랬다.
나는 두 아이 태어날 때 모두 출산에 참여했다. 실제 아이를 직접 받기 위해서 교육도 받았다. 요즘 아빠들은 이 정도까지 하는데, 내가 태어나던 1980년대에는 거꾸로 이런 일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았을까?
나도 내 아이를 낳기 위해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출산에는 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정도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출산 방법은 다양했다. (생각해보니 수중 분만 정도가 더 떠오른다.) 그런데 요즘 새롭게 유행하는 출산이 있단다. 의사의 도움 없이 출산하는 방법이다. 과거에 의사가 없을 때는 일명 ‘산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아기를 받았다. 그와 같은 방법이었다. 억지로 아이를 꺼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출산한다고 하여 ‘자연주의 출산’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한때 제왕절개가 유행이었다. 아이 사주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실제 태어나는 시간까지 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본다. 의사 선생님 수술 일정이 꽉 차서 원하는 시간에 수술할 수 없어서 병원을 바꾸는 것도 봤다. 하지만 요새는 ‘자연주의 출산’이 유행이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했다. 유행이 돌고 도는 건 출산에서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자연주의 출산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쫑긋할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이 자기 아이를 제왕절개로 수술한 후에 한 행동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질에 있는 물질을 면봉에 묻혀서 아이 입술에 사정없이 발랐다고 한다. 도대체 그 의사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이가 자궁에서 엄마 몸을 통해 세상으로 나올 때 온갖 물질을 만난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바로 빼냈으니 면역력이 약해진단다. 그래서 전문 지식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 남편은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출산하느라 고생한 아내를 ‘고생했다 혹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갓난아기에게 필요한 조치를 먼저 취하다니 아내가 서운했을런지도...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이런 일화를 들으니 우리도 자연주의 출산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한테 좋다는데 뭐라도 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닐까?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아이가 엄마 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골반보다 작아야 했다. 쉽게 말하자면, 산모는 꾸준하게 운동해서 아이가 잘 나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어떤 산모는 태생적으로 골반이 작아서 제왕절개 뿐인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아내는 그렇지는 않았다.
첫째는 나처럼 겨울에 태어났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 달리 걱정거리가 생겼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는데도 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첫째는 조금 늦을 수 있고,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조바심이 났다. 우리의 계획은 ‘자연주의 출산’이었으니까...
원래 예정보다 아이가 커서 자연의 순리대로 출산하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예정일이 되었는데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우리는 자연주의 출산이라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현대판 ‘산파’ 역할을 하는 ‘듈라’라는 간호사를 배정받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계단을 오르는 운동을 해보라 했다. 단, 너무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당부도 있었다.
이틀간 아침, 저녁으로 10층 계단을 부지런히 올랐다. 내려가는 건 무릎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다. (참고로 내려갈 때는 4배 체중이 실린다.) 아침 2회, 저녁 2회 총 4세트를 했다. 이틀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한 발 한발 힘을 다했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출산용 호흡법인 ‘라마즈 호흡’도 같이 하면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진통이 오기를...
우리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도 예정일보다 3일이 지나는 날 이른 새벽부터 진통이 왔다. 아침 일찍 병원에 가야 하니까 아내는 밤새 진통을 참아내며 나를 깨우지 않았다. 남편이 아침에 운전해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혼자서 꾹꾹 진통을 참아냈다. 정말 인내심이 강한 여인이다.
그런데 아침 7시가 되어서는 진통 주기가 짧아졌다며 나를 깨웠다. 샤워하고 아침 밥을 먹으라고 했다. 얼핏 보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진통이 오면 손을 잡아줘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자세히 보니까 진통할 때 배는 점점 더 딱딱해졌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정이 있어서 나는 아내와 처가에 살고 있었다. 과거 간호사였던 장모님이 잠시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셨다. 그런데 자궁이 많이 열렸으니 서둘러 병원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때 놀란 장모님의 표정은 아직도 선명하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아무 말이 없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편하게 보내주지 않았다. 밖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운전하면서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없었다. 앞은 보이지 않고, 옆에 앉은 아내는 진통 주기가 짧아지자 많이 고통스러워했다. 어떻게든 무사히 병원으로 빨리 데려가야만 하는데, 날씨가 야속했다. 20분이면 갈 거리를 거북이처럼 기어가다 보니 2배나 걸렸다. 가는 동안 우리 담당 ‘듈라’한테 연락을 했는데, 매우 차분하게 받았다. 우리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데 차분한 태도에 서운했다. 어쩌면 안심하라고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우리 담당 듈라는 당직이 아니라 병원에 없었다. 다른 간호사가 아내를 내진했다. 그러곤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바로 자연주의 출산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 담당 듈라한테 연락했다. 다시 담당 듈랴한테 연락이 왔다. 바로 준비해서 올테니 출산 운동을 하고 있으라고 했다. 진통은 점점 더 짧아지고, 그럴수록 아내는 더 고통스러워했다. 진통 무아지경 속에서는 그동안 피나게 연습했던 라마즈 호흡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진통이 지나가면 평화를 되찾고, 틈틈이 짐볼에 앉아서 반동으로 튕기는 운동을 하거나 내 손을 잡고 왈츠 댄스를 추듯 걷기 운동을 했다. 하지만 진통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내가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여보... 아기가 아랫배 쪽으로 ‘쿵’하고 내려온 것 같아...”
때마침 우리 담당 듈라가 방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인사했다. 그리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산모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옷 갈아입고 올게요!”
살짝 비춘 모습이었지만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추운 겨울인데 머리에 물이 흥건했기에...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두 눈에 젖은 머리까지 흐트러져있으니 성난 사자가 포효하는 것처럼 보였다. 간호복을 입고 들어온 듈라는 아내를 이내 내진하더니 놀란 눈으로 외쳤다.
“어머나! 거의 다 됐네요. 금방 준비할게요. 베개에 누워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휘리릭 달려가더니 듈라는 돌아왔다. 처음 보는 장치를 아내의 팔에 감았다. 정신이 없어서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수축기에 진통이 심해지면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주기는 점점 더 빨라졌다. 빨라지는 주기만큼 아내가 고통을 참고 내는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내 심장 박동 수도 덩달아 올라갔다.
듈라는 외모는 성난 사자 모습이었지만, 산모를 위해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따스했다. 불안함을 보이는 부부를 차분하게 안정시켰다. 역시 베테랑이었다. 나도 용기를 내서 아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진통이 와서 힘을 줄 때, 같이 힘을 주어 손을 잡아주었다. 다행히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우리 부부도 서로 따뜻한 말을 건네며 서로를 응원했다. 그러던 중 듈라는 갑자기 나를 호출했다. 그리곤 조명을 서서히 줄이더니 어둡게 만들었다.
“아버님, 이제 내려와서 수술용 장갑 끼시고 아이 만날 준비하세요.”
그렇다. 자연주의 출산의 하이라이트는 남편이 아이를 직접 받는 거였다. 순간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조명이 어두워진 것처럼 내 마음의 두려움도 더 강해졌다. 아내에게 힘내라고 말을 전하고, 아래로 내려와 앉았다.
자연분만이나 제왕절개와는 달리 조명이 밝지도 않고, 높은 침대 위에서 출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 편하게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다. 아래로 내려오니 실루엣만 살짝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듈라는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이게 아기 머리에요. 머리털이 많네요. 느껴지시죠?”
동그란 머리통과 가늘지만, 잔디처럼 모여있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신기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이렇게 오래 껴있으면 큰일이 나는 건 아닌가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근데 이렇게 아기가 오래 있어도 괜찮을까요?”
“네. 아직 시간이 많지 지나지 않아서 괜찮아요. 그리고 아기는 배꼽에 연결된 줄로 숨을 쉬기 때문에 산소 공급도 잘되고 있고요.”
맞다. 아직 아기는 폐로 숨을 쉬는 게 아니었다. 심하게 긴장하니까 쉬운 상식도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내는 여러 진통 속에서 힘을 주었고, 아기 머리가 조금씩 더 나왔다. 듈라는 나에게 아기 머리 전체가 곧 나올 테니 잘 받쳐서 잡아주라고 알려줬다. 그리곤 곧바로 아기 머리 전체가 나왔다. 순식간에 머리가 180도 회전하더니 아기 얼굴이 위로 향했다. 걱정할 새도 없이 나는 쏜살같이 손을 내밀어 아기 머리 아래를 받쳐 주었다. 충격을 전혀 주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부성 행동이었다.
“이제 머리가 나왔으니 다 나온 겁니다. 산모님 조금만 더 힘내세요! 그리고 아버님! 이젠 제가 좀 도와드릴 테니 잠시 비켜주세요.”
관심법으로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는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도 듈라가 마무리 짓겠다고 했다. 아기 머리가 나온 후 어깨가 걸쳐지더니 그다음에는 순식간에 몸통과 다리까지 쑤욱 빠져나왔다. 배 아랫부분에는 탯줄이 달려 있었고, 아기는 정말 작았다. 얼굴은 주먹보다도 작았고, 몸통도 내 팔처럼 가늘었다. 살아 움직이는 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 듈라가 조용히 말했다.
“아기를 잠깐 울릴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울어야 호흡을 시작하는 거랍니다.”
아기 등을 토닥토닥 때렸더니 병아리같이 작은 입을 벌리고 ‘응애~’ 소리를 냈다. 첵에서만 봤던 혹은 말로만 듣던 진짜 ‘응애~’ 소리였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우렁찬 소리가 온방에 퍼졌다. 그리곤 금방 진정했다. 이어서 아기 손가락 개수랑 발가락 개수를 확인시켜줬다. 손가락 5개, 또 다른 손가락 5개. 발가락 5개, 도 다른 발가락 5개. 아주 다행이도 정상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손가락 발가락부터 센다더니 사실이었다.
“아버님, 세게 자르면 오히려 탯줄이 집히니까 살살 잘라보세요.”
탯줄 양쪽에 집게를 매달고는 듈라는 나에게 수술용 가위를 건넸다. 아직까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탯줄은 마치 곱창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곱창은 가위로 세게 자르면 오히려 잘 안 잘리고, 살살 달래면서 ‘사각사각’ 잘라야 한다. 그 원리대로 정말 조심스럽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탯줄을 잘랐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잘 잘랐다고 생각했다.
“어머나! 아버님! 엄청나게 잘 자르시네요?! 제가 본 아버님 중에 최고! 베스트입니다!”
칭찬을 받으니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나보고 상의를 탈의하라고 한다. 흠칫 놀랬으나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교육 시간에 배웠던 ‘캥거루 케어’ 시간이 온 것이다. 뱃살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어두운 조명의 힘을 빌려 용기 내어 상의를 벗어 던졌다.
내가 아기를 안고 ‘캥거루 케어’를 할 동안, 태반 처리 등 아내는 케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출산 과정에서 살짝 상처가 나서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등장해서 다시 분주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응급 상황에 대비하여 의사 선생님이 한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한쪽의 분주함이 영향을 주었는지 내 배 위에 있던 꼬물이는 갑자기 까만 눈동자를 보이더니 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붕어처럼 뻐끔뻐끔 입을 계속 움직이며 내 가슴까지 올라왔다. 아무래도 배가 고픈가 싶었다.
“아기가 눈을 뜨고, 자꾸 제 가슴 쪽으로 기어 올라와요!”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쳤더니 듈라가 와서 아기를 다시 푹신한 내 배 쪽으로 안정적으로 내려주었다. 알고 보니 진짜 아기들은 배고프면 눈을 뜬단다.
아내는 조치가 끝났는지 이제 좀 안심한 표정이었다. 듈라는 내 배에 있던 꼬물이를 수건으로 감사서 아내의 품에 안겨주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땀이 범벅인 아내가 꼬물이를 안고 있으니 그렇게 사랑스러웠다. 이게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느끼는 최고의 행복감이랄까? 하지만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아가는 바로 이동해야 했다. 산모가 젖이 바로 안도니 분유를 먹이러 간다 했다. 이럴 수가 만남과 동시에 바로 이별이라니...
아내는 입원실로 이동했다. 이동하기 전에 양가 어른한테 전화 돌리며 인사했다. 방금 출산한 사람이 맞냐 할 정도로 목소리가 씩씩했다. 어쩌면 이게 자연주의 출산의 힘이 아닐까 싶다. 출산 방법에 따라 회복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 출산은 빠르면 하루 만에 퇴원하고 바로 조리원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연분만은 최소 2~3일 제왕절개는 5일 이상 입원한다고 한다. 아마도 칼을 몸에 댔느냐 안 댔느냐에 따라 회복 속도가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진짜 아내는 딱 하루 만에 퇴원해서 아기와 함께 조리원으로 이동했다. 확실히 입원실보다 아늑했다. 침대도 훨씬 크고 푹신해서 남편도 자기가 편했다. 음식도 입원실보다 더 맛있었다. 매일 미역국 잔치였지만, 자율 배식이라서 마음껏 식사할 수 있었다. 일주일 출산 휴가 동안 파라다이스를 경험했다. 조리원이라 밤새 아기를 돌봐주니까 잠이 부족할 일도 없었다. 아빠와 엄마도 그리고 아기도 먹고, 자고, 싸고 아주 건강한 삶이 이어졌다.
조리원 가격도 천차만별이지만, 우리는 분수에 맞게 적정한 곳을 선택했다. 비싼 곳은 천만 원 정도 한다고도 들었다. 우리는 2017년 시세 평균인 200만 원 후반에 3주간 계약했다. 산후 마사지까지 포함하면 100만 원 더 추가! 하지만 산후 마사지는 필수라 했다. 붓기도 빼주고, 혈액순환이 돌아서 금방 회복할 수 있다고...
돈 없으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아기용품도 준비해야 하니 태어나자마자 500만 원은 순간 삭제다. 정말 가난하면 빚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출산율이 뚝뚝 떨어지나 보다.
아쉽게도 파라다이스 조리원은 3주가 최대치다. 3주 이후부터는 아기가 다 알기 때문에 조리원에서 돌봐줄 수 없단다. 무조건 퇴소다. 천국은 이것으로 끝이다. 24시간 쉼 없이 배고파서 울고, 똥오줌 싸서 울고, 졸려서 울고, 산통으로 울고 끝없는 울음과의 전쟁에 들어선다. 산모가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저승사자’를 만난다고 하는데, 진짜 고통의 시작은 ‘육아 전쟁’이란다.
입덧, 출산, 육아 중에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어보면, 사람마다 답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많이 선택하는 옵션은 바로 ‘육아’다. 왜일까? 가장 길기 때문이다. 특히 100일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옥에 사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를 모두 포기해야 하기에... 그래서 엄마들은 대단하고 위대하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요새는 아빠들도 조금 대단하다. 70년대생 아빠와 80년대생 아빠 그리고 90년대생 아빠들은 세대가 다르다고 한다. 그 기준은 ‘육아 참여’ 정도로 나눌 수 있다. 나는 80년대 생으로 딱 중간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도 출산 함께 했다고, 그리고 육아도 함께 하고 있다고 말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삶은 사치라는 걸 너무 잘 알게 된다. 나보다 위 세대 형님들처럼 했다가는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잘해야 한다.
“맞벌이 비율 높고 부부 공동 육아, 일하는 엄마 가정적 아빠 탄생!.”
2022년 11월 1일 화요일 중앙일보 부모 지면에 나온 기사 제목이다. 기사에 따르면, 11명의 양육자 중 7명(63.6%)이 맞벌이고, 자녀에 대한 경제적, 정서적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남편은 외조하고 아내는 내조한다는 건 옛말이다. 모든 걸 함께 책임진다.
물론 맞벌이라고 해도 엄마가 더 힘들다. 아무리 아빠가 육아에 집안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부성애가 모성애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커리어 우먼인 동시에 육아를 책임지는 엄마들이 위대한 이유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세대별로 육아 및 집안일 참여도가 차이가 난다. 70년대 생 형님들은 80년대 생 우리보다 확실히 참여도가 낮다. 70년대 생 남편을 둔 아내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라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내 삶이 당연한 줄 알았다. 분명히 세대간 차이가 있다. 그리고 90년대 생 동생들을 보면 또 다르다.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 80년대 생들의 삶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가 90년대 생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다.
1년이 지나 첫째가 돌이 될 때까지도 둘째 생각은 1도 나지 않는다. 100일의 기적이 아니라 100일의 기절을 경험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2년이 지나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모든 걸 잊는다. 저승사자를 만나는 ‘출산의 고통’까지 말이다.
딸 둘을 키우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온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여보... 우리 둘째 가질까?”
(엔딩곡)
“I believe in you. I believe in your mind. 벌써 일년이 지났지만... 일년 뒤에도 그 일년 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