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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09. 2023

11화. 유유상종

소설 같은 이야기



응답하라 1997! 83년생들은 중2였다. 델리스파이스 노래 가사처럼 남들은 다 첫사랑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인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곤 했다. 그땐 한 반에 학생 수가 60명 가까이 되는 시절이었다. 여자들이 앞번호부터 시작했고, 남자들은 31번부터 시작했는데 끝 번호가 62번인가 그랬으니 내 기억이 맞을 거다. 그리고 새 학년이 시작된 첫날 첫 시간에 다들 복도에 나가서 한 줄로 섰다. 키 순서대로.

      

그리고 그게 번호가 되었다. 나는 48번이었다. 중간보다 약간 큰 키였다. 더 웃기는 건 키 순서대로 앞 좌석부터 채워 앉았다. 1분단부터 4분단까지 번호순으로 두 명씩 앉았다. 그리고 다음 줄로 넘어갈 때는 바로 뒷자리부터 채워 앉았다. 지그재그로. 내 앞에는 45번과 46번이 있었고, 내 옆에는 47번이 있었다.      


우리 중학교는 근처 3개 초등학교에서 모였고, 13반까지 있어서 새 학년에 올라갈 때 2/3는 모르는 친구들이었다. 공교롭게도 45번 친구만 빼고 46~48번은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었다. 게다가 한 놈은 내 불알친구였다. 그래서 짝꿍보다는 불알친구랑 더 친했다. 하지만 짝꿍과 친해지는 계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다마고치 덕분이었다.     


혹시 다마고치라고 아는가? 다마고치는 1996년 일본에서 만든 장난감으로 조그만 기계에서 가상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임이었다. 다마고치는 ‘알’을 애칭으로 부르는 뜻으로 그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 종류가 다양해서 공룡부터 시작해서 여러 동물을 키울 수 있었다. 나는 얼리어댑터가 아니라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내 짝꿍은 달랐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이튿날 방과 후에 짝꿍한테 집 전화로 연락이 왔다.      


“혹시 다마고치 사러 같이 가지 않을래?”     


그때만 해도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삐삐가 많이 상용화되었을 때였고, 일부 사람만 현재의 KT에서 만든 시티폰이라는 게 있었다. 벽돌처럼 생긴 커다란 무전기 같은 모양에 안테나를 세워야만 통신이 터지는 그런 기계였다. 심지어 공중전화 근처에서만 터졌고, 수신은 안 되고 발신만 되는 기능을 가진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의 시조새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그때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 집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다행히 저녁 먹고 난 후라 부모님께 혼나지 않고 잠시 외출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서 이런 새로운 게임기 같은 건 게임을 파는 먼 동네까지 가야만 살 수 있었다. 짝꿍도 혼자서 20분 넘게 걸어가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연락했을 것이다. 그때는 길 가다가도 돈을 뜯기던 시절이었으니까. 오는 길에 같이 가줘서 고맙다고 아이스크림을 사줬으니 내 예상이 맞을 것이다. 아무튼지 그 이후로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제안(부탁)을 바로 수락해준 친구니까 의리가 생긴 게 아닐까.   


       


    

그 시절 유명했던 게임기로는 SONY에서 나온 제품으로 CD를 넣어서 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게 있었다. 물론 나는 그것도 없었다. 분명히 더 어린 초등학교 시절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팩을 넣어서 하는 슈퍼콤이라는 게임기(게임기 패밀리와 비슷한 기종)가 있었는데, 망가진 이후로 게임기를 살 수 없었다. 특히 중1 때 첫 시험 이후로 부모님은 내가 게임기를 사고 싶어 해도 절대로 사주지 않으셨다. 선택권은 하나였다. 오롯이 친구네 가서 하는 수밖에.     


더 어린 시절에는 생활이 빠듯해서 우리 집에는 먹는 것 외에는 소비할 여유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전거는 6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살 수 있었다. 없는 형편대로 다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다 맞다. 나는 언제나 강한 생존력을 보였다. 5살 때부터 동네 부자 친구랑 친해져서 새 네 발 자전거를 빌려 타며 배웠다. 덕분에 6살이 되었을 때 옆집 누나의 두 발 자전거를 빌려서 하루 만에 몇 번이고 넘어졌지만 바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내 것이 아니니까 빌렸을 때 최대한 ‘뽕’을 뽑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 빨리 배울 수밖에.     


심지어 초등학교 2~3학년 때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빌려서 1~2시간 실컷 탔다. 그 친구가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지 않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네는 일요일에 9시까지 늦잠을 잤다. 그래서 나는 아침 7시에 15분을 걸어가서 친구 자전거를 빌려 탔던 것이었다. 매주 찾아오니까 나중에는 그냥 일요일 아침에는 알아서 자전거 타고 가져다 두라고 허락해주었다. 자전거를 빌려 타는 것에 대한 내 열정은 남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염치없는 행동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은 자전거와 달리 금방 배우기가 어려웠다. 매일 하는 사람과는 분명히 레벨 차이가 있었다. 매일 친구네 집에 놀러 갔지만, RPG 게임이라도 하면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어야 했다. 친구는 미안한지 퀘스트를 하나 깨고 나면 축구 게임을 같이 해줬다. 덕분에 위닝 일레븐 게임을 실컷 했지만, 언제나 친구보다는 잘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한판이라도 해보려고 매일 친구 네 집에 찾아갔다. 자전거도 매주 빌려 탔던 마당에 게임 구경하러 못 갈 이유는 없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점점 더 친해졌다.     


게임은 즐겨 했지만, 내 친구들은 노는 쪽보다는 공부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유유상종이니까. 운동도 좋아했다. 방과 후에 그렇게 게임 아니면 매일 축구 혹은 농구를 했다. 점심시간에는 아직 식당이 없을 때라 위탁 도시락을 빠르게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직 중2라서 축구는 중3 형들이 허락하는 날에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운동장 한쪽 구석에 모여서 여러 놀이를 즐겼다. ‘사거리’, ‘돈가스’, ‘찜뽕’, ‘와리가리’, ‘얼음땡’, ‘다방구’ 등 매일 다양한 몸 놀이를 섭렵하였다. 뭐가 그리 웃긴지 쉴새 없이 깔깔거리며 신나게 땀을 흘리며 거친 우정을 나눴다. 별거 아닌 걸로 말다툼도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동네에 물건을 사러 갈 때면, 덩치가 큰 양아치들에게 돈을 뜯기곤 했다. 학교 안에서는 약자끼리 도토리 키재기로 자기가 더 세다고 강한 척을 했을 뿐 학교 밖에서 우리는 순하디 순한 양이었다.     





중3이 되었다. 중2 때 친했던 친구들이랑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다시 새로운 동지를 찾아야만 했다. 첫 시험 때까지는 공부에만 집중했다. 비평준화 지역이라 성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치 고등학생이 고3이 되었을 때 시험을 준비하는 것과 같았다. 그 정도로 고등학교 입시가 중요하고 치열한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시험 결과가 나왔다. 간발의 차이로 내가 반에서 1등을 했다. 그랬더니 2등 친구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1등 축하해! 다음에는 내가 꼭 1등 할 거니까 선의의 경쟁해보자!”     


원래 얼굴은 알고 지내던 친구였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 시험을 계기로 그 친구가 먼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둘도 없는 베프가 되었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중2 때 친했던 친구들과 나는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새로이 베프가 된 친구도 무리가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놀기도 했다. 그런데 성향이 꼭 맞지는 않아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는 못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out of sight, out of mind’다.     


매일 같은 교실에서 보는 친구와 다른 반에서 생활하는 있는 친구와 만나는 절대적인 시간적인 양이 달랐다. 쉬는 시간에나 중2 때 친구들을 잠깐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 시간은 중3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지냈고, 대화도 더 많이 했다. 그러니 더 친해질 수밖에. 게다가 이 친구가 다니는 학원에도 같이 다니게 되면서 더 친해졌다. 친구 소개로 학원에 등록했는데, 며칠 뒤에 치른 학원 자체 형성평가에서 1등을 하면서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향했다. 내 베프 친구는 그 후로 나를 더 신임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잘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하면 된다. 물론 싸움도 운동에 포함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강자와 약자로 나뉜다. 적어도 둘 중에 하나라도 잘하면, 강자 측에 선다.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의 신임을 얻어 든든한 ‘빽’이 생기기 때문이고, 운동을 잘하면 그냥 인정한다. 나보다 잘난 놈이라서 멋지니까.     

 

중3 때 나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일명 나는 ‘엄친아’였다. 거기에 전교 부회장이었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딱 하나 못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연애였다. 숫기가 없었다. 중3 때는 새로 사귄 베프의 무리와 자주 어울렸는데, 그 친구들도 다 똑같았다. 첫사랑은 먹는 건가 싶었다. 대신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KFC에 모여서 햄버거랑 치킨을 시켜 먹으며 우정을 더 불태웠다. 모태솔로인 서로를 위로하며...    

 

그런데 우리는 또다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조금 멀어졌다. 중3 때 친해진 베프만 나와 함께 경기 지역 명문고에 갔을 뿐 나머지는 같은 학교가 아니었기에. 종종 만나기는 했지만, 역시나 나는 새 친구를 사귀어야만 했다. 나는 문과이고, 베프는 이과라서 반이 달랐기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중학교 때와 다르지 않았던 건 딱 하나였다. 첫날 복도에 한 줄로 서서 키를 쟀다는 것. 하지만 그 외 모든 것은 달랐다. 남자부터 1번으로 시작했고, 키가 아니라 ‘이름’ 순으로 번호가 정해졌다. 그리고 일명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러 지역의 모든 중학교에서 전교 1등 아니면, 적어도 반에서 1등을 하던 친구들이 모인 학교였으니까.      


하지만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고 해도 부류는 나뉘었다. 좀 노는 무리이냐 아니냐로 갈렸다. 혹은 좀 놀지 않더라도 공부 스트레스 때문인지 흡연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학생 화장실에 가면 너구리 굴이었으니까.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가기 두려웠다. 숨쉬기가 어려워서. 선생님들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쉬쉬’하는 것만 같았다. 명문대에 갈 아이들을 괜히 훈계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학부모 등쌀에 못 이겨서 그랬나 모르겠다.     


하지만 체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명 ‘학주(학생주임)’라고 불리는 학생부장 선생님은 더럽게 무서웠다. 점심시간 축구 하다가 늦게 들어온 날에 20명 넘는 인원이 복도에 다 엎드려서 하키 채로 엉덩이를 수차례 맞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간혹 졸거나 하는 아이가 있으면 출석부 모서리로 머리를 내려찍기도 했다. 한번은 피를 흘리는 친구를 본 적도 있었다. 쌍팔년도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90년대 말, 2000년대 초 모습은 그랬다.

     

게다가 이해찬 1세대인 우리는 자율학습이 강제가 아닌 게 되면서 도서관에 모여서 주로 공부했다. 우리 학교는 파격적으로 개교 이후 최초로 입학생인 1학년들만 합반을 했다. 그래서인지 2학년과 3학년 선배들 그리고 선생님들은 도서관에서의 1학년 모습을 불편해했다. 남녀가 같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나 보다. 한번은 학생부장 선생님이 같이 있던 1학년을 불러내서 복도에서 ‘착착’ 큰 소리가 나도록 남녀 구분 없이 뺨을 때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풍기문란죄’였다. 그땐 그랬다. 스승은 하늘과 같아서 우러러볼 뿐 폭력으로 신고할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2년 아래 85년생 한 후배는 선생님이 때렸다고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차가 출동한 일이 있었다. 우리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몇 번이고 회자가 될 정도로 또 세대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아마도 선배들이 우리가 남녀가 같이 지내는 모습을 보며 놀란 것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우리 학교 여자 교복은 바지였다. 치마도 있었지만, 대부분 바지를 입고 다녀서 바지가 교복인 줄 알았다. 그만큼 보수적이고, 공부에 진심인 학교였다는 의미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 오히려 정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사회화된 친구들과는 달리 어리숙한 면이 많았기에. 나는 조별 수행평가가 있으면 다 맡아서 했다. 하지만 일부 꾀가 있는 친구들은 학원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최소한으로만 도움을 주고 자기 공부를 했다. 그랬던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도 잘 갔다. 하지만 나처럼 약아 빠지지 못한 친구들은 그렇게 좋은 성적이 잘 나오지는 못했다. 물론 나처럼 담배도 안 피우고 착실하게 지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중에 각성했는지 고2, 고3에 올라가면서 성적을 올렸고, 나를 제외하고 대부분 명문대에 진학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계속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교우 관계,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대학 자체가 다르니 자격지심에 나도 모르게 멀리하게 되었다. 마치 하나도 친하지 않았던 친구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대학에 가서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말이 있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는 관계를 맺을 때 이해관계가 없으면 잘 맺어지지 않는다고. 그만큼 이제는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순수한 관계로 지내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두 명의 오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심지어 한 명은 중간에 가족 일을 돕느라 자퇴를 했다. 그런데 10년 동안 중간중간 연락하며 잘 지냈고, 심지어 결혼식 날 내가 사회를 봤다. 지금은 배우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같이 갈 정도로 친하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친하고 신뢰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없어도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고, 서로 배려의 마음이 있다면 사회에서도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한 친구는 누나인데 거의 친누나인 것처럼 가깝게 지낸다. 누나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집에 놀러 가서 애들도 봐주고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새는 자주 못 보지만, 그래도 힘들 때 기쁠 때 소식 전하며 마음을 나눈다.      


뜻밖에도 오히려 일부 어린 시절 친구들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는다. 그때는 성향이 같지 않았지만 같은 동네에 살고 매일 본다는 이유로 금방 친해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취미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 점점 멀어졌다. 결국에 남는 건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다. 중3 때 친해진 베프와 무리에 있던 친구들은 아직도 여러 가족이 모여서 자주 모임을 한다. 게다가 결혼 품앗이로 서로 사회도 봐주고, 축가도 해주고 했더니 더 끈끈하다.     


직장에서는 친구를 사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더 사회로 나온 거니까. 하지만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정말 맞다. 결국에 비슷한 사람과 친해지고, 더 가까워진다. 친한 한 직장동료에게는 내 여동생의 영혼의 단짝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왠지 둘이 잘 맞을 것 같아서 소개했는데 딱 맞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식 날 사회를 봤다. 알고 보니 가깝고 친한 사람은 내가 다 사회를 봐준 것 같다. 거꾸로 친하니까 사회를 보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4쌍의 부부 모두 잘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다. 직장을 여러 번 그만두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있어서 나는 견딜 수 있었다. 한 명은 1살 많은 형이고, 한 명은 4살 많은 누나다. 모두 내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옆에서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맞더라. 물론 그들의 성격이 워낙 섬세해서 내가 조금만 다운된 상태일 때 힘내라고 챙겨주는 모습도 감동이었다. 그들도 내가 싫지 않고 좋다고 하니 우리는 유유상종일 것이다.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군대를 전역할 무렵 내 핸드폰에는 2,000명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사람도 자산이라는 말에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며 모은 전화번호였다. 하지만 막상 삶이 힘들고 지칠 때 통화 버튼을 눌러 만나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20대 초반에는 어릴 적 친구들은 대부분 군대에 가 있었으니 힘들 때 위로해줄 친구가 거의 없었다. 다행히 방위 산업체에서 복무하던 친구가 있어서 오랜만에 연락했는데 반갑게 대해줬다. 그때 이후로 오히려 중2 때는 별로 안 친했지만, 더 친하게 지냈다. 역시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최고다.      


나와는 달리 아내는 친구가 많지 않다. 한 손에 있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하지만 언제든 전화하면 바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사이라고 한다. 나도 아내를 만나면서 조금씩 인간관계를 정리해왔다.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은 나와 결이 맞는지 확인하며 말이다. 그랬더니 핸드폰에 남은 연락처는 100개 이하로 줄었다. 특히 결혼식 이후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누가 나의 사람인지를 말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다른 집 엄마들을 알게 되고, 점점 친해지는데 결국엔 엄마들끼리 성향이 맞아야 남는다고 한다. 아무리 애들이 나이가 같아도 혹은 잘 놀아도 엄마들끼리 맞지 않으면 가까워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아이들이 사이가 좋고 성향이 잘 맞으면, 대체로 엄마들도 잘 맞는다고 했다. 유유상종은 세대를 넘어서까지도 영향을 주는가 보다.          



(엔딩곡)     


“언제 만났었는지 이제는 헤어져야 하네. 얼굴은 밝지만 우리 젖은 눈빛으로 애써 웃음 짓네. 세월이 지나면 혹 우리 추억 잊혀질까봐.”     


*졸업

- 1997년 1월에 발매된 그룹 전람회(김동률, 서동욱)의 3집 앨범 ‘졸업’, 1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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