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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12. 2023

13화. 세대교체

소설 같은 이야기



세대교체라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면서도 슬픈 일이다. 하늘의 뜻인지 모르겠으나 집안에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집안에 새로운 식구가 생긴다. 결혼일 수도 있고, 출산일 수도 있다. 보통은 새 생명이 태어난다. 마치 균형을 맞추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리 집 첫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는 102세 나이로 돌아 돌아가셨다. 둘째가 태어난 후에는 곧이어 외할머니가 10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두 분은 동갑내기 잉꼬 장수 부부였는데, 새 생명이 태어나니 떠날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 집안에는 내 친할머니, 처 친할머니, 처 외할머니 이렇게 세 분만 남게 되었다. 아이들이 쉽게 할머니를 구분할 수 있게 별명을 붙였다. 내 친할머니는 왕 할머니, 처 친할머니는 보라 할머니, 처 외할머니는 하얀 할머니다. 내 친할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최고 왕이라는 말을 했다가 ‘왕’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분은 머리 색으로 구분하느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할머니를 헷갈리지 않고 구분할 수 있었다.     


시대가 많이 흘러 이제는 시집살이라는 말은 옛말이 된 듯하다. 오히려 요즘 시어머니들은 며느리 눈치 보느라 바쁘다. 물론 집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그런 분위기다. 강릉에 계신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우리는 처음에 두 번 설날만 빼고, 나머지 명절 때마다 귀성길에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10분 거리 가까이에 사는 처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아내 직장동료들은 추석에 시댁에 안 간다는 말에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아무튼 그런 세상이 되었다.     


한번은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때는 청약에 당첨되어 분양받은 아파트가 지어지기를 기다리느라 처가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였다. 우리 부부는 직장이 수도권 쪽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첫 설 연휴라 집을 나서며 처가 어른들께 인사드렸다. 그런데 장인어른의 말에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저희 다녀올게요.”

“이 추운데 어디 가니?”

“저희 설이라 강릉에 인사드리러 가요.”

“아... 맞다. 너희 결혼했지.”     


몇 개월 동안 매일 살을 맞대고 살다 보니 어느새 진짜 가족이 되어버렸다. 나도 순간 내가 어릴 때부터 이 집에서 나고 자란 거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장인어른도 그렇게 충분히 생각하실만했다. 매일 같이 살던 애들이 명절인데 짐을 싸서 집을 나간다고 인사를 하니까 진짜 어딜 가나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워낙 머리 회전이 빠르신 장인어른은 바로 이해하고, 웃으며 배웅해주셨다.     


“운전 조심히 잘 다녀와라. 사돈어른들께 안부 전해드리고.”     





아내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서 보내는 첫 명절이었다. 아버지가 장남이라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설 전날에는 미리 음식을 했다. 어김없이 전날에 내려갔는데 현대판 시어머니는 우리가 내려오기 전에 미리 음식을 싹 다해놓으셨다. 멀리 운전해서 오는 것만으로도 피곤할 텐데 무슨 음식까지 하냐며 그런 거였다. 본인들은 과거에 다했으면서도 다음 세대로 넘기고 싶지는 않은가 싶었다.      


옛날에는 대관령이 아리랑 꼬부랑 길이라서 안 막혀도 4시간은 족히 걸렸다. 게다가 국도 만 있어서 명절 때는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10시간도 걸렸다. 그렇게 힘들게 내려와서 시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음식 하느라 허리 잡고, 무릎 잡아가며 일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살았으니 제사라면 질색할 수밖에.      


실제 어머니는 명절증후군이 있었다. 명절만 다가오면 이유 없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우황청심환을 드시곤 했다. 시어머니가 성격이 대단한 분이라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렇게 구박을 했다. 어머니가 50세가 되었을 때 쓸개가 막혀서 떼어냈다. 그때 딱 결혼한 햇수만큼 쓸개에 꽉 껴있던 돌조각이 나왔다. 쓸개가 화를 참도록 도와주는 기관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동안 시집살이하며 참느라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쓸개를 떼어낸 후로는 참을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어머니는 수술 이후로 이제는 화가 나면 참지 않고 그냥 다 말하게 된다고도 했다. 쓸개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대신 수술 경험 때문인지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악습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아들 내외가 내려오기 전에 미리 혼자서 전을 다 부치신 게 아닐까.     


덕분에 나와 아내는 바다 구경도 하고, 집에서는 편하게 TV 보며 편하게 쉬었다. 시아버지도 덩달아 처음 명절에 인사 온 며느리를 편하게 해주신다고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두 분이 쓰시는 안방 침대에 편히 누워서 있으라고 한 것이다. 아내는 정말 그래도 되나 처음에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시범을 보이시며 편하게 누워있으라고 시늉을 하자 아내는 못 이기는 척 편히 누워서 TV를 봤다. 두사부일체 영화에 나왔던 대사처럼,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않을까?     


반대로 나는 처가에서 반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본가에서는 다들 다리가 길어서 다리 펴고 편하게 앉아 있는 걸 다들 선호했다. 무릎 구부리고 앉으면 아프니까 다들 그게 당연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거실에서 TV를 볼 때 다리를 쭉 펴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때 장인어른이 헛기침하며 잠시 나를 불렀다.   

  

“어른들 있을 때는 다리 펴고 있는 거 아니다.”     


나는 바람에 게눈 감추듯 재빠르게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순간 여기가 내가 살던 집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서운할 것도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금방 장인어른은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다리 펴고 편하게 있어라. 생각해보니 아빠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미안하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린 시절에 장인어른의 아버님 그러니까 아내의 친할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무릎 꿇고 앉는 게 일상이었다고. 평생 그런 삶을 살아왔는데, 사위라는 놈이 떡하니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으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인어른 또한 요즘 어른인지라 태세 전환을 빠르게 하셨다. 그때 딱 한 번 빼고는 정말 편하게 해주셨고, 항상 내 의견을 먼저 물어주셨기에.     


     


     

나는 장인어른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냥 인간으로서 멋진 사람이다. 모든 면에서 다 갖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의 변화에 맞게 자기 자신을 바꿀 줄도 안다. 윗사람을 공경하는 건 기본이고, 아랫사람 혹은 주변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도 멋지다. 사위에게 바로 사과할 수 있는 장인어른은 몇이나 될까. 게다가 30년 가까이 이어오던 제사를 아내가 힘들어하니까 다 없애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다 읊기가 어렵다.     


인품과 성품도 좋으시지만,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나보다 20년 넘게 나이가 있으시지만, 운동을 매우 잘하신다. 50대 중반에 축구랑 농구를 뛸 정도니까 정말 대단한 거다. 게다가 축구를 할 때는 빠르게 달리고, 체력도 좋아야 하는 ‘윙’으로 뛰셨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배드민턴, 볼링, 탁구, 배구 등 다른 운동도 다 잘하신다.      


심지어 탁구는 나와 칠 때는 왼손으로 쳐주신다. 오른손으로 보내는 공을 내가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축구나 농구 정도만 아직 내가 젊고 과거에 내가 더 많이 한 운동이라 조금 더 잘한다고 할까. 나도 운동 신경이 없는 게 아닌데도 뭐하나 이길 수가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PC 게임도 잘하신다. 특히 스타크래프는 프로게이머를 연상케한다. 처가 친척들이나 아버님 지인들과 종종 편을 먹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상대도 안 됐다. 탁구 실력과 거의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나. 바둑이나 장기 같은 다른 정적인 게임도 수준급으로 하신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는 오목을 잘 두는 편이다. 실제 고등학교 때 반에서 오목은 1등이었다. 하지만 바둑과 장기로 단련된 10수 가까이 미래를 보는 고수와의 경기는 고전을 피할 수 없었다. 경기 내내 머리에서 쥐가 나서 죽을 뻔했다. 나는 일반인에 비해 2~3수 정도 더 많이 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좌절감과 동시에 경외심이 들었다. 원래 나보다 잘하는 고수를 만나면 존경심이 생기는 법이니까.     


게다가 내가 골프가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골프채도 사주시고, 레슨도 한 달 끊어주셨다. 그리고 내가 요청할 때마다 스크린 골프장에 데리고 가서 함께 쳐주셨다. 고수가 초보를 데리고 그렇게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실내가 아닌 실외 연습장에도 데려가 주시고, 두 달 뒤에는 함께 갈 사람들을 모아서 골프장에서 머리를 올릴 수 있게 해주셨다.      


사람은 말보다 행동에 감동한다. 내가 장인어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는 이유는 다름 아닌 먼저 보여주신 행동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이루 말할 것도 없다. 장모님이 3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동안은 바깥 일로 어머니의 고충을 몰랐다가 나이가 들어 좀 여유가 생기자 함께 집안일도 하고 어머니를 살피니 역지사지의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제사를 없앤 이유도 그래서다. 그런 행동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설 명절에 나 혼자 본가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아버지한테 장인어른 이야기를 하며 우리도 제사를 없애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그랬다가 핵폭탄을 맞고 말았다. 나는 좋은 의도로 말한 것인데, 아버지는 기분이 많이 상한 듯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아주 독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말씀하셨다. 살기가 느껴져서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시집살이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며느리들이 시댁에 ‘시’자만 들어도 기겁한다는 말이 있나 보다. 실제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도 모르게 처가로 돌아와서는 말실수했다. 처가 어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돈어른들은 잘 계시냐는 말에 내가 엉뚱하게 대답한 것이다.     


“네. 시댁 어른들은 잘 지내세요.”    

 

맙소사. 시댁이라니. 어느새 나의 본가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닌 ‘시댁’이 되어버렸다. 처가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편하니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도 나는 시댁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보다 장인어른과 대화를 더 많이 한다. 다른 집 사위들은 처가에 가면, 어색해서 서로 핸드폰만 쳐다보고 대화가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장인어른과 둘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잘 나눈다. 드문 광경이기는 하다.


          


   

소설 같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처가에서의 삶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내가 처가에 살고 있을 때, 아내의 외할머니는 외국에서 지내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집을 마련해둔 게 아니라 갈 때가 마땅히 없으니 막내딸 집으로 온 것이다.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하얀 할머니는 며느리가 불편해 막내 사위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제로 시골집을 팔고 할머니가 묵을 집을 구할 때까지 두 달 가까이 같이 살았다. 우리도 한 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으니 도대체 몇 가구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것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봐서일까? 하얀 할머니가 혼자 계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내가 먼저 처가 어른들한테 말씀드렸다.      


“하얀 할머니 당뇨도 있고, 허리디스크도 있으시잖아요. 혼자 사시면 힘드실 테니 저희가 같이 모시고 가면 어떨까요?”     


차마 사위한테 부담 주기는 싫어서 그 옵션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해결책에 반색하며 되물으셨다.   

  

“너희 결혼 후 아직 한 번도 신혼이 없었는데, 정말 괜찮겠니?”

“네. 그럼요. 아기 엄마가 조금 힘들겠지만, 저희는 생각이 같아요.” 

“우리야 너희가 그래 주면 염치없이 고맙지만, 차마 입에서는 말이 안 떨어지네.”

“정말 괜찮아요. 저희도 많이 고민하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와 아내는 결혼 후 5년 동안 신혼 생활이 없었다. 신혼은 맞지만, 단둘이 살거나 혹은 우리 가족 네 식구만 산 적은 없었다. 하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작년에 하얀 할머니는 병을 앓던 아들을 잃었다. 그래서 또 외국에 있는 딸네 집으로 옮겼다. 몇 년 전 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래서 잠시 외국에 몇 년 동안 나갔던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서인지 할머니가 천식 증세를 보여 어쩔 수 없이 의료지원이 되는 한국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돌아오셔서는 병세가 더 심해졌다. 결국에 병원에 입원했고,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최근에 함께 살아서였을까? 우리는 5년간 한 식구였다. 밥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식구라 부른다고 하니까. 자주는 뵙지 않았어도 어린 시절부터 더 오랜 추억이 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장례식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흘렀다. 금방이라도 ‘애비야~!’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때도 참여하지 않았던 장지까지 모셨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는 정말 괜찮았는데, 하얀 할머니는 항상 고맙다는 말보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셨다. 특히 내가 식사를 챙겨드리는 날에는 눈물까지 보이셨다. 그때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더 좋다고, 아기들 많이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마음이 좀 안심이 되셨는지 어릴 적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다.     


종종 할머니의 6.25사변 때 눈밭에서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도, 귀신이 보였던 이야기도, 쓰러져 가는 집에 살 때 있었던 도깨비 이야기도 기억난다. 처 친할머니도 아니고, 외할머닌데 보통 사연이 아니면 이런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주변 지인들은 우리 부부가 참 대단하다고 종종 칭찬하거나 놀라곤 했다.   

        

나는 사실 샤워 후에 팬티 바람으로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 빼고는 단 하나도 불편한 게 없었다. 오히려 함께 산 세월만큼 할머니와 공유한 추억이 많아서 좋았다. 하지만 그날이 왔고, 세대교체의 시기는 피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처남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이렇게 글을 쓰니 문득 하얀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 거기선 편히 계시죠?’          





누구나 집마다 사정이 다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40년 가까이 산 외숙모는 시집살이만 40년을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외할머니는 순하셨는데, 문제는 가끔 폭주하는 고약한 성격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래서일까 외할아버지 먼저 돌아가셨다. 그때 그 집안에 달라진 점은 외숙모가 사위를 맞이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3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 외숙모는 손주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계속 세대교체가 일어나니 다음이 예상된다. 내 동생이 아기를 낳을 때쯤엔 지금 90이 넘은 왕할머니가 안 계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둘째 계획이 있는 처남네가 둘째를 낳으면, 그때는 현재 100세이신 보라 할머니가 안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할아버지가 될 때도, 내 아내가 할머니가 될 때도 세대교체는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우리가 노인이 되는 시기에는 수명이 120세가 될 수도 있다는데, 그렇게 되면 자녀가 아니라 손주가 결혼할 때나 세대교체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나와 같은 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이제 막 마흔이 되었고, 과로사가 가장 많은 시기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모여서 나눈 첫 번째 주제는 건강이었다. 마음은 아직 20대인데, 몸은 40대라 좀처럼 따라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주제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였다. 노인이 되기도 전에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또 반대로 언제까지 오래 살지도 모를 일이니까.      


과거에는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한 세대가 40년 50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2말 3초가 결혼 적령기였다면, 지금은 3말 4초라도 늦은 느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흔만 되어도 노총각, 노처녀라고 했는데, 요새는 그냥 총각, 처녀니까. 도대체 몇 살부터 ‘노’자를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글로벌’하게 ‘싱글’이라고 하면 되겠구나.           



(엔딩곡)     


“공수레! 공수거! 거품처럼 사그러질 것들 욕심을 버리고 하늘을 봐- 그대를 노려보는 눈이 느껴지는 가!.”

     

*열맞춰! (Line up!)

- 1998년 9월에 발매된 아이돌 그룹 H.O.T의 3집 앨범 ‘Resurrection’, 2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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