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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11. 2023

12화. 역마살

소설 같은 이야기



역마살(驛馬煞)은 살의 일종으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는 운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주명리학에 따르면, 역마살이 있는 경우 쉽게 말해 ‘이동’을 의미한다. 이사할 수도 있고, 여행할 수도 있고, 직장을 옮길 수도 있고, 결혼할 수도 있다. 결혼은 아마도 집을 떠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풀이하는 것 같다.

      

실제 노총각, 노처녀 중에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은 역마살을 풀어내 버려서 결혼 못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결혼하고 싶다면, 여행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역마살을 풀어내면 안 되니까.    

 

항상 연말이 되면 외할아버지가 토정비결을 푼 종이를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외가에 무당이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사주명리학을 대대로 이어 공부해왔다. 외증조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뒤늦게 어머니도 금세 배워서 사주를 읽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마흔이 된 나도 우연히 어설퍼도 직장 동료한테 사주 푸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요새는 만세력 앱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힘들게 한자를 적어가며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으로 역마살을 풀어버린 사람들이 결혼 못 한다는 이야기도 스승한테 배워서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완전 초보다. 큰 틀에서만 해석할 줄만 알지 어떻게 상성이 되는지 그런 건 잘 모른다. 게다가 좋은 것만 볼 줄 알지, 일부러 안 좋은 건 안 배우고, 공부도 안 했다. 괜히 안 좋은 것만 계속 생각날 것 같아서 그랬다. 실제 우리 인간이 뇌는 부정적인 걸 더 잘 떠올린다고 하니 더욱 피해야만 했다. 모르면 모르고 지나갈 것을 괜히 사주 때문에 생긴 일이 되는 게 싫었다.     


내가 사주명리학을 잠깐 공부했던 걸 장모님이 아시면, 팔짝 뛰고 놀랄 일이다. 장모님은 신실한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반전으로 장모님은 예지몽을 꾸신다. 하지만 꿈에 하나님이 나와서 무언가를 알려준다고 했다. 꿈에서 내가 사위 될 사람이라고 했기에 크리스천이 아니었어도 무사히 통과였다.      


장모님이 물이 들어오는 꿈을 꿨을 때 내가 만 원 주고 사서 지금 우리 보금자리 아파트를 분양받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커다란 복숭아를 따는 꿈을 꾸셨다길래 오만 원을 주고 샀는데, 알고 보니 처남댁이 임신한 거였다. 매번 꿈 특성에 맞게 아주 정확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좋은 꿈을 꾸면 꼭 알려달라고 말씀드려두었다. 이번엔 로또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월급쟁이가 돈을 벌어봤자 한계가 있다. 매년 규칙적으로 나가는 돈이 있는데, 버는 건 똑같으니 대비해야 했다. 1월에 자동차세, 7월과 9월에 재산세, 11월에 자동차 보험 등 갑자기 큰돈이 나가니까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꾀를 내어 1년 단위로 적금을 들었다. 조삼모사지만, 그래도 한 번에 돈이 나가는 것보단 나으니까. 매달 조금씩 적금으로 돈을 저축했다.      


게다가 결혼 10주년에는 다시 하와이를 가기로 했기에 돈이 필요했다. 가전제품, 자동차 등 기계들도 10년 정도 쓰면 바꿔야 하니까 목돈이 든다. 적금을 하나씩 늘리는 재미에 빠졌다. 1년 정도 지나니 꽤 모인 적금도 있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하루 동안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는 일이 있었으니. 그리고 큰 결심도 하게 됐다.     


나는 연어 킬러였다. 회 중에서도 연어를 가장 좋아했다. 참고로 과거형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연어를 안 먹기 때문이다. 하루는 처가 식구 모두 횟집에 저녁 식사하러 갔다. 스끼다시가 많이 나오는 집이라 꿀맛이었다. 매운탕까지 국물이 일품이었다. 어른들은 내가 연어를 좋아하는 걸 아니까 양보해서 다 나에게 몰아주었다. 기분이 째졌다.      


혼자 다 먹으려니 양심에 찔려서 내 근처에 앉았던 아내와 처 외할머니한테는 조금 건넸다. 우리 집 첫째는 아직 어려서 먹을 기회가 없었지만, 같은 집에 사는 식구들만 연어 파티를 열었다. 분홍빛 윤기가 흐르고 연어 떼깔이 고왔다. 눈으로 한 번, 코가 찡긋거리는 양파 소스 냄새로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쫄깃한 식감으로 세 번이나 맛있게 먹었다. 맛있어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도 계속 입안에 침이 고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가 창백한 얼굴로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곤 갑자기 꽥꽥거리며 헛구역질했다. 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어? 설마? 둘째?”     


아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많이 힘든지 한 마디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좌우로 흔들기만 했다. 그러더니 잽싸게 화장실로 튀어갔다. 곧 티라노사우르스가 거칠게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래서 화장실로 가보니 아내는 변기를 붙잡고 위에 있는 음식을 모두 게워냈다. 그 장면을 목격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나도 살짝 괴로워서 인상을 찌푸려졌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약을 찾았다. 속이 안 좋을 땐, 미국에서 물 건너온 ‘Bismol’이라는 핑크색 약이 효과가 직빵이라 넉넉히 컵에 따라 마셨다. 보통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조금 부족한가 싶어 조금 더 따라 마셨다.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오히려 속이 더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쓰나미가 곧 밀려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 멀미가 심했다. 그래서 구토를 시도 때도 없이 했다. 아마도 비위가 약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로는 구토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 위기도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몸은 살고 싶었나 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 끝에 음식물이 넘어오는 게 느껴졌다. 화장실로 급히 달려가다가 아직도 변기를 붙잡고 있는 아내를 보고, 다시 급히 안방 화장실로 가려는데 견딜 수 없었다. 급한대로 싱크대로 향했다.     


싱크대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구토를 했다. 내 안에 숨어있던 폭군 도마뱀 티라노가 나왔다. 나도 ‘크헝크헝’ 소리를 내며 위 세척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 게웠다. 싱크대는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주홍빛과 찐분홍이 섞여서 마치 상암동 하늘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핑크뮬리 천지가 된 듯했다. 불현듯 갑자기 90년대 후반에 봤던 충격적인 영상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만든 ‘노란 국물’ 영상을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아마도 같은 느낌이라 그런 것만 같았다. 아주 다행히도 싱크대에는 음식물처리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처리하면서까지 구역질할 필요는 없었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도 글 쓰면서 헛구역질이 난다.      


‘으-웩-’     


속을 다 비웠는데도 타격이 컸다. 배가 계속 아팠다. 이제는 아래로도 모든 걸 내보내려는 것 같았다. 화장실을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모르겠다.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우리와 함께 살고 있던 처 외할머니가 갑자기 속이 안 좋다고 했다. 핑크약을 드렸다.      


역시나 할머니도 아내와 나와 같은 수순을 밟았다.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이가 많을수록 반응이 늦게 왔던 것이었다. 아내가 가장 젊고, 그다음 네 살 많은 내가, 그리고 오십 살 많은 할머니가 순서대로 시간 차이를 두고 반응했으니까. 그때 시간이 밤 11시 정도였다. 6개월밖에 안 된 아기 혼자 두고 응급실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랑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꼭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가장 먼저 회복했다. 역시 젊음은 젊음이다.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자 장모님한테 SOS를 쳤다. 아기가 자다가 깰 수 있으니 봐달라고 부탁했다. 처가 어른들은 차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어서 금방 도착했다. 아내가 운전대를 잡고, 그 늦은 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수원의료원 응급실에 자정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당직을 서고 있던 의사가 놀라며 우리를 맞이했다. 특히 80대 하얀 할머니가 부르르 떨며 ‘아이고~ 나 죽네~’하며 소리치니 놀랄 수밖에. 웃긴 건 환자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 모두 같은 증상이라고 하니 의사는 화를 냈다.      


“도대체 음식 먹는 곳이 어딘가요?!”     


아무리 응급실이라도 우리가 안 왔으면, 편하게 잠이라도 잘 수 있었을 텐데 언짢다는 티를 냈다. 물론 우리한테 대놓고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횟집을 탓하며 욕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는 식중독이 발생하면 보고가 필수라고 했다. 그러니 진료가 끝나면 바로 쉴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이 더 늘어날 수밖에.

     

몇 십분 간의 진료가 끝나고 세 명이 응급실 침대에 나란히 조르르 누웠다. 진통제와 항생제가 들어간 링거를 순서대로 맞았다. 진통제 덕분인지 통증은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잠은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엉덩이 쪽에 화재가 아직 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링거 바늘을 팔에 꽂은 채로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덕분에 간헐적으로 쪽잠을 잘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새 거의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링거를 다 맞았는데, 할머니 수액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꽤 많은 양이 남아 있었다. 간호사한테 말했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링거 방물이 떨어지는 속도를 올렸다.      


그랬더니 금방 끝났다. 긴 시곗바늘이 정확히 숫자 ‘4’를 가리켰다. 하필이면 숫자 4라니... 마치 우리에게 죽음을 알려주려는 것만 같았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옥의 불맛을 봤다. 엉덩이 쪽 화재도 진압되었지만, 시커멓게 불에 탄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구토 이후로 여기저기서 10번도 넘게 화장실을 갔으니 그럴 수밖에.     


병원 진료비가 생각보다 비쌌다. 역시 새벽 응급실 진료비라 평소의 몇 배였다. 하지만 돈이 문제는 아니었다. 죽다 살아났으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도저히 출근은 할 수 없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얼마나 힘이 있다고. 그리고 속을 달래야 하니 종일 죽만 먹으며 회복해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행히 현생으로 복귀한 부부는 우리 삶이 얼마나 유한한지 깨달았다. 아프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후회 없이 살자고 결심했다. 역시 사람은 큰일을 겪어야 변한다. 그동안 모았던 적금 중에 당장 쓸 일이 없는 통장은 모두 해지했다. 대신 그 돈을 모아서 삶을 떠나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오는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이왕이면 해외로.      


1년이라고 해봤자 모은 돈이 얼마 안 되니 우선은 가까운 곳으로 가기로 했다. 아기도 어리니 오랜 시간 비행은 무리였다. 여러 이유로 우리의 첫 여행지는 일본 도쿄였다. 10개월 된 아기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식이 용감이라는 말이 딱 맞다. 용감했으나 무식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를 데리고 다니려니 계속 아기 띠에 메고 있어야 했다. 그러니 한 사람은 밥 먹을 때 뜨거운 게 있으면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먹어야 했으니까.      


긴자에서 먹었던 고급 우동집, 도쿄역에서 먹었던 오코노미야끼, 신주쿠에서 먹었던 돌판에 구워 먹는 규가츠와 라멘, 하코네 온천 숙소의 코스 요리. 아직도 환생 후 첫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역시 첫 경험의 위력은 대단한듯하다.      


아기가 생후 24개월 미만, 키는 76cm 이하, 몸무게는 14kg 이하면 앞자리에 베시넷을 설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자리도 다리를 편하게 뻗고 갈 수 있는 자리로 배정된다. 10개월짜리 아기였으니 우리는 당연히 그 혜택을 누렸다.      


1년 후인 다음 해 1월에도 첫째는 베시넷 기준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비행기 삵도 아끼고, 편한 자리에 앉아서 필리핀 세부에 다녀왔다. 막탄섬에 있는 샹그릴라 호텔에서 일주일 가까이 머물며 한없이 마사지 받으러 다니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때는 친한 친구네와 같이 갔던지라 남편팀, 아내팀이 서로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맡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텔 안에 전용 바닷가가 있어서 참 좋았던 기억도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부에 갔을 때 사실 둘째도 아내의 뱃속에 들어 있었다. 아마도 해외여행을 경험한 생명체 중 최연소이자 가장 작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식중독으로 고삐가 풀려 마구 부리던 우리 부부의 역마살은 또 다른 질병으로 멈추게 되었다. 2019년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 2020년부터는 (해외)여행은 저세상 이야기가 되었으니. 우리에게도 선택권이 없었다.     


방역 수칙 및 인원 제한으로 다들 결혼도 미루고, 결혼해도 신혼여행 목적지는 다들 제주도였으니. 일반인은 비행기 안에서 계속 마스크를 쓰고 오랫동안 있기도 힘들고, 행여나 감염자가 타서 코로나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지금은 다시 마스크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때는 바이러스가 강해서 걸리면 죽을 가능성이 클 때였으니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2022년 초부터 다시 분위기가 괜찮아지면서, 우리는 역마살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해외여행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가야 했으니까. 그래서 만만한 제주도로 향했다. 둘째는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로만 듣고,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큰 비행기를 처음 보니까 신기했나 보다.

      

2023년 초까지 계속 코로나가 완벽히 풀리지 않아서 아쉬운 대로 다시 제주도를 선택했다. 그랬더니 둘째는 매년 무조건 제주도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래서 경험이 무섭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가능하면 더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단, 우리 아이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는 비혼주의가 아니라면, 여행을 지양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크리스천이지만, 한국에 사는 한 역마살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올해 이유가 있어서 휴직했다. 아쉽게도 무급이다. 넉넉지 않으니 휴직이라도 소소한 일은 해야 했다. 그래야만 생활 가능하니까. 그런데 여행은 꿈도 못 꾼다. 4명 가족이 한번 떠나려면 에어텔만 해도 금방 수백만 원은 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가 어른들이 손을 내밀어 주셨다. 내년에 복직하면, 오랜 기간 외국에 나갈 기회가 없을 테니 다녀오라고. 무려 두 달 동안 미국 이모 집에 가서 지내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선 듯 알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달이면 비용이 어마어마해서 그랬다. 우리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모르겠다. 모든 비용을 지원해 줄 테니 몸만 가라고 했다.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장모님, 아내 그리고 두 아이는 두 달 동안, 그리고 나는 벌인 일이 좀 있어서 수습하고 가느라 한 달 동안, 미국 라스베이거스 부근 도시에서 지냈다.     


나는 ‘꿩 먹고, 알 먹고’였다. 한 달 동안은 자유 남편으로 홀가분한 삶을 살 수 있었고, 나머지 한 달은 미국 서부 여행을 할 수 있었으니. 물론 대가도 있었다. 평소와 달리 아이들과 하루 내내 붙어있어야 했으니까. 아무리 80년대생 아빠라도 일터에 나갔다가 돌아와 저녁에 잠깐 만나는 육아 시간을 버티는 것과 한 달 내내 1초도 빈틈없이 육아하는 건 큰 차이를 느꼈다. 머리는 좀 비울 수 있었어도, 항상 몸은 힘들었으니까.     


일주일 LA 여행을 위해 차를 끌고 갔다. 편도 5시간은 내 삶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운전 시간이었다. 게다가 나를 닮아 멀미가 심한 첫째 때문에 운전하면서 여러 번 위기가 왔다. 마침 디즈니랜드는 100주년이라 사람이 미어터졌다. 밤 10시 100주년 기념 불꽃놀이는 놓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이미 잘 시간을 넘긴 아이들이 잠들어서 주차장까지 안고 걸어가는데 허리가 끊어질 뻔했다. 우리는 그래서 그 후로 디즈니랜드를 이렇게 부른다.      


‘디질랜드’     


정말 뒈지는 줄 알았다. 즐거운 추억도 있지만, 그 추억을 만들기 위해 대가는 많이 컸다. 다시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에는 첫째가 구토해서 난리가 났다. LA에 갈 때는 일부러 애들 자는 새벽 3시에 출발해서 괜찮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낮에 점심까지 먹었으니 완벽한 판단 실수였다.     


미국 두 달 살기의 마지막 여행으로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그랜드 캐년에 당일치기로 갔었다. 왕복 10시간 운전은 고달팠다. 아주 다행히도 갈 때는 새벽이었고, 올 때는 밤이라 애들이 잘 잤다. 다만 푸르른 애리조나 도시에서 고독한 사막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길에 졸음과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으나 마지막 반전이 남아 있었다.     


돈 좀 아껴보겠다고, 경유로 비행기 표를 끊은 게 화근이었다. 내가 LA공항에서 내려서 입국 심사를 받았는데, 짐이 계속 안 나와서 위기가 있었다. 간신히 짐을 찾고 겨우 갔더니, 탑승 시간 딱 2분 전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비행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약과였다. 혹은 복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큰일이 생겼다. 기계로 아무리 체크인하려고 해도, 둘째가 검색되지 않았다. 근처 직원한테 문의했다. 하지만 직원은 둘째 아이의 예약 정보를 가지고서는 전산에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계속 부탁했다.   

  

그랬더니 직원이 본사에 전화를 걸어본다고 했다. 옆에서 듣자니 둘째는 이미 아침 비행기를 탔어야 했는데, 탑승하지 않은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국내선이라 그런지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서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작지만 큰 실수 때문이었다.     


 비행기 표를 예약할 때 아들을 첫째랑 같게 한다고 성별을 ‘Ms.’ 그대로 둔 것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항공사에 전화해서 성별 변경요청을 했는데, 누구의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비행기 정보가 바뀌었던 것이었다. 하마터면 미국에서 둘째를 잃어버릴 뻔한 아찔한 일이었다. 만일 빈자리가 없었으면, 아들은 두고 와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엔딩곡)     


“파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비행기

- 2006년 7월에 발매된 그룹 거북이의 4집 앨범 ‘거북이 사요!!’, 3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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