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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16. 2020

<16>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공식

부정적인 감정의 긍정적 기능

우리 몸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증상이 나타난다. 감기에 걸려도, 발목을 삐어도, 배탈이 나도 몸에 열이 나면서 많이 아프다.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도 문제가 생기면 증상이 나타난다. 열등감, 죄책감, 상실감 등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를 괴롭힌다. ‘부정적(negative)’이라는 말은 대부분 안 좋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증상 덕분에 긍정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더 나빠지기 전에 멈춰달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심리학》의 저자인 박홍순 작가는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 몸과 마음을 보호하는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했다. 인류는 오랜 기간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 위협을 섬세하게 감지해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을 여러 방식으로 매우 민감하게 설계하며 진화를 거쳤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안해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기 위한 신호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불안, 두려움, 공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경우에는 범죄를 저지를 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적다고 했다. 자신이 겪을 공포에 대한 불안이 없기에 태연하게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는 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갖게 된다. 특히,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20대에 자기효능감과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에 있었던 나조차도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특히 대학교 3학년 ROTC 1년 차 생활할 때는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2000년대 중반 군에서는 논산훈련소 인분 사건을 계기로 부조리한 구타 및 가혹행위 근절을 위해 힘쓰는 시기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과도기에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참고로 ROTC는 대학교 2년 동안 장교 후보생으로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고 학군 장교로 임관하는 과정이다. 1년 차와 2년 차로 학년이 나뉘다 보니 후배들은 선배들이 교육하는 대로 따라야 할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사회보다는 아무래도 군대에서 ‘복종’에 대한 개념이 강해서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시기적으로 구타에 대한 처벌이 강했기에 구타는 당하지 않았지만, 교육을 명분으로 한 가혹한 ‘훈육’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특히 후보생이 된 첫 두 달은 길을 가다가 선배를 못 보고 지나가서 경례를 안 했다는 이유로 연대책임이라는 명분 아래 집합해서 ‘훈육’을 받았다.           


그렇게 ‘복종’, ‘전우애’와 같은 군인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선배들은 기존 방식으로 우리를 교육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교육방식이 지나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왜냐면 실제 장교로 임관하여 야전부대로 나갔을 때는 그렇게까지 비상식적인 ‘훈육’은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가 갑자기 강한 군대 문화를 겪었기에 매일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ROTC에 지원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병사로 군 생활을 하면 명령에만 따르는 수동적인 삶이 될 테니, 장교가 되어 주도적으로 군 생활해보자.” 근데 막상 장교 후보생이 되어서는 ‘주도성’보다는 ‘무조건적 복종’의 가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게 됐다. 또한, 공포, 인격 모독, 열등감, 걱정,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이 들게 만드는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둘까’하는 생각을 했다.         

  

말로는 ‘장교가 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훈육’을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장교로서의 ‘정체성’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렇게 후보생 생활이 두 달이 되어 갈 때쯤 우리는 5월에 있을 축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하루는 학군단장님께 중간보고를 해야 해서 저녁밥도 못 먹고 밤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한 적이 있다. 아무리 보고가 중요하다고 해도 다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 먹을 시간은 확보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거기까지는 잘 참고 견뎠는데, 집에 가는 길에 일이 터졌다.           


나는 1년 차 임원 후보생이어서 항상 비상연락 완료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근데 최초 비상연락을 돌리는 1년 차 다른 임원 후보생이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전화상으로 엄청 욕을 먹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최초 1단계인 ‘식욕’도 충족이 안 된 상태에서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그냥 화가 난다는 이유로 ‘쌍욕’을 해대니 나도 모르게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 다행히 잘 참아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제정신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늦게 귀가한 아들에게 “저녁은 먹었냐”라고 어머니는 물으셨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힘없이 “아직 먹지 못했다”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밥을 차려주시고 식사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셨다. 그때 나도 모르게 속으로 하던 말을 밖으로 내뱉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라는 말을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그래. 많이 힘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고 하셨다. 보통 어머니께서는 내가 무언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위로해주시면서 격려를 해주셨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라고 권하시는 건 처음이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평소 아침에 깔끔한 단복을 입고 나가서 저녁마다 땀에 흠뻑 젖어서 들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그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말씀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식이 힘들어하니 자식 편을 들어주고 싶었던 거라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만둬’라고 말씀하셨지만, ‘얼마나 힘들면 그 정도까지 말하겠니’라고 하는 응원의 메시지로 들렸다. 만일 그날 내가 가진 ‘부정적인 생각’을 혹시라도 어머니께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렇게 나는 혼자 괴로워하다가 정말 그만뒀을지도 모르겠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혼란’ 속에서 오히려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말없이 나를 응원해주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견뎌야겠다고 다짐했다.         

  

독일 태생 미국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도 “정체성 혼란을 느낄 때 정체성을 의식한다.”라고 했다. ‘혼란’이 없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도 없다.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상태를 안 좋게만 보려고 하지만, 이 부정적인 상태가 불균형을 일으켜 다른 균형을 찾아가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당연히 현재의 부정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을 통해 좋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군대가 많이 힘들다고 하는데, 그 말은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힘든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정체성 회복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후보생 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상황 속에서 “지금 상황보다 더 힘든 상황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는 지금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밥도 먹을 수 있는 적어도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현실에 살고 있지만, 가난 때문에, 장애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독일 태생의 미국 이론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질문법’은 유대인 교육방법으로도 유명한데,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스스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안정의 상태일 때보다는 불안정의 상태일 때 더 스스로 고민한다. 고민 속에서 무한한 질문을 하면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오히려 더 좋은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보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임이 꽤 많이 있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싸이월드’였다. 봉사 소모임에 가입하고 장애인을 위한 한 시설에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 음식을 준비하는 팀, 청소하는 팀, 빨래하는 팀, 목욕시키는 팀 등 다양하게 팀을 꾸려서 한 달에 한 번씩 봉사를 진행했다. 처음 내가 맡은 일은 빨래였는데, 봄이었지만 찬물로 이불 빨래하려니 손이 꽁꽁 얼어붙고, 하루 내내 많은 빨래를 해내려니 허리도 무릎도 아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강한 노동을 하니 몸은 힘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치유되었다. 시설에 사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졌지만, 가난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누구보다 해맑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로 대학 졸업할 때까지 2년 가까이 매달 봉사활동에 가면서 오히려 나는 회복과 치유의 시간을 보냈다. 원래는 힘든 후보생 1년 차 생활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살았지만, 그 덕분에 힘든 일을 견디는 법을 배웠고 나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류는 ‘불안과 위기’를 느낄 때마다 뇌에서 ‘투쟁과 도피’ 반응을 통해 생존했다. 이 반응은 우리가 더 민첩해지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때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이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받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투쟁과 도피’ 반응을 준비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우리도 이 반응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회복의 단계로 넘어올 수 있다.           


사자성어에 ‘전화위복(轉禍爲福)’과 ‘부위정경(扶危定傾)’이라는 말이 있다. 두 말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나약하게 태어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뇌’가 진화했고, 지금은 지구에서 가장 고등 생명체로 남았다. 이런 역사가 있으니 이 순간 우리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위기가 찾아오지만, 오히려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여 ‘회복’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의 신호는 곧 ‘긍정’의 신호로 바뀔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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