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보호자는 아직 부담스럽다
'엄마 김치에 머리카락이 있어'
첫찌가 젓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집어줬다. 오늘로 네 가닥째다. 어머니는 첫찌가 잘 먹는 물김치를 늘 해다주셨는데, 언제부턴가 물김치 안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몇개씩 나왔다. 분명 내가 건져줬을때는 안보이던 것이 왜 첫찌에게 그리 잘 보이는지. 첫찌에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첫찌가 '엄마 머리카락이 왜 자꾸나와?'이거 누구 머리카락이지? '하길래 '으응 할머니 머리카락이야' 답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아 첫찌가 김치먹는데 심심할까봐 할머니가 이거 넣어놓았나? 머리카락 찾으면서 먹어야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더러워, 안먹을래'라고 싫어할줄 알았는데 고런 귀여운 생각을 하다니. 고작 다섯살 아이가 참 대견한 순간이었다.
우리집 김치는 양가 어머니들께 받아먹는다. 두분다 음식솜씨가 대단하셔서 어디걸 먹어도 너무 맛있다. 나의 어머니는 자극적인맛, 시어머니는 담백하고 삼삼한 맛이라 골라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신기하게도 이제껏 김장김치 말곤 한번도 겹치지 않고 매번 다른 김치를 받아먹었다. 나의 어머니가 파김치를 담그면 시어머니는 무김치를 주셨고, 열무물김치를 다 먹어갈 쯤이면 다른 한분이 그냥 열무김치를 주셨다. 덕분에 우리집 식탁은 고퀄리티의 김치들로 365일 풍성하다.
두 어머니들 모두 워낙 깔끔한 편인데, 김치를 받아올때면 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김치냄새가 새어나올까 싶어 꽉꽉 밀봉은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물기도 없이 깔끔하게 주신다. 김치의 양념도 정갈하다. 파김치는 언제나 한일자로 곧게 누워있고, 무로 만든 물김치는 국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국물을 아무리 마셔도 텁텁함이 없다. 실로 경이로운 그 맛에 감탄을 하다가도 나중에 엄마들이 안계실때 이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싶은 불경스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 최근 1년 사이에 김치에서 머리카락이 한가닥씩 나왔다. 머리카락은 커녕 시든 잎사귀 하나 없던 깔끔한 김치에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다. 그것도 양가 어머니 모두 비슷한시기에, 처음엔 한가닥씩 나오던게 지난주엔 너덧개씩 둥둥 떠있어서 정말 놀랐다. 머리카락도 처음엔 좀 굵은것 한가닥이 나와서 바로 건졌는데, 요즘엔 머리카락이 너무 가느다래서 첫찌가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다.
처음엔 장난삼아 '어머니 김치에서 머리카락이 하나 나와서 첫찌가 깜짝 놀랐어요'라던가, '엄마부엌에 위생점검 해야겠는걸?'하고 농담을 던졌는데 언젠가부터 두분이 '아유 혹시 이번 김치에도 머리카락이 나왔니?'하고 먼저 물어보자 더 말하면 안되겠다 싶어 그만뒀다.
하루는 친정에서 밥을 먹는데 나물무침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 별 생각없이 그걸 건져냈는데 어머니가 그게 뭔데 건져내냐고 해서 '머리카락'이라고 하니 몹시 놀라시며 '분명 안보였는데 어휴'하고 한숨을 쉬셨다. 요즘 눈이 침침해서 머리카락이 들었는지 몰랐다면서, 머리카락도 요즘들어 왜이렇게 자주 빠지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2년전쯤부터 염색을 하지 않으시는데, 새치때문에(이젠 그냥 흰머리지만)오랜기간 염색을 하다보니 머리도 너무 많이 상하고 눈도 너무 나빠져서 그냥 백발로 살겠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나빠진 눈이 돌아오진 않았고, 백내장 때문에 오래 고생하셨다.
그러다 한날은 메시지가 와선 '나 한시간 뒤에 백내장 수술한다'고 했고, 급한대로 아버지께 전화하니 아버지도 아침에 수술 이야길 들었단다. 어느 병원에서 수술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으셨는데, 운전을 못하는 어머니가 다닐만한 안과 한두곳을 추려 전화를 했더니 다행히 가장 처음 전화한 곳에서 어머니가 수술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옷을 챙겨입고 근처 식당에서 김밥과 국밥 두 그릇을 포장해 병원으로 갔다. 백내장수술이 아무리 간단하다해도 어쨌든 눈수술이라 혼자 걷지도 못할건데. 병원에 도착하니 때마침 회복실에서 나온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는 귀신을 본 듯 놀라며 '여기 어떻게 찾아왔냐'고 했다. 간호사가 다행이라는듯 '보호자시죠? 요거 설명만 드리면 되니 기다렸다 모셔가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내일 아침에도 오셔야하는데 눈이 많이 불편해서 혼자 힘드실수도 있다길래 제가 모시고 오면 된다고 하고 어머니를 부축해 병원을 나섰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이래서 왔는데, 회복실 나오니까 어지럽고 눈이 아파서 걷기도 너무 힘들더라고. 그런데 네가 와서 살았다 싶더라'. 차에 어머니를 태우고 김밥과 국밥을 샀으니 이걸로 식사하시라고 했다. 아이고 내가 이제 진짜 나이가 들었구나. 그 한마디가 참 시려웠다.
내 딸이 처음 '엄마'하고 날 불렀을때 부모가 된 것을 자각했다면, 그날 어머니의 한 마디는 '더는 내가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구나'라는걸 깨닫게했다. 어머니가 진료를 받은 안과는 예약이 불가하고 당일 접수만 된다고 해서 다음날 아침일찍 안과에 가서 접수를 한 다음 시간맞춰 어머니를 모시러갔다. 어머니는 '네가 일머리가 있다는게 거짓말은 아니구나' 하고 놀라면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진료를 받은 후 집에 와서 너무 좋다고 했다. 내일 진료는 아버지 휴무니까 오지 않아도 되고, 이젠 눈도 잘 보이고 어지러움도 없으니 그만 가보라는말과함께 고맙다고 용돈도 주셨다. 안받는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현관에 몰래 두고 나왔는데, 기어이 계좌로 돈을 부쳐주셨다. 어제 잠깐 '내가 이제 어머니의 보호자'라고 우쭐했던것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과한 금액이었다. 아, 아직은 멀었구나. 아직까진 부모님의 보호자라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솔직히 다행이다 싶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부턴 김치 안에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김치맛은 여전히 좋고, 담음새도 깔끔하다. 머리카락까지 나오지 않으니 금상첨화다. 그런데 요즘은 김치를 꺼낼 때마다 내심 불안하다. 머리카락이 또 나오면 어쩌지? 어머니 눈이 또 안좋아진거 아닐까? 한동안 김치를 편하게 못먹을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