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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다 May 17. 2023

내 사랑 노포칼국수

이젠 추억으로 남은 한 그릇 칼국수

나는 30 넘게  동네서 살았다. 우리동네의 가장 좋은 점은 '노포(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 많다는 것인데, 아주 어릴  갔던 가게와 장소가 지금도 대부분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도 지나갈 때마다 "아이고 벌써 니가 애가 둘이가?"하고 반겨주시기도 하고, "느그 엄마 코찔찔이 해가지고 공부도 억수로 몬했데이!" 하면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엄마도 그랬어? 근데  우리 맨날 혼내?" 라고 곤란할 적도 있지만,  세월  많은 손님이 다녀갔을텐데도  기억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주인아줌마였던 호칭이 할머니, 어르신으로 바뀌고, 허름한 간판이 새것으로  교체되며 신속 정확하게 배달해 주시던 주인아저씨 대신 배달기사가 오는걸 보면서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새삼 느끼곤 한다.


그 중 가장 오래 간 곳은 우리동네시장 안 국수집이었다. 그곳은 엄마가 처음 이 동네에 터를 잡고 갔으니 적어도 36년이 넘은 곳인데, 이천 오백원에 넉넉한 양의 칼국수와 칼제비, 잔치국수를 먹을 수 있던 곳이었다. 주인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가면 "아이고 벌써 이래 컸나?"라면서 내가 좋아하는 깍두기를 넉넉하게 퍼주셨다.


첫째 임신했을때 일이다. 밤 열시쯤이었는데 갑자기 시장 칼국수가 너무 먹고싶었다. 슴슴한 육수에 고명이라곤 늙은호박과 부추, 감자 조금이 전부인 이천오백원짜리 칼국수. 그 시간에 칼국수집이 문을 열였을리는 없었다. 남편도 없어 혼자 끙끙 앓다가 아쉬운대로 24시간 분식점에 가서 칼국수를 먹었다. 오색빛깔 고명에 진한 육수가 일품이었지만, 배를 다 채우고 나서도 뭔가 허전하고 덜먹은 기분이었다. 결국 그날밤새 칼국수 생각에 잠을 못자고 다음날 아침 부리나케 가게로 갔고, 마수걸이 손님으로 가서 칼국수 두 그릇을 비웠다.


그 후 그 집을 또 잊고 있다가 둘째를 낳고 얼마 안 되어 문득 그 칼국수가 먹고 싶었다. 엄마에게 젖먹이 아이를 부탁하고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날은 유독 추운 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애 낳은 지 3주도 채 되지 않아 손목과 발목은 칼바람에 시리고 귀와 얼굴은 다 얼어터졌지만 칼국수를 꼭 먹고 싶다는 마음에 계속 걸었다. 잔뜩 얼어서 가게 문을 열자 날 보고 놀라신 할머니는 재빨리 아랫목을 내어주셨다. 손발이 떨리고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칼국수를 시키자 할머니가 이거 하나 먹으려고 이 추위에 왔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오늘 너무 추워서 나도 장사 하루 쉴라캤다. 근데 내가 장사만 40년 넘게 하니까 촉이 생깃데이. 오늘은 문 안열면 안될거 같아서 채비하고 왔더니만..." 할머니께서 요거 하나만 팔고 들어가면 되겠다고 가스불을 잠그셨다. 그 날 칼국수는 유독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 나, 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자리만 차지하기 무안해서 국수 세 그릇을 시키면 "애들이 뭐 먹는다고, 갓난쟁이는 먹지도 않을거면서!" 호통을 치고 강제로 두 그릇만 주셨다. 그러면서 큰아이것으로 밥그릇에 국수를 따로 담으며 "먹고 더 먹어라. 국수가 이천 오백원 밖에 안해서 돈은 못 깎아줘도 국수는 많이 줄게." 라며 호호 웃으셨다.


얼마 전 친정에 갔다가 문득 그 국수집이 생각났다. 할머니도 뵙고 싶어 가자고 하니 엄마가 "할머니 이제 장사 접었다"고 했다. 나이가 많이 드셔서 고향에 내려가셨단다.

아, 나는 내 나이 먹는 것만 생각했지 나의 사랑하는 노포의 사장님도 나이가 든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고, 언제고 날 반겨줄거라 착각한 것이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할 때마다 나는 그 국수집이 생각난다.

이제는 갈 수 없지만, 내 기억 속 <진미분식>은 언제나 따스하고 정겨운 고마운 장소로 남아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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