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10)

<루나시티> 연작소설

by 송건자

“세람 잉옌은 4년 전 홍콩 빅토리아 항에서 출발해서….”


헬멧 스피커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긴 한숨이었다. 애나는 동그라미 두 개를 얼굴 가득 채우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애나, 괜찮으니까 계속해 줘.”


하연이 말했다.


“히노데 정거장, 미리내 정거장을 거쳐 루나시티로 향했어요. 아르테미스 정거장에서 트러스트 사가 소유한 초장거리 화물선을 타고 화성으로 향했어요.”


화성.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리히터의 태도로 짐작했었고, 지구연합이 다른 행성에 테라포밍을 시도하는 건 이미 루나시티 수뇌부에서도 예상한 바였다.


“애나, 확실해? 우주 정거장을 세 개나 통과했는데? 우주로 나갈 목적이라면 굳이 세 곳이나 오갈 필요 없잖아.”


리히터는 오류의 가능성을 지적했다.


“애나가 세람 잉옌 씨의 항해 이력을 접근할 수 있는 건 잉옌 씨가 미리내 정거장을 통과했기 때문이에요.”

애나 대신 하연이 대답했다.


“번잡하게 여러 정거장을 이용할 이유가 뭐예요. 세 곳이나요.”


“동선을 알리고 싶지 않았겠죠. 누군가를 속이고 싶었거나요.”


하연이 말한 누군가가 루나시티처럼 들렸다. 리히터는 고개를 떨궜다. 애나는 보고를 이어나갔다.


“이후 항해 이력은 확인할 수 없어요. 그리고 현재로부터 2년 전, 아르테미스 정거장, 미리내 정거장, 히노데 정거장을 통해 홍콩 빅토리아 항으로 돌아왔어요. 그다음 우주로 나온 이력이 없어요. 한 달 전 트러스트 사 작업 인부로 미리내 정거장에 올라온 것이 최근 우주 항해 이력이에요.”


“잠깐, 애나. 잉옌 씨가 언제 지구에 돌아왔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리히터가 고개를 들었다.


“2년 전 6월 14일 빅토리아 항에 도착했어요.”


2년 전 6월. 위화감이 들었다.


“잉옌 씨의 지구 이동 이력도 알 수 있어?”


리히터의 명령에 애나의 얼굴에 초록색 점선이 가로질렀다. 점선이 실선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빅토리아 항에서 런던 시티 공항으로 바로 이동했어요. 유로라인 열차를 타고 파리, 뮌헨을 거쳐 헬싱키로 갔어요. 이후로 이동 이력은 없어요. 미리내 정거장으로 올라올 때 출발지는 헬싱키 공항이었어요.”


리히터는 턱을 괴고 검지로 헬멧 고글을 톡톡 두드렸다. 리히터는 기억 속에서 전염병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끌어모았다. 리히터의 기억이 맞다면 첫 감염자는 런던에서 나왔다. 지구연합과 루나시티는 런던에서 4차 관계 협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지구연합과 루나시티는 실험 통제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지구에서 발생한 전염병에 대한 책임 소관으로 양측은 한껏 예민했다. 보고된 첫 감염자는 루나시티 여행을 다녀온 이력이 있어 지구연합은 루나시티가 병의 근원지라 주장했다. 사실 이것은 관계 협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지구연합의 블러핑이었다. 잠복기를 고려했을 때, 루나시티 여행 시기와 발병한 시기의 타임라인이 맞지 않았다. 루나시티가 필사적으로 조사한 덕분에 진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지만, 루나시티와 지구연합 간의 앙금은 한 층 더 깔렸다.


첫 감염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역학 조사를 비롯해 질병 검사를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보호자는 과하다며 항의했지만 지구연합은 루나시티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 때문에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 리히터도 베를린으로 출장을 갔었던 터라 첫 감염자에 대한 조사서를 비교적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그 조사서에 적힌 날짜가…. 첫 감염자가 런던 시티 공항에 도착한 날이… 6월 14일이었다. 6월 14일이었던 것 같다.


리히터는 날짜를 떠올리려 했지만 그의 눈앞에선 일생 동안 보았던 숫자들이 무작위로 조합했다가 해체했다. 날짜는 물론이고 2년 전이었는지조차 점점 확신할 수 없었다. 떠올려. 떠올려 보라고. 리히터가 손바닥으로 헬멧을 강하게 내리쳤다.


“차관님. 왜 그러세요?”


뒤섞인 머릿속 숫자가 기억 저편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차관님! 괜찮아요?”


“세람 응옌….”


“네, 저 사람이 왜요.”


“어쩌면 세람 응옌 씨는 첫 감염자일지 몰라요.”


“설마요. 그렇다고 해도 잠복기가 너무 길어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같은 병이라도 사람마다 잠복기가 다를 수 있어요.”


“그래도 2년은 너무 길지 않아요? 지금까지 감염병의 잠복기는 길어야 반년이었잖아요.”


“우리가 이 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죠?”


하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구연합과 루나시티의 과학자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달라 붙었지만 병과 맞서 싸운 기간에 비해 알아낸 정보는 이상하리만큼 적었다. 아무리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더라도 전염병에 대해서만큼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힘을 모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구연합과 루나시티는 도리어 경쟁을 붙었다. 땅거북보다 빨라야 해. 달토끼보다 빨라야 해. 실마리를 먼저 잡는 쪽이 관계 협의에서 주도권을 가질 거야. 공공연하게 퍼진 불편한 진실이었다.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적 아래 지구연합 과학자와 루나시티 과학자가 손을 잡으려 했었다. 감염자와 사망자는 점점 늘어나 수를 쓰지 않으면 인류는 멸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목을 조였다. 하지만 협업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구연합, 루나시티 할것없이 한뜻으로 모인 과학자 집단을 와해시켰다. 나아가 지구와 달 이외의 장소에서 바이러스가 발현할 가능성을 제기하면 묵살하고 제거했다. 지구연합은 마스 돔의 존재를 숨겨야 했다.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서로의 뼈를 깎아먹는 경쟁은 그만해야 한다.


“차관님 말씀대로 잉옌 씨가 첫 감염자라고 한다면 백신이든 치료제든 획기적인 발전을 할 거예요. 지금까지 전염병은 너무 많은 변이를 거쳐서 타깃을 정하지 못했잖아요. 그 문제점을 언급한 학자도 있었고요.”


“만약 잉옌 씨가 바이러스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변이에 대처할 수 있는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이게 사실이라면 루나시티와 지구, 어디에도 잘못이 없었던 거죠.”


“화성에서 2년 동안 일했으니까.”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경이 되도록 질질 끈 지구와 달, 모두 잘못한 걸지도요.”


리히터는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가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번에는 그 사업의 주체가 어디인지에 따라 편 가르고 비난하는 거 아닙니까?”


“우주 개척은 루나시티도 하고 있어요.”


하연이 무신경하게 내뱉은 말에 리히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지구연합도 하는데 루나시티라고 못하겠어요? 지구가 달에 루나시티를 세우면서 인류는 한 단계 올라섰어요. 루나시티도 여러모로 살 길을 찾아야 했어요. 지구와 득없는 소모전에도 지쳤고 피하자는 의견도 많았어요. 지구의 그늘에서 벗어나자고요. 새로운 행성으로 가자고요. 무척이나 루나시티를 사랑하는 저로서는 반대하고 싶지만 마냥 회피할 수도 없어요. 관계 협의를 차치하더라도 이대로 가다간 루나시티도 지구가 앓았던 여러 문제들을 반복할 거예요. 루나시티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인구가 늘어날 거고 환경 오염도 심해지겠죠. 모르쇠로 나가다가 턱끝까지 물이 들이찰 때나 되어서 심각성을 인지하겠죠. 후대에 문제를 던지지 않으면 다행이죠. 이런 역사,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이야기엔 저도 동의해요.”


관계 협의를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하연과 리히터가 마음이 맞은 순간이었다.


“적은 화성에 있었고, 눈을 돌린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 이게 우리의 결론이죠?”


“우주는 넓고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차분해질 필요가 있어요.”


리히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평행선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손가락질 하기보다 양쪽 모두 책임 일부를 지고 같은 곳을 가리키는 편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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