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2)

<루나시티> 연작소설

by 송건자

11번 게이트는 아직 출발이 한참 남았음에도 마음이 초조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9번 게이트로 자리를 옮겨 아무도 앉지 않은 벤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건너편 벤치에 방금 전까지 우주선을 기다렸던 아이와 엄마가 앉았다.


저들도 지구를 경유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을까? 아니면 화성으로 이주하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짐이 단출했다. 기내용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모든 짐을 들고 가기에 화성은 너무 멀고 배송료도 비싸니 다시 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나와 서하도 달로 떠났을 때 속옷만 챙겼다. 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주라…… 만약 그렇다면 말리고 싶었다.


우주 멀미에 익숙해지리라 믿으며 무작정 우주로 뛰어들었다. 가장 짧은 우주 중력 훈련 코스를 받고 인력소에 식별 아이디를 등록했다. 철의 바다에서 루나스틸을 캤고, 허브 정거장에서 화물을 옮겼고, 데브리와 우주 쓰레기를 분류했다.


우주 쓰레기 분류 작업이 벌이가 가장 좋았다. 쓸 만한 인공위성이라도 발견하면 추가 수당을 받았다. 기본 급여를 올리기 위해 우주선 운전 면허를 따고 싶었지만 전문학교까지 갈 형편이 되지 못해 중장비 운전 면허로 만족해야 했다.


서하는 도통 우주 멀미에 익숙해지질 못해서 루나시티에서 일했다. 택시 운전을 했고, 연구 시설과 고급 주거지 경비일을 했다. 계약직이라 오래 할 수 없었지만 달은 언제나 인력난이었고 우리는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만족 기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몰라도 우리는 우리가 만족할 만한 생활을 누렸(다고 생각했)고, 우리에게 천사가 찾아왔다.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 기주. 서하가 이 세상에 남긴 단 하나의 보물.


나는 기주를 끔찍이 여겼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루나시티를 관통한 몇 가지 굵직한 사고에 우리 가족이 빗겨난 건 천만다행이었다. 비극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가족이 그런 비극을 겪었다면 우리 세 사람은 도로 붙일 수 없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주로 우주에서 일했기 때문에 기주를 돌보는 건 늘 서하의 몫이었다. 어미된 자로서 아이와 시간을 자주 보낼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그래, 어쩔 수 없었다.


어린 기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슬프면서도 기뻤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를 생각하는 증거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일을 하다보면 전화를 못 받고, 뒤늦게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기주는 점점 자라면서 엄마를 이해해주었다. 우리 아들, 기특하다고 다 컸다고 뿌듯했다. 되돌아보면 그건 이해가 아니었다. 그깟 업무, 다른 팀원에게 맡기면 되었다. 일에 대한 책임감만큼 왜 가족에게는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을까. 서하가 있어서? 기주가 이해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네 결혼식 비용 보태야지.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긴급 수당이 얼만데. 엄마 위치가 있잖아. 책임자가 어떻게 내빼. 기주, 네가 이해해야지. 이해하잖아. 응?


기주의 얼굴은 실망도 분노도 없는 무미건조했다. 내가 아는 엄마라면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역시 우리 아들은 엄마를 이해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기주는 입술을 떼었다.


우리 데이지 이쁘게 입었는데…… 엄마한테 보이고 싶었대요. 숨기지 못한, 아니 숨기지 않은 아쉬움 아주 조금.


며늘아기는 서운해 하지 않았다. 서운한 티를 내지 못했다는 게 더 맞겠다. 애프터 루나 세대여도 어른에 대한 예우를 지킬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기주와 결혼을 허락했다.


실은 서하가 허락해서 허락했다. 서하가 나보다 사람 보는 눈이 나았다. 만약 내가 허락하지 않았더라도 기주는 며늘아기와 결혼을 밀고 나갔을 것이다. 이미 서하의 허락을 받았으니 엄마의 허락은 비중이 크지 않다. 내가 기주의 인생에 얼마나 큰 결정권을 가지겠어.


이따금씩 생각한다. 그때 다르게 표현했다면, 기주와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하고. 31년 동안 쌓아 올린 시간이 있으니 그다지 변하지 않을 테지만 그 말이 나와 기주의 관계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 지금도 후회한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어떤 변명도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진심이야. 시간 맞추려고 했는데 사고가 있었어. 트러스트 사 알지? 덩치만 커서는 쪼잔하고 변덕이 심해. 엄마도 다 던지고 오고 싶었어. 하지만 엄마가 책임자잖아. 엄마가 정말 미안해. 기주야. 결혼 정말 축하해. 이제 우리 아들도 다 컸네. 아빠도 정말 좋아하셨을 거야.


수십 수백 번 거울에 대고 말했다. 끝까지 내 변명을 들은 기주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변할 수 없었고, 변할 리 없었다.


그래도 기념일에 꼬박꼬박 연락이 왔다. 내 생일. 기주의 생일. 그리고 서하의 기일. 내가 기주였다면 연을 끊을 법한데, 우리 아들은 엄마를 챙기라는 아빠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


이제 엄마 인생 살아요. 나도 다 컸고, 결혼도 했잖아요. 힘든데 꼭 나가서 일해야 해요? 일하려면 차라리 시티에서 일해요. 현장, 위험하잖아요. 우주에 어떤 위험이 있을 줄 알고. 네?


나는 알았다, 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배운 거라곤 땅을 파고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허브 정거장으로 실어나르고 물량을 확인하고 보내는 일뿐인데, 그걸 하루 아침에 내던지고 시티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아라? 무모한 도전이었다. 찾지 못한다면 내 입은 누가 채워주지? 기주? 그건 바랄 수도 없고 바라서도 안 된다. 서하라면 몰라도 나는 안 된다. 서하가 살아있었다면 달랐을까? 이루지 못한 만약에서 뻗어 올린 무수한 가지는 어느 하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기주와 데이지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루나시티에서 나고 자라 공통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잘했다. 기주는 엄마에게 충분히 받지 못한 애정을 제이에게 쏟았다. 제이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랐고, 이따금씩 만날 때마다 할머니를 살갑게 대했다. 제이는 사랑으로밖에 사람을 대할 줄 몰랐다. 기주가 데이지와 제이를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볼 때마다 낯설었다. 무뚝뚝한 아들에게 저런 인간다운 면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그 모습을 이렇게라도 볼 수 있음에 감사했고, 훔쳐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 누구를 탓하겠어. 전부 내 탓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제이를 돌봤다. 인력 관리에 배치되어 적게 일해도 비슷한 급여를 받았다. 회사에서 근면한 나를 좋게 봐준 덕분도 있지만 몸이 예전만 못했다. 기주에게 해주지 못한 걸 한이라도 풀듯 제이에게 잘했다. 내 배가 아파 낳은 아이처럼 사랑을 쏟았다.


제이가 청첩장을 주려 찾아왔을 땐, 밀린 보상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대었다. 목끝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꿀떡 삼키기가 어려웠다. 할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게. 우주 저편에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갈게.


제이는 조금 당황스런 얼굴로 내 손을 매만졌다. 할머니, 직접 오시는 게 아니에요.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이는 친절하게 청첩장을 펼쳐 보여주었다. 청첩장에는 결혼식장 주소 대신 LR 코드가 있었다. 결혼식 생중계 영상을 볼 수 있는 넷 접속 링크였다.


결혼식엔 양가 부모님과 친한 지인만 모았어요. 결혼식이 뭐 중요한가요. 서버 용량 때문에 코드로 접속할 수 있는 인원수도 적어요. 제이는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만큼 제가 할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해요. 나는 그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할머니가 손주를 이뻐하는 게 당연하지. 무얼 바라고 한 게 아니야. 혹시 기주가 반대했을까? 할머니는 어차피 오지 않아. 마음 써서 마음 다치지 말아. 몹쓸 만약에서 뻗어 올린 가지가 마음을 쿡 찔렀지만 나는 그것을 부러뜨렸다. 내 아이가 그럴 리 없다. 응, 할머니가 우리 제이 마음 다 알아. 결혼 축하해. 나는 사랑스러운 손주를 껴안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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