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시티> 연작소설
게이트 심사대에 일체형 인공지능이 있었다. 테이블과 결합한 원뿔 몸통에 구형(球形) 머리가 얹어 있었다. 몸통에 달린 팔은 좌우대칭을 이루었고 양손은 정면을 향해 다소곳이 포갰다. 이걸 아직도 쓰는구나. 하연은 눈앞에 있는 인공지능 모델을 보면서 놀랐는데, 17년 전 공동주택 현관문에 CCTV 겸용으로 설치된 같은 모델을 신형으로 교체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오래 되었다며 성능 저하를 우려했었다.
인공지능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하연은 인공지능 얼굴 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실행 코드가 필요한 걸까. 하연은 인공지능의 손을 툭 건드리고 한 발 크게 물러났다. 묵묵부답. 하연은 전보다 과감하게 인공지능의 어깨를 흔들었다. 인공지능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인공지능의 어깨를 잡고 살짝 뒤로 당겼다.
“허락없이 만져서 미안.”
하연은 인공지능을 지나쳐 심사대 위를 둘러보았다. 그 흔한 멀티 케이블 잭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심사대 밑으로 허리를 숙이고 헬멧 라이트를 켰다. 테이블은 바닥과 틈 없이 붙어 있었고 전선이나 컨트롤 장치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디바이스로 무선 통신 허브 신호를 추적했지만 감지할 수 없었다.
하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상 전원이라도 찾으면 인공지능을 깨울 수 있고 인공지능은 범위가 크든 적든 구역의 제어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하연은 바닥에 엎드려 라이트를 구석구석 비췄지만 틈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깔끔한 디자인도 좋지만 물리 버튼 하나쯤 만들어놔야 하는 거 아니야?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이래서 맨날 노동자가 죽었네 다쳤네 안전 불감증이네 이런 소리가 나오잖아. 우주 안전법에 안 써있어? 뾰족해진 짜증이 미리내 정거장 설계자에게 향했다. 이러니까 허브 정거장으로 쓰는 거야. 잘 만들었어 봐. 규모가 작아도 방치했겠냐고. 하연은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바닥을 꾹꾹 눌렀다. 압력 반응으로 단자 커버가 튀어나오길 바라면서.
한참동안 바닥을 누르던 하연은 불현듯 자신의 처지를 부감(俯瞰)했다. 땅거북처럼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고 기는 모습. 비참했다.
히노데 정거장에 도착했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탈출 포트 관리 미흡이라니. 여기서 나가면 외교부 이름으로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다. 당신들 때문에 지구연합 우주방위부 차관이 죽을 뻔했다. 이것으로 달과 지구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 뻔했다. 하콘라디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면 경위서로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살아서 나갔을 때 이야기다. 그들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거다. 그래도 탈출 포트 컨디션은 항상 확인했어야지. 사고가 언제 날 줄 알고. 우주는 한 꺼풀도 벗기지 못한 미지의 공간이잖아.
하연은 열심히 바닥을 꾹꾹 누르며 히노데 정거장을 떠올렸다. 히노데 정거장은 여객항으로도 유명하지만 테마파크로도 유명하다. 루나시티는 물론 지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놀러간다. 하연도 좋아해서 생일이면 항상 찾았다. 히노데 정거장은 항상 손님들로 붐비니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을 터였다. 전원 꺼진 구식 인공지능 말고. 융숭한 도움도 받고 혹덩어리 같은 리히터도 지구로 무사히 돌려 보냈을 것이다. 지구로 무사귀환한 리히터는 목숨을 구해준 손하연 루나시티 외교부 2등 서기관에게 감사를 표할 것이고, 7년간 질질 끌린 지구-달 관계 협의에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허튼 소리가 아니다. 하연은 전임자들이 테이블에 끌어내지 못한 자원 독점권과 실험 통제권을 얻어냈다. 이 권리들을 얻으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 터지게 싸웠던가.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서명을 받기 전이지만 협의서에 펜촉을 찍은 거나 다름없었다. 협의 종료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마침표만 남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연이 착각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모두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회장에 들이닥친 감염자들만 아니었어도…… 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원 독점권과 실험 통제권. 하콘라디 대통령이 가장 되찾고 싶었던 권리다. 지구연합은 달에서 나오는 자원을 당연하게 가져갔다. 비록 루나시티가 지구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도시라고 해서 모든 걸 빼앗을 권리는 없다.
루나시티는 자치권을 주장하며 대통령을 선출했다. 5년 넘게 싸워 비로소 국가로서 인정 받았고, 몇 가지 기본 권리를 재조정했다. 자원 독점권은 루나시티 마크가 찍힌 총 생산량의 2할을 무조건 보장받도록 조정되었다. 5년간 벌인 사투의 결과가 ‘고작 2할’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작은 변화는 큰 변화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불합리한 조건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실험 통제권도 비슷하다. 정확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선 무중력 환경이 중요하다. 우주 정거장이 무중력 환경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지만, 루나시티가 생긴 후로 기업들은 우주 정거장에서 실험하지 않았다. 루나시티가 우주 정거장에 비해 더 안전하고 더 컸기 때문이다. 소규모 실험은 괜찮았다. 문제는 폭발이나 생화학 실험 같이 위험한 실험이었다. 루나시티 정부의 공식적인 항의에도 지구의 기업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지구연합을 등에 업고 손쉽게 그들이 저지른 죄를 무마시켰다. 하지만 지구연합조차 한 발 물러난 사건이 있었으니, ‘비이켄 분지 가스 유출 사건’이다.
트러스트 사가 실험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미허가 실험을 감행했다. 아직까지도 자세한 실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루나시티 소방국에 사전 통보를 했더라면 대처가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트러스트 사는 그들의 실패를 예상하지 않았다. 실패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뭉갤 수 있다고 믿었다. 자만하고 나태한 태도는 인재를 일으켰다. 영아 47명이 20분 가까이 저산소 상태에 놓였고, 치료할 수 없는 후유증을 얻었다. 루나시티 국민들은 분개했다. 강력한 항의와 배상, 실험 통제권의 완전한 이관을 요구했다. 지구연합은 묵묵부답이었다. 더욱 철저한 기업 감시에 대한 약속과 아이들이 다친 것에 대한 심심한 사과와 배상은 해줄지언정 실험 통제권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하콘라디 외교부 장관은 지구연합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일부지만 성과를 얻어냈다. 이러한 노고에 하콘라디는 국민에게 호감을 얻었고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사상 첫 루나시티 출신인 하콘라디 외교부 장관이 루나시티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지구연합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었다. 지구와 척을 지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루나시티와 지구연합이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볼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나시티에는 이제 적잖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야 했다. 달은 더이상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지구-달 관계 협의는 7년에 걸쳐 8차까지 끌고 왔지만 루나시티와 지구연합이 평행선을 걷고 있다는 걸 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원인 모를 전염병이 인류를 좀먹기 시작했다.
“뭐하세요?”
걸걸한 목소리가 하연의 귀를 간지럽혔다. 하연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하연은 그대로 심사대에 머리를 부딪쳤다. 헬멧이 없었다면 심리적 피해에 이어 물리적 피해까지 입을 뻔했다. 그래도 부딪친 건 부딪친 것이다. 하연은 헬멧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리히터가 시뻘건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하연은 뒷걸음질쳤다.
“거기서 뭐해요. 많이 바빠요?”
“네? 네. 에어 록(air lock)이 닫혀있나 확인했어요. 답답하시다면서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
아직도? 하연은 좁아지는 미간을 간신히 사수했다.
“찾고 있어요.”
하연은 무선 통신 탐색 홀로그램을 띄운 디바이스를 좌우로 흔들었다. 리히터는 입맛을 다시며 불만스러운 듯 쩝쩝거렸다.
리히터는 하연이 전방 경계를 자신에게 미루고 노는 줄 알았다. 하연은 미리내 정거장에는 허가 받은 인부 외에는 사람이 없어서 안전할 거라고 자신했지만 리히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회장에 감염자들이 쏟아질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곳에도 감염자들이 갑자기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임무를 수행하며 리히터는 마음이 조금씩 뾰족해졌다. 멀미는 점점 심해지는데 헬멧을 열어 약을 먹을 수도 없다. 될 대로 되라지. 혹시나 감염자들이 밀어닥친다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함께 휩쓸릴 못된 심보도 품고 있었다. 이것이 달과 지구의 오랜 협의를 이끌어낼 전임자의 본모습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다. 테이블에 나서기까지 리히터도 많은 일을 겪었다. 너무나 많은 일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