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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휘지>

by 송건자

임신이 도장을 떠나는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육아가 부담이라면 옥은 아이를 맡아줄 의향이 있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휘지도 기꺼이 그 짐을 나눠들 용의가 있었다. 포가 모한을 떠나는 방법도 있었다. 옥이 명분만 잘 내세운다면 일자리 하나는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평생을 모한에서 살았고 모한에서의 삶을 천생으로 여기는 포를 억지로 끌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휘지와 옥의 바람이지 유리의 바람 나아가 포의 바람이 아니다.


모한으로 떠나기 전날, 유리는 포와 함께 도장을 찾았다. 포는 유리의 짐을 호버 트럭에 실었다. 유리의 짐은 유리가 도장에 왔을 때처럼 캐리어 하나였다.


“포, 조금만 기다려줄래? 휘지 님이랑 감독관 님께 할 말이 있어.”


“응, 다녀와. 여기 있을게.”


포는 한 팔로 유리를 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옥은 그 꼴을 보고서는 헛웃음 짓더니 등을 돌렸다.


“감독관 님, 어디 가세요.”


유리는 옥을 붙잡았다. 옥은 핏발이 선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가지 말아요. 감독관 님….”


유리는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옥은 유리의 손을 뿌리치고 도장을 나갔다. 유리는 애타게 옥을 불렀지만 멀어지는 속도만 빨라질 뿐이었다. 휘지는 축 늘어진 유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방으로 데려갔다.


유리는 안방을 지긋이 둘러보았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공기 하나까지 찬찬히 기억에 새겼다.


유리의 시선이 마침내 휘지에게 가닿았다. 휘지는 부모 손에 이끌려 도장에 발을 들였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정갈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와 깨끗한 얼굴. 입가에 머금은 담담한 미소. 엉망으로 비에 젖은 소녀를 두루마기로 감싸주었을 때도 제자로 받아달라는 무릎을 꿇었을 때도 붓을 처음 쥐었을 때도 천자문을 가르칠 때도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보일 때도 휘지는 언제나 그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설정한 기본 얼굴이면서 휘지가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유리가 가장 좋아하는 휘지의 얼굴이었다.


“휘지 님,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평생 감사할 거예요. 맹세코요.”


“왜 그런 말을 해요. 전부 마지막인 것처럼.”


유리는 입꼬리가 처지지 않도록 힘을 주었지만 눈가는 물러터진 딸기 같았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갑자기 떠날 생각은 없었어요. 저희 부모님처럼 남는 사람은 생각도 않고 일방적으로….”


유리는 허공을 바라보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것을 뱉지 않고 꾸역꾸역 삼켰다. 눈이 더 빨개졌다.


“휘지 님은 제가 비바람을 뚫고 도장을 찾은 날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으셨죠. 왜 묻지 않으셨어요?”


휘지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 말을 이어나갔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저는 항상 무서웠어요. 그 이유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제가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현실이 될까 봐요.”


휘지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휘지가 묻지 않은 건, 아니 묻지 못한 건 그것이 휘지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연결했을 때 의문은 데이터베이스를 더럽힐 뿐이다. 유리는 휘지의 차가운 손등을 쓰다듬었다.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따로 살았어요. 두 분이서 함께 도장에 나가지 않았을 때부터였을 거예요. 두 분 사이에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봐요. 뭔진 몰라도 두 분은 제게 숨기고 싶어 했는데 그게 숨겨지나요. 여덟 살이 느낄 정도였으니 심각했죠. 그래도 저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분명 두 분이 함께 도장을 찾으면 합칠 마음이 저절로 생길 거라 착각했죠. 나란히 앉아 한지에 붓을 그리던 날을 떠올리면요. 알아요. 어린애나 할 생각이었죠. 어린애이기도 했고요. 짧은 가출이 끝난 날, 부모님 손을 나눠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면서 깨달았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가족은 되돌아갈 수 없구나. 그 예감은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졌고 확고해졌어요.


저는 말이에요, 휘지 님. 도망치고 싶었어요. 두 분과 멀어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요. 집에 있으면 깨진 유리 조각 위에 서있는 기분이었거든요. 사랑했던 두 사람이 이제는 그 시간들이 없는 것처럼 지내는 게. 그 시간 속에서 태어난 제가… 아무 의미 없는 존재 같았어요. 저는 가시를 삼킨 시간을 견뎌야 했어요. 저를 맡아줄 친척도 없었고 시설도 없었거든요. 성인이 될 때까지 눈과 귀를 막고 버텨야 해. 포기하려던 그때 휘지 님이 떠올랐어요.”


유리는 무릎을 꿇었다. 휘지는 움츠러든 아이를 일으키지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부모님 모두 붓을 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서예를 배우고 싶다, 서예에 인생을 던지고 싶다는 딸을 막지 않으셨어요. 피는 못 속이는구나.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싶으셨나 봐요. 두 분 모두 서예만큼은 진심이셨으니까요.


제가 집을 떠나는 날 저희 가족은 정말 모처럼 모였어요. 두 분은 어깨가 닿을 만큼 나란히 서서 저를 배웅해 주셨죠. 그 모습에 저는 울고 말았어요. 부모님은 딸이 미지의 시간에 겁이 난 줄 아셨지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슬펐을 뿐이었어요. 부모님은 제 어깨를 토닥이며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하지 말라고 성급하게 마음먹지 말라고 일러주셨어요. 저는 눈물을 닦으며 알았다고 했어요. 그냥 집을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두 분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데. 한마음으로 제게 조언하는 모습은 잠시나마 가족이 겉모습만 아니라 마음까지 온전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유리의 눈이 눈물로 가득 고였다. 조금만 건드려도 걷잡을 수 없이 쏟아낼 것 같았다. 휘지는 위로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건 한지 위에 붓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그래도 휘지는 유리를 위로하고 싶었다. 휘지는 무릎을 꿇고 유리와 눈을 맞추었다. 유리는 슬며시 웃었다.


“휘지 님 덕분에 무언가 하지 않아도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알았어요. 항상 제 곁에 있어주셔서 고마워요. 감독관 님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으려 하시지만 저를 딸처럼 여기고 있다는 거 알아요.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두 분이 저를 받아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거예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어요. 두 분은 제게 부모님이에요.”


“그러면 아이를 낳고 돌아와요. 아이도 데려와요. 밖에 있는 저 사람도 와도 괜찮아요. 나랑 감독관 님이 방법을 찾을게요. 유리, 은혜를 갚아요.”


“휘지 님.”


유리는 환히 웃었다. 눈물 한 줄기가 봉긋 솟은 유리의 발그레한 볼을 가로질렀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어요. 휘지 님께 배운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요. 두 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에요. 저이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절대 아니에요.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요. 마음 같아선 두 분도 모한으로 모시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요. 저를 이해해 주세요.”


유리는 휘지 어깨에 기대 손을 포갰다. 유리는 차오르는 이별의 슬픔을 참지 않았다.


휘지는 유리에게 한지 한 축과 상아붓을 선물했다. 옥과 함께 준비한 이별 선물이다.


옥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유리는 옥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출발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포는 휘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모한에서 봤을 때보다 몸집도 얼굴도 훨씬 듬직해졌다.


“휘지 님, 이제 가볼게요. 꼭… 꼭 다시 만나요.”


유리는 휘지를 껴안았다. 온기가, 그리고 태동이 전해졌다. 유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어머니처럼 웃었다. 행복해 보였다. 휘지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유리가 지은 미소를 말한다면 그것이 이 아이의 얼굴에서 영원하기를 바랐다.


지지부진한 이별을 놓아주고 호버 트럭이 도장을 떠나자마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라도 있었던 것처럼 옥은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옥은 트럭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더니 나무 대문 앞에 철퍼덕 쓰러졌다.


“괜찮아요?”


옥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휘지도 처음이었다.


휘지는 옥을 부축해 옥을 안방으로 데려갔다.


“야, 깡… 휘지. 내가 쟤를 어떻게 키웠냐. 내가 지네 엄마, 아빠는 아니어도 말이야. 딸처럼 금이야 옥이야 키웠더니 산적 같은 놈한테 팽 가버려? 인사도 안 하고?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면 안 돼.”


옥의 발가락이 마루 바닥에 질질 끌렸다.


“너도 내 마음 알지? 우리가 유리 때문에 많이 다퉜지만 너나 나나 유리 잘 되게 하려고 얼마나… 얼마나 애를 썼어. 내가 지를 얼마나 끔찍이 여겼는데 모한까지 가버리냐고요! 우리 몰래 모한 거주 심사까지 내고 말이야. 모한, 좋아. 사랑. 인류에 이바지. 다 좋아. 그래, 가려면 갈 수 있겠지. 그런데 옆동네 가는 거랑 같아? 알래스카면 몰라. 모한이 뭐냐고, 모한이! 거기 가면 붓이나 잡을 수 있겠어? 너도 봤지. 하루종일 흙바닥에서 밀 베고 삽 푸고 기계 만지고… 우리 유리 손은 그런데 쓰면 안 되는데… 근데 붓은 줬어?”


“네, 줬어요.”


“대나무 붓이랑 상아붓. 어느 걸로? 상아붓? 이럴 때는 마음이 참 잘 맞는단 말이야. 유리는 살결이 하얘서 상아붓이 어울려. 한지도 줬지? 내가 한지 구하려고 전주 가서 있는 핑계 없는 핑계 생난리 부린 거, 알지?”


“그럼요. 한지도 줬어요.”


휘지는 한 손으로 미닫이 문을 열고 소파에 옥을 앉혔다. 옥은 자꾸 옆으로 고꾸라졌다. 휘지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냈다. 휘지가 이부자리를 까는 동안 옥은 계속 투덜댔다.


“분명 일 년도 안 돼서 돌아올 거야. 일 년이 뭐야. 삼 개월이면 고개 숙이고 돌아올걸. 죄송하다고. 다시 받아달라고. 내가 받아주나 봐라. 모한이 살기 좋은 데인 줄 알아? 밭일이 쉬운 일인 줄 아냐고. 평생 서예만 한 애가 말이야. 집 나가서 고생을 해봐야 안다니까. 내 말 틀려?”


“밤이 깊어요. 주무세요.”


휘지는 옥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이부자리에 눕혔다.


“우리 유리가 성실한데 삼 개월 만에는 안 돌아오겠지? 일 년은 걸릴까? 아휴, 인사라도 할걸.”


휘지는 겉이불을 덮어주었다. 옥은 잠에 들었다가도 갑자기 겉이불을 뻥 차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기를 여러 번,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휘지는 겉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안방에서 나왔다.


오늘따라 밤이 밝았다. 하늘엔 보름달이 손에 잡힐 듯 크게 떴다. 휘지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길이 밝아 사고가 나진 않겠다. 유리가 무사히 모한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잠에서 깬 옥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떻게 도장까지 돌아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휘지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이불을 걷어내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구멍 난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이내 옥은 유리가 모한으로 떠났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떠올렸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휘지도 나처럼 괴로울까? 옥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휘지! 어딨 어!”


옥은 미닫이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문설주에 부딪친 문이 쪼개질 듯 쾅, 큰 소리를 내었다.


휘지는 마루 한가운데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한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옥은 휘지의 뒷덜미를 잡고 검사실로 집어넣었다. 휘지 스스로 벗을 수 있음에도 옥은 억지로 휘지의 두루마기를 벗겼다. 휘지는 반항하지 않았고 순순히 순수도 검사까지 치렀다.


검사 결과 ……… 순수도 99.9퍼센트.


완벽에 가까운 검사 결과에 옥은 혀를 내둘렀다. ‘장인’이라 치켜세워봤자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지. 옥은 발가벗은 휘지를 검사실에 내버려 두었다. 휘지는 옥을 이해했다. 유리의 이탈로 받을 영향을 짐작해 데이터베이스와 연결을 끊어둔 걸 잊은 게 분명했다. 검사실에 홀로 남은 휘지는 옷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잔뜩 웅크린 채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해변에 이름 하나를 새기는데 열중했다. ‘유리’가 망각의 파도에 쓸려 사라지지 않도록 새기고 또 새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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