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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휘지>

by 송건자

트램은 생산구역을 관통함에도 불구하고 거주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옥은 다시는 모한을 찾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안 절차가 까다롭고 트램이 유일한 운송 수단이라 크레인 암 같은 중장비 보조기구를 들여올 수 없었다. 기껏해야 큰 스크린에 휘지가 서예 하는 모습을 비추는 게 고작인데 동일한 퍼포먼스를 두 번 보이는 건 처음 느낀 감동을 뭉갤 뿐이라 절대 사양이었다.


“거의 다 왔네요.”


트램은 조금씩 속도를 낮추었다.


이장은 손님들을 이끌고 정거장에서 나왔다. 신선한 공기를 실은 바람이 옥과 유리를 반겼다. 유리는 저절로 콧소리가 나왔다. 바람 사이로 싱그러운 과일내가 느껴졌고 밀밭이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다. 따스한 햇빛은 긴 여행길로 쌓였던 피로를 녹여주었다.


정거장에서 거주구역까지 좁은 길이 이어졌고 길옆에는 밀이 심어져 있었다. 어느 공간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길을 따라 십 분 정도 걸으니 거주구역이 나타났다. 건물이 대체로 단층이라 가까이 갈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네모반듯한 목조건물로 높아야 2층이었고 이웃 건물끼리 마당을 공유했다. 건물 크기로 보아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넓은 지역을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몇 분 안 계신 것 같은데.”


옥이 앞서가는 이장에게 따라붙었다.


“사람 수만 따지면 턱없이 부족하죠. 그렇다고 아무나 받아들일 수 있나요. 전부 안드로이드와 전용 기계 덕분이죠. 그들의 관리가 사람의 몫이고요. 물론 저희도 수확물을 걷어들여요. 벼가 어떻게 나고 밀이 어떻게 자라고 사과가 어떻게 열리는지 알아야 정밀한 관리를 할 수 있거든요. 따라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여기 묵으시면 됩니다.”


이장은 지금까지 보았던 건물 중에 가장 넓고 큰 3층 건물을 가리켰다. 마을회관은 모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다. 결혼이나 장례 같은 지역 행사는 물론 외지 방문객에게 숙소로 내어주거나 외부 행사 준비에도 사용한다.


“이장 님, 안녕하세요.”


마을회관으로 들어서자 유리와 또래가 비슷한 청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이장 뒤에 선 손님들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반반 섞인 눈으로 이방인들을 탐색했다.


“텃밭 이동은. 다 끝났니?”


“네. 자리 옮기고 비료 뿌렸어요. 말씀하신 대로 흙이 말라있었어요.”


“이유가 뭐 같았니?”


“못 보던 벌레가 있었어요. 아무래도 수확 로봇 수리 때문에 시티로 보냈을 때 섞여 들어왔었나 봐요. 굴착기로 마른 부분은 죄다 팠는데 다행히 멀리 퍼지진 않았더라고요. 그래도 탐색 로봇으로 면밀하게 검사해야 할 것 같아요.”


“대처 잘했어. 현장을 본 사람의 판단이 무조건 옳아. 후처리도 부탁해.”


이장은 청년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포’도 이제 다 컸네.”


청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서걱서걱 장갑에서 마른 흙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 그래. 인사드려. 중앙문화보존기구에서 오신 분들이야. 주간 회의 때 말했지?”


이방인을 가로막았던 낮은 벽이 비켜섰다. 이방인과 눈이 마주친 청년은 잽싸게 탐색하는 눈을 거뒀다.


“모한에 어서 오세요.”


포는 놀이공원 마스코트처럼 지나친 반가움을 얼굴에 담아 양팔을 벌렸다. 휘지는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고 일정에 지친 옥은 고개만 까딱였다. 맨 뒤에 서있던 유리는 슬금슬금 걸어 나와 포를 끌어안았다. 별뜻 없었다. 앞선 특별 지구에선 환영 인사가 전부 포옹이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놀랐는데 가장 놀란 건 포였다. 포는 악수하기에는 손이 더럽고 일하고 난 뒤라 땀도 많이 흘려 가까이할 수 없었다. 단지 외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동작을 크게 했을 뿐이었는데 안을 줄은 몰랐다. 유리를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포는 목석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유리가 포를 오래 안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길어봐야 3초 정도였는데 유리의 머릿속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나갔다.


포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값진 노동의 대가지만 몸에 밴 흙냄새와 옷에 밴 땀냄새는 무심코 코끝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냄새는 유리를 그리운 시간으로 보냈다.


엄마, 아빠는 이마에 맺힌 땀도 훔칠 새도 없이 서예에 열중하고 유리는 마당에서 뛰논다. 엄마, 아빠는 온통 흙투성이가 된 유리를 둘러싸고 흙을 털어낸다. 유리는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는다. 유리는 엄마, 아빠 손을 하나씩 나눠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다. 유리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맛 아이스크림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행복한 순간.


유리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헉, 하고 터져 나온 울음소리에 포는 유리를 내려보았다. 유리의 까맣고 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포는 당황해선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유리는 반으로 접힌 손수건을 폈는데 손수건 상태에 포는 더욱 당황해했다. 손수건 안쪽에 마른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포는 작업 도중에 손수건을 사용했다는 걸 떠올렸다. 포는 손수건을 가져가려 했지만 유리는 놓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추억과 만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다.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다른 장비와 연결하지 않고 단출하게 서예 하는 휘지를 큰 스크린에 비추는 게 전부였다. 감독관이 된 이래로 가장 심플한 퍼포먼스였다. 옥은 이 정도 수준의 퍼포먼스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쉬웠고 부끄러웠다. 급기야 시늉만 했다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에 반해 휘지는 만족스러웠다. 크레인 암에 연결하고 커다란 붓을 휘두르며 시선을 끌고 흥미를 돋우기 위한 행동보다 있는 그대로 획을 긋는 모습에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서예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무대 뒤에서 관객들을 살폈다. 자극적인 맛이 덜해 중간중간 하품하는 사람도 보였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쉽긴 해도 짜 맞춘 듯 한 가지 반응만 보이는 건 부자연스럽다. 관객들은 대체로 흥미로운 눈으로 장인의 손짓을 놓치지 않았는데 유독 유리의 눈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었다.


포는 초록색 점프 수트를 입고 있었다. 일하다 바로 왔는지 군데군데 마른 흙이 묻어 있었다. 그는 수족관에 처음 간 아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유리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유리는 불현듯 어제 맡았던 냄새를 떠올렸고 이제는 갈 수 없는 시간을 한 번 더 다녀왔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유리는 관객석으로 내려가 포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특별 지구 투어는 무사히 마쳤다. 중앙문화보존기구가 노린 대로 더 다양한 도시와 기업에서 공연 연락이 왔고 도장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그리고 작지만 큰 변화가 생겼다. 아주 가끔이지만 유리가 도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유리는 때때로 모한에 놀러 갔다. 방문이 까다롭고 시기에 따라 거절당하기 일쑤였지만 유리는 시간이 나면 모한을 찾았다. 모한에서 딱히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마을회관 마당에 앉아 밀밭을 보거나 바람을 맞으며 길을 따라 걸었다. 거주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도 싶었지만 보안 상의 이유로 그럴 순 없었다.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유리는 모한이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모한에 있으면 아무 걱정도 없이 마당에서 뛰놀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유리는 모한에 가면 포를 불렀다. 모한에서 아는 사람은 포뿐이었다. 유리는 포에게 모한을 안내해 달라 부탁했다. 유리는 궁금한 건 모두 포에게 물었는데 포는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여러 번 모한에 방문한 뒤로 유리는 모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지만 포를 계속 만났다. 포와 함께 있으면 갓 빨래한 이불이 포근히 감싼 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했고 편안했다. 유리는 모한 때문인 줄 알았는데 포 때문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리는 점점 포가 좋아졌고 포도 유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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