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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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유리는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옥은 슬그머니 유리 옆에 앉았다. 유리는 인기척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나의 글자를 온전히 담을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세와 정신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것이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글자 하나를 완성한 유리는 호를 정리하고 백지 위에 붓을 올렸다.
“유리야.”
유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사선으로 뻗을 채비를 했다.
“투어 따라올래?”
붓촉 반절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유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도미노 블록은 이미 넘어갔다. 유리는 끝까지 써냈지만 구겨버리고 싶었다. 윗글자와 크기도 맞지 않았고 자간도 엉망이었다. 획도 구불구불했다. 유리는 울상이 되어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옥을 노려보았다. 붓을 건네면 쓰기는커녕 잡는 것조차 한사코 거절하면서 유리가 연습만 하면 허튼소리로 방해하는 옥이 미웠고 그까짓 자극에 무너진 자신이 싫었다.
“방해할 거면 저리 가요. 휘지 님은 어디 가시고 감독관 님 혼자 계세요?”
“깡통은 순수도 검사 중이야.”
“감독관 님, 깡통이라 안 하시면 안 돼요?”
“뭐?”
“휘지 님 말이에요. 깡통이 뭐예요.”
“깡통을 깡통이라 부르는데 뭐. 잘못 됐어?”
“저한테는 소중한 스승님이에요. 여기 오는 다른 분들한테도 요. 제가 감독관 님을 이상하게 부르면 좋겠어요? 저를 봐서라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네?”
옥은 유리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유리는 고개를 돌려 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어쨌든 투어 가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휘지’ 하는 거 보면 나조차도 붓을 들고 싶어 지니까.”
옥은 ‘휘지’를 힘주어 말했다. 유리는 옥을 떠보듯 아래서 위로 바라보았다.
유리는 전문 문하생 프로그램에 투어 참관을 넣어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다. 넷라이브 영상만으로도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현장감을 직접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옥은 다른 요구는 잘만 들어주면서 투어 참관만큼은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옥에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투어는 짧아야 2개월인데 투어 기간에는 힘들어도 도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 도시 저 도시 시차 적응도 못한 채 촘촘한 스케줄대로 끌려다니는 게 다반사다. 귀빈 대접을 받으면 좀 낫지만 대부분은 알아서 소화해야 한다. 크레인 암 같이 큰 보조 장비를 챙겨야 하는 경우에는 그 피로도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퍼포먼스만 마친다고 ‘끝’인 것도 아니다. 퍼포먼스 직전까지 행사 내용 확인하고 변경하고 수용하고 거절하고 퍼포먼스가 끝나면 다음 투어를 위해 뒷정리도 서둘러야 한다. 관계자와의 인사와 식사도 뺄 수 없다. 이렇게 한 도시를 정리하면 새로운 도시에서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투어는 일, 일, 일의 연속이다. 이걸 견디기에 유리는 어렸다.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유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갉아 먹혀도 옥이 버티는 건 투어가 가진 파급력 때문이다. 중앙문화보존기구는 투어를 돈벌이로 여길지 몰라도 옥은 아니었다. 서예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휘지의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서예와 사랑에 빠졌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 옥은 유리가 어떤 마음으로 서예를 대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3년간 유리를 지켜본 지금, 옥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주 스페인부터 시작이야. 준비해.”
옥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그 미소를 의심했지만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따라가도 돼요?”
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유리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유리를 꼬드긴 순간을 꿈꾼다. 옥은 연습에 매진하는 유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는 글자를 완벽하게 완성하고는 투어가 기대된다며 기정사실인양 말했다. 옥은 그 꿈을 구겼다. 똑같은 꿈이 펼쳐지면 옥은 따라오지 말라고 화를 내거나 연습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떴다. 아예 옆에 앉지도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는 밝게 웃고 있는 유리가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옥도 언제까지고 유리가 도장에 남아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휘지에 버금가는 대서예가가 되거나 이제는 없어진 인간문화재가 되어 도장을 떠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유리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혹여 오를 수 없는 절망에 날개가 꺾여 곤두박질친다면 온 힘을 다해 유리를 위로할 생각이었다. 휘지도 유리가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 해도 안드로이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직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병도, 새로 생기는 병도 많았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속절없이 꺾이기도 한다. 지금은 유리가 서예에 모든 걸 쏟아부어도 나중 일은 알 수 없다. 만약 유리가 어느 날 갑자기 붓을 꺾는다 해도 휘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리가 내민 이별 시나리오는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 투어는 특별 지구 열 곳을 도는 기획 투어이다. 특별 지구는 인류가 대격변 이전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설계한 지역으로, 모든 나라가 유례없는 한 마음으로 철저히 보호했다. 비단 국가 간 취급만 비장한 건 아니었다. 특별 지구에 사는 사람들도 본인이 인류를 지탱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지탱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의 삶을 두세 번째로 밀어둘 수 있는 사람만 특별 지구에서 살 수 있었다.
중앙문화보존기구는 어쩔 수 없이 문화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유니크 투어를 기획했다. 누구도 문화에서 절대 배제되어선 안 되며 전통문화 전파라는 창립 취지 아래 중앙문화보존기구가 다방면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특별 지구 투어는 지역이나 기업의 후원이 없어 당장은 손해인 것처럼 보여도 돈만 밝힌다는 중앙문화보존기구의 소문을 타파하고 방문이 어려운 특별 지구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설립 목적, 운영력과 기획력을 피로披露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리는 방문하는 특별 지구마다 눈이 휘둥그레져선 주변을 둘러보느라 목이 아팠다. 그란 카나리아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거대 바람개비. 메나 사막에 띄워진 태양력 풍선. 끝이 보이지 않는 레비노 옥수수 평원. 유리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에너지와 식량 생산 플랜트와 그 규모에 매료되었다. 유리는 특히 ‘모한’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모한은 식량 생산 집중구역 중 하나로, 지구에서 가장 비옥한 토질을 가진 지역이다. 현재 지구에 유통되는 식자재 대부분은 모한과 레비노에서 생산한다.
지구 제일 식량 생산지인 만큼 모한은 아무나 방문할 수 없다. 전 세계 유일 서예 장인이라도. 휘지와 옥, 유리는 출입소 앞에서 안내해 줄 사람을 기다렸다. 얼굴만 동그랗게 내놓은, 그마저도 고글로 절반 이상 가린 사람이 출입소 문을 밀고 나왔다. 그는 노란색 점프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바나나 껍질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장인 님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본인을 모한 이장이라고 소개한 여성이 휘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옥과 유리와도 차례대로 악수를 나눴다.
세 사람과 안드로이드 하나가 출입소 안으로 들어가자 통조림만 했던 가드로봇이 빨간 불을 밝히며 수십 배로 몸집을 키웠다. 유리는 휘지 뒤로 숨었고 옥은 침착한 체하며 이장을 바라보았다. 이장은 겁먹은 방문객을 향해 손바닥을 아래로 두어 번 부채질하고 생체 인식기에 눈을 갖다 대었다. 가드로봇의 빨간 눈이 파랗게 변했고 참치 통조림으로 돌아가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보안이 워낙 중요해서요. 이해하시죠?”
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두 도시에서 비슷한 절차를 밟았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주시겠어요?”
이장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드로봇 뒤 프런트 데스크에서 주황색 옷과 고글을 꺼냈다. 위아래가 붙은 점프 수트였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옥과 유리는 혹시 모를 전염병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피검사를 했고 휘지는 외장을 소독했다. 입장 준비를 마친 세 사람은 이장을 따라 트램에 올랐다.
“트램은 출입소에서 거주구역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에요. 중간에 내리면 걸어오셔야 하니까 절대 뛰어내리시면 안 됩니다.”
이장은 호호 웃었다. 휘지는 이장의 농담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는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차창 너머를 보았다.
“아름답죠?”
유리는 슬며시 웃는 이장과 눈을 마주치고 입꼬리를 올렸다.
“밀을 수확하는 시기예요. 옥수수밭도 있는데 여기서는 안 보여요. 거주구역 반대편에 있거든요. 괜찮으시면 안내해 드릴까요?”
이장은 휘지를 바라보았다. 휘지는 살짝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리허설도 해야 하고 모한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아서요.”
옥이 끼어들었다.
“그랬죠. 수확기라 시간을 짧게 잡은 걸 깜빡했어요.”
이장은 아쉬워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유리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밀밭을 헤치는 수확기를 발견했다. 수확기는 머리빗처럼 생긴 팔을 좌우로 쭉 벌린 채 일정한 속도로 밀밭을 갈랐고 파란색 반디나로 머리를 쫑 맨 사람들이 그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안드로이드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들은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숙이며 컨테이너에서 빠져나온 밀을 줍고 수확기가 미처 베지 못한 밀을 베었다. 처음에는 허리를 굽혔다 펴는 모습이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보여 귀여웠는데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걸 보니 유리의 허리가 다 아팠다. 하지만 즐거워 보였다. 힘들지 않을 리 없겠지만 그들은 기분 좋게 웃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유리는 왠지 저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