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지>
휘지는 천자문을 교보재로 삼았고, 옥도 군소리 없이 동의했다.
유리가 전문 문하생이 된 후로, 휘지 와 옥은 유리의 교육 방향으로 툭하면 갈등을 빚었다. 유리의 템포를 존중하고 보조 바퀴 역할만 하면 된다는 휘지와 달리 옥은 다양한 글자를 접하고 연습할 수 있도록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휘지는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옥의 의견을 잠자코 따랐지만 유리에 대한 문제만큼은 자기 일보다 더 눈에 쌍심지를 켰다. 휘지는 글자 연습을 더 늦게 시키고 싶었다.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능률이 더 오른다. 하지만 유리가 나아가길 겁내고 있으며 한 글자도 못 쓰고 주저앉아버릴 수 있다는 옥의 주장에 휘지는 한발 물러났다.
“오늘도 시작해 볼까요?”
유리는 먹을 갈던 손을 멈추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수업은 휘지가 시범을 보여주고 유리가 그것을 따라 쓰는 식으로 매일 여덟 자, 두 구句씩 진도를 나갔다. 흐름을 타서 진도를 더 빼고 싶어도 옥은 데이터베이스 오염을 우려해 휘지에게 여덟 자만 쥐여주었다.
125번째 구를 떼었을 즘이었다.
“杜稿鍾隸 漆書壁經(두조종예 칠서벽경). 유리, 획이 많네요. 이럴 때는 뭐라고 했죠?”
“쓸 공간을 보고.”
“크기를 결정하자. 그래야 글자 간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까요. 杜稿……. 유리?”
유리가 벼루에 호를 가다듬다 말고 먼산을 바라보았다.
“유리?”
평소라면 휘지가 다음 글자를 쓰기가 무섭게 따라 썼을 유리의 손이 주춤거렸다.
오늘의 유리는 이상했다. 맥이 빠졌다고 할까. 기운이 없었다. 흥미가 떨어진 걸까? 도장에 들어온 지도 2년 하고도 3개월, 유리는 주말도 없이 연습에 매진했다. 투어로 휘지가 자리를 비워도 유리는 쉬지 않았다. 투어를 마치고 2, 3개월 만에 돌아오면 연습한 한지가 도장 한편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휘지는 그것들을 살피며 유리의 실력이 점점 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장인보다 뛰어난 서예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번뜩 스쳤다.
휘지는 유리가 밀어붙이기만 하다가 몸이 상하지 않을지 마음이 꺾이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유리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휘지는 전문 문하생 프로그램에 도장 밖에서 해야 하는 프로그램을 집어넣었다. 옥도 동의했다. 옥 역시 유리의 여정을 끝까지 보고 싶었다. 둘은 유리를 놀이공원에 데려가고 다양한 문화 유적지에 데려갔다.
문하생이라고 해서 도장에 갇혀 지낼 필요는 없다. 인간은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해야 한다. 그건 서예를 온전히 습득할 유리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유리 인생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유리는 아직 어리다. 그럼에도 유리는 도장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운영비를 받았으니 꼭 써야 한다고 옥이 협박하지 않으면 유리는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유리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경지를 한 번이라도 밟아보기 위해 엿보기라도 하려고 발버둥 쳤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휘지는 유리의 손에서 붓을 슬며시 빼 벼루에 두었다.
“괜찮아요, 저.”
유리는 벼루에 놓은 붓에 손을 뻗었다. 휘지는 유리의 손을 잡았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아요. 밖에 나갈래요? 도장에 들어온 뒤로 집에 간 적 없죠?”
“거기 가봤자 제가 있을 곳은 없어요. 도장이 훨씬 마음이 편해요. 휘지 님도 계시고요.”
유리는 휘지의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유리는 붓을 고쳐 잡고 휘지가 쓴 글자를 보았다. 유리는 호를 한지에 내리고 나무 목(木) 변을 썼다. 이어서 흙 토(土)를 쓰는데 머뭇거렸다. 서예는 행위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오늘 유리가 쓴 글자는 문외한이 봐도 불편하고 어색했다. 유리는 稿(조)를 마저 쓰고 휘지 앞에 놓인 한지를 바라보았다. 다음 글자가 쓰여있지 않았다. 휘지는 붓을 내려놓았다.
“유리, 오늘은 그만해요.”
“휘지 님, 저 더 쓸 수 있어요. 써야만 해요.”
유리는 손에 붓을 놓지 않았다. 휘지는 유리가 열심히 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휘지는 유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알았어요. 그 대신 오늘은 천자문은 쓰지 않을 거예요. 하루 쓰지 않는다고 천자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유리가 그동안 쌓은 노력과 실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감독관 님이 뭐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감독관 님이 왜요. 유리한테 뭐라고 할 리 없잖아요. 유리를 얼마나 이뻐하는데요.”
“그게 아니라 진도요. 계획표에 적은 진도는 나가야 하잖아요. 그래야 보고도 하실 수 있고.”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계획이니까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구 124개를 쓰는 동안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으니 한 번쯤은 괜찮을 거다. 만약 옥이 유리를 혼낸다면 화살을 전부 자기로 돌리면 된다. 어깨 축이 틀어져 시범을 제대로 보일 수 없었다거나 어제 받은 글자를 다시 받았다거나. 옥이 핑계를 믿는 건 별개의 문제라 해도.
“그런 건 유리가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유리는 휘지에게 머리를 기댔다. 유리는 떨고 있었고 여전히 붓을 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휘지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휘지는 오늘 하루는 쉬게 하고 싶었지만 유리는 자기 나름대로 써야 하는 양이 있었다. 확실히 오늘은 평소에 비하면 거의 쓰지 않았다.
“혹시 써보고 싶은 거 있어요?”
유리는 입술을 모으고 골몰히 생각했다. 유리는 아직 평소 컨디션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까보단 얼굴색도 표정도 훨씬 나아졌다. 수업이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진 모양이다.
“부모님 이름을 써보고 싶어요. 휘지 님 이름도요.”
“부모님 이름, 알려줄래요?”
유리는 부모의 이름을 한지에 적었다. 가르침이 필요 없는 반듯한 글자였다. 그럼에도 휘지는 유리의 부모 이름과 자신의 이름에 공을 들였다. 주어진 글자는 아니었지만 한자였고 따라 그리는 정도라면 순수도는 위험 수준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유리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획을 그었다.
“자기 이름은 어떻게 쓰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유리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휘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휘지 님, 저 한글 이름이에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한자 쓰기를 좋아하는 유리의 부모라면 유리의 이름도 분명 한자로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휘지가 가진 접근 권한은 한자 번체에 국한했기 때문에 다른 문자는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유리의 부모의 이름을 따라 쓴다거나 본인의 이름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휘지는 붓을 내려놓았다. 서예만큼은 세상 제일이어야 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졌다. 옥에게 접근 권한을 바꿔달라고 부탁할까 싶었지만 옥이 들어줄 리 없었다. 휘지의 요청은 한 번도 들은 적 없을뿐더러 설령 유리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해도 주어진 단어가 아닌 단어를 허락 없이 함부로 쓴 건 순수도를 떨어뜨리는 반항 행위다. 무엇보다 오늘은 이미 세 번이나 규칙을 어겼다.
유리는 부모와 스승의 이름이 적힌 한지를 걷어내고 새 한지를 깔았다. 그리고 슥슥 붓을 놀렸다.
“이게 제 이름이에요.”
유리.
반듯하고 또 아름다웠다. 휘지는 글자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선을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 먹이 묻었다. 분명 알고 있고 수없이 써봤음에도 ‘유’와 ‘리’의 조합은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고 흥분되었다. 휘지는 제 손으로 직접 탐험하고 싶었다.
휘지는 자세를 고쳐 앉아 유리가 쓴 ‘유리’를 옆에 두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한지에 붓을 올린 순간 휘지는 붓을 떨어뜨렸다. 순수도 저하 감지. 감독관 확인 바람. 경고문이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야?”
옥이 안방에서 튀어나왔다. 휘지는 벼루에 붓을 내팽개치고 검은 얼룩 위에 앉았다.
“감독관 님, 이거 보세요.”
유리는 순진한 얼굴로 엄마 이름을 적은 한지를 들어 보였다. 옥은 엉거주춤 앉아 있는 휘지를 수상쩍은 눈으로 흘끗 히면서 잘 썼다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는 아빠와 스승의 이름을 차례차례 보여주었고 옥은 맞장구쳤다. 유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독관 이름은 어떻게 써요?”
“내 이름은 알파벳이라 한자가 없어. 굳이 쓴다면 보배 옥(鈺)을 써. 발음이 같거든.”
옥은 조금 기대하는 눈치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실망이 두 뺨을 스쳤다.
“감독관 님,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세요.”
옥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한편 눈가가 무거워졌다. 옥은 감독관이 되기로 결심한 뒤로 한 번도 붓을 들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에게 시킬까 싶었지만 고작 한 글자를 쓰려고 데이터베이스에서 한자를 찾고 적당한 서체를 고르고 접근 권한을 수정하고 다운로드하는 성가신 절차는 사양이었다. 옥은 하는 수없이 붓을 들었다. 쓰다 남은 한지 귀퉁이에 조그맣게 鈺을 흘겨 썼다. 유리는 그것을 보고는 성심성의껏 鈺을 썼다.
“와, 진짜 잘 썼다. 유리야, 이거 내가 가져도 돼?”
“어, 그러면 다시 써드릴게요.”
“이거면 돼.”
“더 잘 써드릴게요.”
“아니야. 이거면 돼. 이것도 잘 썼어.”
유리와 옥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주고받았고 유리가 이겼다. 옥은 유리가 새로 써준 한지를 들고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휘지는 그들만의 세계에 빠진 두 사람의 시야에서 빗겨 앉아 작디작은 메모리에 ‘유리’를 새기는 일에 몰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