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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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지 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왜 과거형이냐 물으신다면 휘지 님이 이 편지를 받으셨을 때 제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요.
먼저 제게 변명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상냥한 휘지 님이라면 분명 그러실 테죠. 혹시 싫으신가요? 그래도 변명부터 늘어놓을래요. 하하하.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저는 제멋대로예요. 어린아이 같은 저를 이해해 주세요.
몇 번이나 도장에 찾아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모한은 항상 일손이 부족해 한 명이 빠지면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나머지가 힘들어져요. 사람들은 찬란하고 편리했던 과거의 영광으로 달려가는데 그걸 가능케 하는 현실엔 외면해요. 저희도 이런저런 강구책을 마련하려 애쓰지만 쉽지 않네요. 그렇다고 나 몰라라 내뺄 수 있겠어요? 저는 이 힘든 것까지 포함해서 모한을 사랑하는걸요. 제 세 번째 인생이 전부 여기에 있고요. 결국 달력에 이루지 못할 별표만 그릴 뿐이죠.
겨우 시간을 내면 아이들이. 말씀드렸죠? 셋이나 있답니다. 사람들은 요즘 시대에 셋이나 낳았냐고 하지만 제 아이들을 보면 그런 말을 못 할 거예요. 말썽꾸러기들이지만 저를 닮아 모두 귀여워요.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아파서 주저앉고 말았어요. 편지에도 적었었지만 모한에 전염병이 돌았어요.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피해가 막심했죠. 맏이와 막내는 무사히 피했는데 둘째가 걸리고 말았어요. 그 탓에. 저희 둘째를 나무라는 건 아니에요. 휘지 님 생각은 마음 한편 깊숙이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미안해요.
휘지 님에겐 전부 변명처럼 들리겠죠. 하지만 한편으론 휘지 님 탓도 있어요. 제가 몇 번이나 편지를 썼는데 한 번도 답장을 안 주셨잖아요. 우리 휘주, 지유, 리옥이 사진까지 보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자 주소라도 받을 걸 그랬어요. 휘지 님께 보낼 편지는 붓과 한지로 써야 한다고 왜 고집스럽게 생각했었는지…… 정말 바보 같죠?
아직 화가 안 풀렸어도 이해해요. 저는 저만 생각해서 휘지 님 곁을 떠났으니까요. 그래서 휘지 님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생각도 있었어요. 워낙 휘지 님은 바쁘고 함부로 찾아갔다가 어긋나는 건 피하고 싶었고요.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결국 휘지 님을 만나지 못한 건 아쉽고 마음이 무거워요. 그냥 찾아뵐걸. 순방하는 도시라도 꾸역꾸역 찾아갈걸. 다짜고짜 도장을 찾았던 날처럼요.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해요. 비에 쓸려 사람이 죽는 날씨에 겁도 없이 도장에 갈 생각을 어떻게 했었을까요. 아홉 살이 말이에요. 저희 막내보다 한 살 어린 나이예요. 아무리 갈라진 부모님 사이를 이어 붙일 수 있다고 믿어도 그렇죠. 제가 봐도 참 대책이 없어요. 그 덕분에 휘지 님과 감독관 님, 포와 우리 세 아이를 만났으니 최고의 선택이 되었지만요. 만약 부모님이 재결합했더라면 도장에 다시 가지 않았을 거고 제가 거머쥔 이 모든 행복도 없었겠죠. 저를 갈가리 찢은 아픔이 저를 기쁨으로 충만케 한 걸 보면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해요. 휘지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씨가 엉망이죠? 모한에 있으면 밭일이나 아이들 때문에 좀처럼 붓을 쥘 시간이 없어요. 그래도 겨를철에는 아이들을 일찌감치 재워두고 혼자 방에 앉아 한지를 펴요. 휘지 님이 주신 그 한지예요. 먹을 갈아 붓을 적시고 백지 위에 선을 그으면 그만한 힐링이 없어요. 휘지 님과 감독관 님과 함께 지냈던 날들이 떠올라 한 글자도 못 쓸 때도 있어요. 끝까지 써보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휘지 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말아요. 지금이 슬프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그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가끔 휘지 님이 모한에 오는 꿈을 꿔요. 저와 포, 아이들과 손을 나눠 잡고 넘이오름을 걸어요. 휘지 님 손은 항상 제가 잡아요. 아이들이 떼를 써도 절대 양보 안 해요. 저는 휘지 님 옆에 꼭 붙어선 재잘재잘 떠들어요. 포의 잠버릇이 어떤지 휘주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지유가 가장 좋아하는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리옥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무엇인지 모한에서 지내기 좋은 계절이 언제인지 전부 다요.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져요. 세계 곳곳을 다녀본 휘지 님이라도 모르실 걸요?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바람이 선선해지면 집으로 돌아와요.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수박을 먹어요.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다가 휘지 님은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며 붓을 달라고 해요. 아이들은 신이 나선 이것 써달라 저것 써달라 하지만 저는 아이들을 다독여요. 제가 보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요. 그건 휘지 님이 정말 쓰고 싶은 글자예요. 다른 누가 정해주지도 않고 다른 누가 바라지도 않은 글자. 한 글자라도 좋아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보지 못해요. 휘지 님이 한지에 붓을 찍는 순간 매번 꿈에서 깨요.
슬슬 손이 떨리네요. 더 많이 쓰고 싶지만 점점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예전에는 하루 종일 붓을 잡아도 손 한 번을 안 떨었는데. 그래도 더 늦기 전에 휘지 님께 편지 쓰길 잘했어요. 더 늦었다면 제 마음을 전부 담지 못하는 이 편지마저 남기지 못했을 테니까요. 항상 보고 싶었어요. 정말이에요. 맹세코요.
휘지 님,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나요? 딱 하나만요. 제가 행복을 찾은 것처럼 휘지 님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비록 행복을 거머쥔 시간이 길지 않고 제가 바라는 대로 끝맺진 못하지만 그래도 포와 우리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거든요. 그러니까 휘지 님도 저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저희 모두 세상에 스쳐 지나가는 존재잖아요.
정말 줄여야겠어요. 손이 말을 안 듣네요.
또 편지할게요.
행복해 주세요.
안녕.
<계속>